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근원어 '나-너'의 '나'이거나 근원어 '나-그것'의 '나'일 뿐이다. '나'라고 말할 때 사람은 '나-너'의 '나'이거나 '나-그것'의 '나'이거나 그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이 두 '나' 가운데의 어느 한 '나'가 존재하고 있다. 그가 '너' 또는 '그것'이라고 말할 때는, 두 근원어 가운데서 이에 알맞는 '나'가 거기 존재하고 있다. '나'임과 '나'라고 말함은 같다. '나'라고 말하는 것과 두 근원어 중의 어느 하나를 말하는 것은 같다.
사람은 근원어를 말하는 바로 그 때에 근원어 안으로 걸어들어가 그 안에 선다.
사람의 삶은 타동사의 영역에서만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대상물로 소융하는 것만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지각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의식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짐작하고, 아쉬워하고, 느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이것들만으로 이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따위들이 모여들어서 이룩해 놓은 것은 '그것'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너'의 세계는 이와는 전혀 다른 기초 위에 전개된다.
'너'라고 말하는 경우, 그 말을 건넨 사람은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곳에는 다른 '것'도 그 곁에 존재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은 으레 다른 '것'과 맞닿아 있다. 즉, '그것'은 다른 '것'에 의하여 한정될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라고 말한 곳에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너'를 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있어 '너'라는 말을 건넬 때 그 상황 속에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너'라는 말을 건넬 때 사람은 관계의 상황 속에 서 있는 것이다.
'나와 너'_마르틴 부버
세계는 마주보고 있다.
내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으면, 그대로 그 대상 역시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항상 어떤 것과 쌍으로 존재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보고 있으면 보여지는 사람은 보여짐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보이는 곳에 그 대상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의 의식은 어떤 곳을 향해서 끊임없이 찾아 다니고, 그에 따라서 시선도 따라다니다. 세계에 대해서 일정한 상을 두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균형을 잡아갈 때 '세상'이 내 안에 바로 선다. 세계를 보는 상이 바로 세상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보는 관점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 진다. 내가 보는 것에 인격체가 존재한다고 믿으면 '너'를 보게 된다. 그러면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너'의 관계 속에서 나를 규정해준다. 그리고 '나-너'의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의미가 부여된다. 신과 '나'가 '나-너'로 연결되면 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나와의 관계 안에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반대로 '나-그것'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것의 층위에서 세계로 쪼개진다. 따라서 나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계로 쪼개진 상태가 된다. 나는 물건이거나, 동물이거나, 기계이거나 한다.
나를 인격체로 느끼는 사람은 다른 이를 인격체로 느낀다.
시간상으로 반대이다. 다른 사람을 인격체로 느끼면 나를 인격체로 느낄 수 있다. '나-그것'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일정한 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등급을 정할 수 있거나, 계층을 나눌 수 있다. '나-그것'의 관계에서 그것을 모두 돈으로 환산하게 되면 나 자신도 동일하게 화폐로 바꿀 수 있다. 내가 바라보는 방식으로 나 스스로가 인식된다.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주고 받는 경험이다.
'나와 너'는 '나와 그것'과 함께 근원어이다. 이 근원어에서 우리의 정신이 나오고 세계를 나누는 기준이 나오며,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 나온다. 우리는 보통 근원어를 잘 쓰지 않고 사물의 표면이나 다른이의 표정에만 머무르는 말을 쓴다. 그래서 관계는 대부분 피상적이 되고, '것'들의 관계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진다. 내가 누군가를 멸시하는 순간 나는 그 멸시하는 대상과 마주하여 멸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축복하는 순간 나는 그 대상과 마주하여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로 인식하는 근원어의 세계에서는 기쁨과 보람, 깊이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삶은 타동사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자체로 존재함으로서, 어딘가에 속해 있음으로서 있다. 있는 방식이 '나와 너'이냐 '나와 그것'이냐에 있을 뿐이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항상 타동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목적이 있어야하고, 그 목적은 목적을 정한 사람과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대상이 나누어진다. 그러나 자동사의 세계에서 '나와 너'는 목적이 없이도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 규정할 수 없는 '너'의 세계가 곧 무한의 세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