국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우리는 행정학의 관점에서 국가의 형성은 상비군제도를 통한 절대왕권을 확립하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세 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변화를 볼 때 그 계기는 당연히 전쟁이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섬나라로 외부의 침입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지방영주들을 중심으로 해서 왕권이 강화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상비군이나 조세제도도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지방분권이 가능했고 영국의 의회는 매우 평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배웠다. 이에 비해서 미국의 경우에는 오히려 연방으로 만들어지면서 다양한 방식의 제도들의 미국에서 발전하게 되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상업'에 의한 '산업'의 발전으로 시장자유주의에 의한 국가형성이 주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부터는 조선에 대해서 알아본다. 왜 우리는 국가형성을 공부할 때 조선을 이야기하는가? 이런 고민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행정의 관점에서 조선과 현대를 살펴보면 오히려 불연속과 단절의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조선은 당시 국제정세로 볼 때는 세계국가체저 속에서 수동적인 국가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100년간의 한국의 역사에서는 일제식민지, 미군정, 냉전체제 하에서 인권유린과 시민들의 항쟁이 주가 되었다. 물론 산업화를 통해서 시장자유주의가 꽃피우는 1997년 IMF이후에 시장에 의한 국가운영이 이루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국가형성을 어떤 관점에서보는가에 따라서 국가를 규정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역사적으로 분할과 단절, 또는 연결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국가형성의 기준은 보통은 국가권력(공권력), 실적주의 관료제 성립, 국가조세제도, 법치제도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부터 일제시대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 한국을 쭉 살펴보자.
조선은 사실 정도전의 디자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대부의 국가였다. 그러다 보니 역사영화나 드라마처럼 왕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절대 왕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양반, 사대부가 천하를 호령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사대부를 중심으로 국가의 형성을 보면 조선은 대단히 중앙 집권화된 국가였다. 하지만 상비군, 관료제, 조세제도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약한 나라였다.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한다. 의정부서사제는 조선초에 도입되어서 1516년에 부활했다. 이것은 사대부의 나라를 대표하는 군약신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그 반대인 육조직계제는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는 제도였고 태종 때와 세조 때에 전환되었다.
국왕은 양반 관료국가의 수장이면서 균형상태에서 양반지주와 균형상태를 유지하고 권력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당쟁이 심각할 수 밖에 없었고 탕평책 같은 제도를 들여온다고 하지만 양반계급의 분열은 여전히 왕권의 강화를 막고 독살과 배신, 음모와 배신이 횡행할 수 밖에 없었다.
양반만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제도만 그런게 아니라 내용에서도 유학을 하지 않으면 읽을 수 조차 없었다. 자산어보에서는 이것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양반은 가장 높은 계급으로서 농업과 관련된 토지, 지대와 관련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함께 중앙관료제의 통제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양반에게도 능력주의에 의거한 실적주의로서 과거제도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도 마이클샌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건이 불균형한 능력주의'였다. 따라서 유교경전을 이해하고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계급으로 한정되었고 이것은 관직에 진출하는 계급은 오직 양반계급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전에 영국과 프로이센에서 동일한 효과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조선의 관료는 지식인이면서 지주세력이면서 양반이었다.
이렇게 되자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되었다. 중앙관료가 적었던 반면 지방은 정원과 녹봉제가 적용되지 않음으로 아전들의 가렴주구가 상상을 넘었다. 지방수령들은 또한 짧은 임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임기에 최대한 많은 것을 챙겨야 했다. 먹이사슬의 구조가 존재했다. 지방에서 모은 돈은 지방수령이 중앙의 세도가들에게 전달하면서 '상납제도'가 만들어졌고 그 가장 큰 착취대상은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경제력, 생산력은 매우 낮았다.
목민심서는 사실 조선시대 가렴주구가 너무 심해서 그것을 반대로 쓴 것이다.
조세제도는 당연히 농업소득이 낮았기 때문에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관료제를 유지하는 세금이 부족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뿐 아니라, 상비군을 운영하기 위한 자원도 부족했다는 것이다. 농업소득이 낮은 이유는 토지에 대한 실질적인 소유권을 양반이 가진 부분 때문에 '생산력을 위한 혁신'보다는 오히려 착취를 더 가혹하게 만드는 지주제도를 발전시켰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이러한 부분에서 '어민'들의 생산력을 증대하기 위해서 그 동네에서 고기를 가장 잘 잡는 '창대'에게 배운 내용들을 국민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자산어보를 짓는다.
