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 시리즈 3_대중
the public이라고 한다.
공공성을 생각하는 무리라고 할 수 있다.
the mob이라는 개념의 폭민이라는 개념도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공중이 진정으로 존재하는가? 니프만과 듀이의 논쟁이 1920년부터 시작한다. 니프만은 1930년 공중은 유령이라고 판단하면서 공중이라는 개념은 필요없다고 선언하면서 등을 돌린다.
공중 프로젝트는 지식인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식인의 책무, 공중과 연결된 상태에서 어떤 방향vector로 갈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아래로 부터 올라가는 bottom-up인가 혹은 top-down인가?
근대 이후 생겨난 공유된 세계를 상실한 개인들의 집합
정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음.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 무관심이 대중의 특징이며 오로지 관심사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몫의 크기와 자신이 소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임.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사는 것 모임을 말한다.
사회society는 공유된 가치가 없이 집합된 정도를 뜻한다. society라는 개념은 commercal society에서 부터 시작한다. 경제적인 의미에서 공유된 가치가 없이 이익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집합체를 이야기 했다.
헤겔 ; family와 state라는 공동체의 발전 가운데 등장한 근대의 개념은 society였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인 market이라는 society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매우 큰 문제가 되었다.
정치철학의 입무는 분해된 개인들을 어떻게 화해시킬까이다. 어떤 단위로 묶을 것인가? 어떻게 정체성을 부여할 것인가?
이런 대중의 아무것도 공유하지 못하는 무세계적인 속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정치적으로 속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현실로 드러남
대중은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익만을 맞춰줄 수 있다면 호응할 수 없음.
이들에게 정치는 구경꾼들의 스포츠이며 투표자들은 합리적인 토론에 직접 참여하며 자신이 지지하는 바를 결정하는게 아니라, 광고 및 홍보운동을 통해 지지 여부를 판단한다.
대중사회는 the mass of population인구의 대다수가 사회 속으로 융합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society라는 개념은 아주 근대적 기획으로 더 나은 근대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society가 아니라 community였다.
공유된 세계의 사일의 일상적 표현 everyday expression of loss of the world
정치적으로 행동할 필요도 없으며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필요도 없는 사회
공통의 관심사가 부재한 채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사회
사적 이익이 공적관심을 압도하는 사회. 한나아렌트는 이러한 사적이익distribution이 freedom이라는 공적영역을 잠식해버림으로써 정치의 영역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이 원자화되어 외로움과 고립이 일상화된 사회
대중 사회가 극단화될 떄 전체주의 사회가 등장
전통의 맥이 끊어진 상황에서 스스로 과거를 발견해야 하는 것
이를 테면 아무도 읽어본적이 없는 것처럼 과거의 저작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독해는 19세기 미국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락 시간은 우리 생활 필요가 요구하는 모든 염려오ㅘ 활동으로 부터 해방되어 세계와 문화를 위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여전히 생물학적이고 노동가ㅗ 수면으로 쓰고 남은 잔여시간이다.
오락 산업이 제공하는 상품은 사용되고 교환되기 위해 존재하는 가치가 아니라 단지 다른 모든 소비품과 마찬가지로 소비되어 없어질 운명이다.
전체주의 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다
전체주의지도자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대중을 통솔하고 끝까지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 것은 다수결의 원칙에서 보면 합법적이었다.
만약 그나 스탈린이 대중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면 그들은 다수의 주민들에 대한 리더십을 유지할 수 없었고 안팎의 수많은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없엇으며 냉혹한 당내 투쟁의 수많은 위험과 용감하게 맞설수 없었을 것이다.
전체주의 운동이 지속되는 한, 운동의 조직적 틀 안에서 열성 당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코 경험과 논증이 아니다.
전체주의 운동의 추종자는 운동과 일체가 되어 그 법칙에 완전히 순응하기 때문에 경험이 고민이나 죽음의 공포처럼 극단적이라 할지라도 경험의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전체주의는 수에 의존
전체주의 운동은 순전히 수의 힘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교적 인구가 적은 국가에서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리한 상황에서도 전체주의 정권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무엇이 그 수의 기반을 만드나
국민국가가 몰락하고 대중사회가 생겨나는 가운데 경험했던 superfluousness 쓸모없는 존재의 난무에서 생겨난 대중이야 말로 전체주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계급 기반으로 형성되어 각 계급이 정치정당을 통해 자신을 대변하던 국민국가가 20세기에 들어서며, 무차별적 평등이 강조되는 동안 계급 없는 사회로 이행되는 가운데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잃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대중들이 탄생한다.
대중운동은 전통적인 정당의 사회적이고 비개인적인 구성원들을 매료시킨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쉽게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 즉 개인주의적 이유에서 항상 사회적 유대나 의무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전형적인 방관자들을 끌어당겼다.