상비군의 약체와 관료제의 불완전한 존재, 조세제도의 미비는 대외적인 요인도 존재했다. 명을 사대하고 스스로를 소중화로 만들어 버리는 외교정책은 국방보다는 외교를 통해서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했다. (이런걸 보면 한미동맹 강화라는 외교정책으로는 국방력강화라는 비전은 환상에 불과하게 된다) 내재적 요인도 존재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세제도의 약화는 군사제도의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농민이 중심이 되서 가장 큰 군대의 핵심이었는데 양반이나 노비는 조선에서는 군대를 가지 않았다. 군역제도의 비효율성은 불평등한 신분제도와 조세제도와 연결되어서 새로운 문제들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냈다.
왜 조선은 근대국가가 되지 못했는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왕권과 사대부사이에서 힘의 균형은 유지는 되었지만 이로 인해서 강력한 군사력과 조세제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국왕과 양반계급의 공생관계가 오히려 국가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조세제도의 정비와 세수입의 증가, 강력한 군사력의 건설과 효율적인 관료제 건설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 이후에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은 어땠을까?
이 지점에서 정도전의 기획은 과연 성공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일제침략기 국가는 무엇이었나?
일제침략기에 한국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혹은 깨지고 혹은 붕괴했을까? 전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이 식민지를 경험하게 된 시기는 제국주의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기였다. 제국주의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해보았자 식민지의 생산력은 늘어나지도 않았고 우드로윌슨의 원칙처럼 민족자결주의와 자의식은 대단히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급격하게 성장한 군사력을 중심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문화적으로 뒤쳐진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으로 내리누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강력한 저항을 억누리기 위한 헌병과 경찰 등의 강제력이 발전하게 되었다.
중국청도의 칭따오 맥주 공장은 유럽의 맥주를 가장 처음 아시아로 가져온 것이었다.
일본은 인접국을 식민지화했다. 언어나 문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중심부인 동경과 식민지인 한국을 연결하여 교통과 통신인프라를 건설했다. 해방 직전까지만 해도 약 90만명이 일본에 거주할 정도였다. 중싱부와 주변부 간의 시장관계가 매우 빠르게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철도, 항만, 통신수단에 대규모의 투자를 하게 된다. 해군이 아닌 헌벙을 이용해서 억압을 하는 반면 한반도를 통합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산업화를 촉진하여 상품생산에서 제조업의 비중이 높아졌다. 1940년이 되면 산업부문이 전체 생산의 약 40%를 차지한다. 산업노동자의 수는 1943년에 약 130만명이나 되었다.
일본 침략기에는 당연히 쌀의 수취가 가장 큰 손실이었다. 보통 제국주의에서는 커피나 바나나 혹은 향신료를 착취하기 위해서 일부지역에서 수취해갔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 당시 인구가 5천만명이었기 때문에 일반 주민들의 식량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식민지에서 체계적으로 쌀을 가지고와서 일본 국내에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관료제 안에서 쌀의 수치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만들어진 행정단위가 '면'제도이다. 면에서는 영롱조합을 만들어서 쌀의 생산력을 늘리고 지주계급를 통해서 이것을 관리했다. 지주계급은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쌀 수취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심훈의 상록수는 정말 슬픈 이야기이다. 한국의 세포마다 일본은 빨때를 꼽고 빨아들인 다음 자신들의 시민들을 먹였다.
일본은 어떻게 근대국가가 되었나?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영국에서는 해군의 군제와 교통체제, 입헌군주제를 가지고 왔다. 또한 헌법과 행정체계는 일본이 해석한 방식으로 식민지를 운영했다. 엘리트행정관료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프상느느 자유정치학교인 시앙스포를 만들었고 이것을 프로이센으로부터 배워서 관료 양성 전문학교인 제국대학을 일본 동경에 설립하였다. 한국에는 당연히 일본이 해석한 프로센의 모델이 이식되었고 국가주도적인 근대화 모델이 확장되었다. 1910년에는 조선총동부에 1만명의 관료가 존재했다.
일제의 통치를 용이하기 위한 방식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관료를 증가시켰다. 조직화되고 규율잡힌 관료제적 식민지주의가 전통적인 조선의 관료조직과 토착적인 계급들을 무너뜨렸다. 헌병과 경찰조직을 중심으로 강제력을 기반으로 하면서 막스베벼류의 관료제를 연결시켰다. 엄격한 시험을 통해서 관료를 충원하고 행정과 교육을 통한 전문성 고양과 함께 능력에 의한 승진과 부패를 최소화하는 급여체계를 도입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관료제의 근간이 된다. 이 부분이 한국의 행정 발달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경성제국대학에서는 일본식 관료제를 이식하여 식민지조선을 다르리기 위한 관료들을 양성한다.
피치자의 동의한 기반한 지배라는 법의 개념에 기초하여 정부의 억압으로 부터 시민을 보호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것은 일본이 해석한 프로이센의 법치주의를 한국에 이식한 결과였다. 식민지 민중에 대한 억압 수단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였다. 다시 말하면 법을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법규만능주의의 엘리트집단과 법을 위반하는 것이 애국이 되는 문화가 동시에 공존하게 되었다.
3. 해방이후 한국 국가형성 과정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한국은 수련의 남하를 막기위해서 동아시아의 버퍼링스테이트로 사용된다. 미국의 입장에서 그리고 서방의 입장에서는 한국이 세계국가체제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편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하다. 세계국가체제에 편입되고 그 다음이 자본주의에 편입되었다. 국가로써의 위격을 갖추어야 세계국가체제에서 하나의 주권국가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미국은 한국의 국가화를 강화했다. 그것이 급격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1945년부터 48년까지의 미군정이었다. 이 당시 미군정에서는 공산주의와 좌파세력을 척결하기 위해서 극우적인 국가를 성립하려고 했다. 물론 미군정은 목표가 반공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다면 어떤 방법도 동원이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정에서 지주계급이나 관료계급이었던 친일파들이 등용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미국은 군사력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국가화를 모든 체제국에 도입하려고 했다.
미군정에서 한국의 형성
미군정은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였다. 한반도의 분단과 일제의 관료제가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구 민주주의의 이념을 제도적으로 이식하기 위한 반공과 민주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국가를 발전시킨다. 미군정 초기에는 당연히 남한 지역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좌파세력을 척결하려고 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이나 4.3학살 사건이 발산한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관료 조직으로 법무부, 법원, 경찰조직을 강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 조선총독부 관료들과 경찰들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정부의 구조 측면에서는 전환기적인 변화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역사적 처음으로 삼권분리이 제도화된다. 역사적 제도주의에서 볼 때 미군정은 역사적 변화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현재 한국행정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바로 미군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군정에 의해서 주권재민, 복수정당, 자유선거, 정당조직, 국민기본권, 여론형성, 법치주의, 정부권력 분립원칙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의 국기가 내려가고 미국의 국기가 올라간다. 미군정하에서 한국은 가장 큰 역사적 변곡점을 맞게 된다.
이승만정부
대한민국 국가 관료제는 미군정의 관료제를 그대로 계승했고 대한민국의 국가 관료제가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직을 그대로 계승했다. 1953년만해도 일제 하의 관료의 세 배에 달하는 30만명이 공무원이 되었다. 국가의 강제력이 강제적으로 팽창되면서 조선경비대의 규모는 한국전쟁 후에 7만 5천명이나 되었다. 국가의 행정적 억압적 기구야 말로 국가권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며, 이를 통해 국가가 사회에 대해 높은 자율성과 권력을 향유하게 되었다.
1948년부터 1950년대까지 농지개혁은 지주계급의 정항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했으나 계급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오게 된다. 농지의 70%가 재분배되었으며 2백만 농민 가중 중에서 100만 가구 이상이 혜택을 입었다. 무엇보다도 지주계급이 몰락하면서 가난하기는 했지만 한국사회는 매우 평등하고 유동성 잇는 사회로 급격히 재편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효과때문이지 이승만정부의 노력때문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국가의 형성은 국가가 독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사회세력들의 존재는 미비한 상태에서 외부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내부에서 독재가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세계국가체제로 편입과 토지개혁에 따른 계급구조의 변화, 식민지 지배유산으로 경찰과 관료제의 공존, 여기에 국가 강제력의 강제적인 확장으로 인한 국가권력의 공고화는 이 시기에 민주주의제도는 있었지만 민주정부는 없는 상태를 지속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