폭민의 구성원들은 어디에 속하지 못헀다는 점에서 계급이나 조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다.
대중 사회의 원자화에서 탄생한 집단이다
이들은 흩어져 있는 자신들을 조직하여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자신들을 채워줄 지도자들을 기다린다.
전체주의 운동은 이런저런 이유로 정치조직에 대한 욕구를 가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다.
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은 공동 관심이 아니다.
단수히 수가 많거나 공공업무에 가한 무관심 때문에, 아니면 이 둘 다의 이유로 인해 정당이나 자치정부, 전문조직 또는 노동조합처럼 공동 관심에 기초한 조직으로 통합될 수 없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만 대중이라는 용어는 적용된다.
적응력과 상관없은 외로움loneliness ;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홀로됨
고립 isolation ; 세상사로부터 홀로됨
고독 solitude ; 나와 나 자신과 마주함
격해지기 쉬운 기질
표준적 기준의 결여
판단 불능 혹은 심지어 구별조차 못하는 소비력
무엇보다 자기 중심성과 자기 소외로 오해되어 온 세계로부터 숙명적인 소외를 말한다.
어떤 개념이 만들어지고 그 개념이 탄생한 시점부터 아이가 자라듯이 그 개념은 점점 자라서 수 많은 의미들을 내포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면서 역사가 된다. 그러면서 정말 사람처럼 그 개념, 단어, 문장은 죽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한다. text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유하고 있는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중요한 방식이다.
대중사회라는 것은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발생하는 판단의 부담을 타자에게 맡겨 버리기 때문에 더 깊어진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나면 혹, 누군가가 대중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하면 일부러 환경을 위협하고 책임을 더 지는 방식으로 상황을 만들어서 대중들의 의존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가지 않을까?
나르시스의 꿈' 김상봉 교수님의 논의를 빌려 오자면 서양은 한번도 자기 자신을 떠나본적이 없다. 따라서 홀로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개념사에서도 공중이라는 개념이라는게 존재하는가의 문제를 논의할 때도 그 정체성의 바닥에는 홀로 정체성이 존재한다.
외로움'이라는 개념 혹은 실재는 우리의 삶을 옥죄는 2가지 중에 하나이다.
우리의 인생은 두려움과 외로움의 두가지 평행선에서 계속 어려움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느낀다. 어떤 이는 두려움이 사라질 때 안전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외로움이 사라지는 누군가에 속해있어거나 어떤 것에 속해 있는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두려움의 개인적인 극단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이며(스스롤 믿고 있는 것) 외로움의 개인적인 극단은 허세이다. 허세는 사실 자기자신을 속이면서 다른 이에게 존재하는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관계의 없음으로 부터 나온다면 허세를 통해서 관계가 있음(사물, 사람들과, 어떤 능력과)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전체주의가 된다.
공유할 수 있는 공고사가 있다고 믿으며 그 공공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 공공사의 결정함에 있어 스스로 참여한다는 뜻으로 의사결정과정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공중은 당대 민주주의가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좋을 중요한 개념이다.
공중은 언제나 공공사에 관심을 기우이는 존재이기 떄문에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공중은 사람들이 일정한 공통의 가치, 헌신, 상호작용하는 제도적 패턴, 자신들이 잘 운영되는 공동체라는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이다.
이런 점에서 공증은 공적인간과 사적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점이다.
기본적으로 공중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려고 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보를 넓게 취하고 가려내는 능력은 공중의 기본적 자질이다.
공중은 앎을 기반으로 권력을 만드어가는 존재하는 점에서 지식과 권력을 결합하려고 하는 존재이다.
기초공증의 개념에서 심의 민주주의가 탄생한다.
지식인은 intellectuals라고 부르며 항상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말한다.
권력엘리트는 power elite라고 부르며 항상 권력에 서는 사람들을 말한다.
신좌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60년대 미국 학생운동을 만들었던 기폭제가 되었다.
기초공중 primary public1)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민주주의
의사결정의 토대로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토론을 가장 기초저인 수단으로 삼는 집단으로서 작은 기초공동체에 더욱 뚜렷이 모습이 드러나며 대중매체가 형성한느 의견에 휘둘리지 않으며 권력의 중앙 집중화와 중앙 집중화된 제도적 권위에 휘둘리지 않는 집단이다.
밀스는 이런 공중을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는 작은 집단 속에서 자신들의 공적 사안에 대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시민들로 묘사한다.
의회는 제도 기구로서 모든 기초 공중의 왕좌에 있다.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는 작은 집단속에서 자신들의 공적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서로 얼굴을 맞대는 시민들 각각의 집단에게 의회는 그 원형이다.
그래서 확신하건데 공중은 고전적인 18세기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베틀이며, 토론은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는 집단을 함께 묶어주는 실과 북이다. - 밀스 -
공중과 저항
오웰은 유명한 에세이 '고래 안에서'에서 대주오하된 세계의 변화 불가능성을 언급했다.
당신이 고래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세계의 흐름 속에 맡기고, 그 것에 맞서 싸우거나 당신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척하는 일을 그만두어라
간단하게 그거을 받아들이고, 인내하고, 기록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중은 자신이 고래 밖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월터 리프먼. 여론public opinion1922이라는 책에서 유령공증the Phantom Public1925에서는 더욱 직설적으로, 대중 정부 popular government에 대한 어떤 이론이 '중요한 일의 방향을 결정하는 공증이라는 견해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그 이론은 환상에 근거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낟.
리프먼은 '공직의 순환, 전문가에 대한 경멸과 같은 초기 민주주의에 나타난 현상은 지혜의 여신이 쥬피터의 이마에서 완전 무장한 채 태어났다는 오래된 신화만큼이나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수십년을걸려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두고 아무것도 배울 필요 없다고 가정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리프먼은 복합적인 산업경제의 발전과 선전선동의 정교한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열성적인 민주주의자들의 이상주의적 가정들이 더욱 순진한 것이 돼버렸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상은 환멸을 낳을 뿐만 아니라 간섭하길 좋아하는 전제정치를 낳게 될 것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공적 사안의 방향을 제시할 수 없게 되면, 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기대되는 어떤 철학이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게끔 유도할 것이다.
공중의 공중의 자리에 있어야만 하며, 그럴 때 그 자신의힘을 그들이 가진 힘만큼 행사할 수 있다.
혹은 그 이상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 각자가 현혹당한 군중들의 분노에 짓밟히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것이다.
공중 형성은 가능하다.
존 듀이는 공중과 그 문제 the public and its problems1922에서 리프먼이 묘사한 당대미국 공중의 모습에 동의한다.
하지만 듀이가 동의한 까닭은 다만, 좀 더 완전한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힘을 쏟아 부을가치가 있는 일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이웃끼리 우호적 공동체에서 시작하는 민주주의로써 듀이는 민주주의는 집에서 시작해야만 한도고 주장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집은 진보 시대의 개혁의 운명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적 감정 없이 표를 행사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기계적인 제도들이 아니라 이웃끼리 우호적인 공동체이다.
지역공동체에서 시작하라 ; 에머슨이 말하듯 우리는 거대한 지성의 무릎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런 지성은 잠들어 있고, 지역공동체가 지성을 잇는 가교 medium가 될 때까지, 지성의 싀소소통은 단절되고 불분명하며 약한 채로 존재할 것이다.
과제 ; 결국 '지식과 권력을 결합하는 일, '공중'을 형성하고 알리는 일, 참여민주주의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일에 있어 지식인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전망을 제시하라 ; 필요한 것은 공중을 되찾아 올 수단이며, 지식을 권력과 연결하고 양자 모두를 분산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편파적 정부 및 정부기관, 수동적 관료주의, 지역주의, 세대갈등 등과 같이 개인들이 불가피하게 얽혀 있는 문제에 간심을 지니는 공동체 혹은 참여민주주의가 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전망이다.
모든 사상가들은 안전한 집속에서 생각하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피난처가 필요하다라고 듀이는 주장했다.
거대한 싸움이다. 샤츠슈나이더와 그의 제자 월터 리프먼이 이야기하는 정당전체주의에 대해서 cw밀터와 제임스밀러의 지식인의 책무로서 공중들의 탄생을 위한 지식의 희생말이다.
전자는 일반대중'은 사람들에게 변화는 불가능하고 변하를 만들어내는 것은 항상 엘리트라고 말한다. 그래서 엘리트가 애초에 될 수 없는 사람들은 정당이나 엘리트들이 만든 제도나 결정을 잘 따르면 된다는 논리다. 흔히 이러한 사람들을 철인이라고 부르고, 플라톤의 이론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후자는 사람들은 대중'이 아니라 공중'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사람들이 앎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옮겨감으로써 점점 정치적인 권력을 공동체 안에서 풀어내는 것을 이야기 한다. 이것은 철처하가게 소크라테스에게서 온다.
인생에는 혹은 지식에는 세가지의 길이 있다. 플라톤이냐 소크라테스냐 혹은 이것을 포기한 아리스토텔레스인가? 이 세가지 안에서 결정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태도이다.
메타인지연구소를 하루바삐 발족시키고 사람들을 대중에서 공중으로 일으켜 세우는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문제는 공중의 방향성vector의 문제가 중요해지지 않을까? 그럴려면 앎이라는 지식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