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웅거_주체의 각성 3장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관념을 제시했고 이것을 이성으로 꿰뚫어봐야한다고 했다. 이러한 유산을 데카르트가 이어받아서 생각하는 존재의 당위성을 말했다. 명석판명한 관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명징한 진리가 이성이나 생각이었다.
퍼스는 명징한 진리를 얻으려면 실험과 실천, 행위를 해보아야 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론이나 가설은 실제로 해보아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퍼시에게 의미란 실험했을 때 얻은 결과가 된다.
우리의 생각은 어떤 규칙에 따라서 이루어며 세계를 구성한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을 확인할 수 있을 때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다.
제임스에게 진리의 기준은 실생활의 유용성이다.
실생환에 나에게 필요한 진리는 유용해야하고 또 유용한 것은 진리가 된다. 우리가 실생활을 살 때, 대체로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된다'라고 하는 프로세스와 메뉴얼은 이러한 제임스의 진리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작용하는 법칙이나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 실용주의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란 어떤 실제적 행위의 결과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진리이다. 숲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면된다는 것을 믿고 따라 갔더니 인간을 찾았다고 한다.결과를 도출했을 때 그것은 진리이다. 그런데 그결과를 도출했던 방법들은 메뉴얼이 되어서 하나의 진리가 되어 버린다.
제임스는 진리에도 현금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현금가치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정도가 있고 현금으로 바꿨을 경우 그 중요성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듀이는 처음에는 헤겔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제임스의 책을 읽고 실용주의와 다윈의 이론을 합쳐서 도구주의를 만들었다.
진리란 관념과 사상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우리 실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되었을 때만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체이고 생명을 보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성도 하나의 도구가 되어서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지식이나 사상은 결국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을 능동적으로 바꾸어나가고 문제를 예측하기 때문에 미래를 열어 놓고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역사적으로 서부개척시대에 매우 필요한 방식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사용해야했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의 아버지들의 노력은 인정을 하지만 그것은 실천의 과정을 다시 고민해보아야 한다.
플라톤을 부정하거나 헤겔을 부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진리의 범위는 실용에만 있지 않고 인간이 살아가고 고민하는 모든 보이지 않는 영역도 포함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실천과 인간의 정치적이고 재구성적인 실천도 구별해야 한다.
웅거는 '사유와 실천'을 연결하는 방식이 자연주의에 의해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거나, 이상주의에 맞게 생각의 결과로만 보는 실용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편견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퍼스의 의미론을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개념의 사용이 개념의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반대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상점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일까?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상점이 많아지는 것일까? 실용주는 그 어느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념의 사용은 개념의 의미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개념자체를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웅거가 보기에 제임스의 이론은 실재의 표상과 욕구의 경험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실재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욕망이 실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실용주의가 욕구에 의해 결과를 예측하고 그 방식으로 실현하면서 그것을 진리라고 말한다면 그 욕구에 대한 정치적인 능력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인 능력이란 '가치의 권위적인 결정'이고 이 권위를 모든 국민이 가졌기 때문에 합의와 토론이 필요하지만 현실주의에서는 '현실적으로 결과를 냈으니 이게 진리다'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결과를 만들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사실 합의나 토의의 기회도 빼앗아 간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얼른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효과를 보고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치는게 먼저이고 통찰과 설득, 이해와 토론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해와 설득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한 차이를 좁혀가거나 동의를 얻는 것이 정치적인 과정이라면 제임스의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배제되는 것이다.
제임스의 현실주의적인 접근은 웅거가 보기에 자연주의적인 결말로 이어질 것이다. 현실이 이렇게 되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다음에는 하나의 패턴이 되어서 사이비 필연성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나때는 말이야~' 혹은 '내가 해봤는데~'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웅거는 반영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반영부란 빛을 받는 천체에 의해 뒤쪽으로 드리워진 완추형 그림자의 바깥 부분으로, 주어진 광원에서 나오는 빛이 부분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부분이다.
한편 본영부는 원추형 그림자 안쪽 부분으로,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부분이다. 반영부는 회화에서 명암이나 노담의 경계 부분을 뜻하며, 일반적으로는 의미 등의 경계 영역을 가리킨다.
반영부의 의미를 일상적으로 옮겨오면, 어떤 사태의 발전가능성이나 미래적 여지, 현재 사태의 변혁 가능 범위라고 할 수 있다.
웅거는 이를 통해 세계가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도, 역사가 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필연주의 사고도 경계한다.
법철학자 하트는 언어의 의미 영역을 핵심부와 반
영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언어의 핵심부는 확실성의 영역인데 비해, 반영부는 본질적으로 모성과 불확실성의 영역이다.
웅거는 듀이의 비판에서 2가지의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의 싸움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싸움은결국 실용주의를 자연주의의 테두리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에 실용주의를 완성하지 못하게 만든다.
세계에 등장하는 현실은 가능성, 잠재성이 실현된 세상이다. 그러나 미래를 열어 놓지 않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도구로서의 이성은 그 도구적 한계 때문에 미래에 필요한 도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 수 없다. 도움이 되면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버러지는 도구가 된다.
그런데 현실은 우연성의 관점에서 그 때는 도구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도구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변화에 대한 이해가 자연주의적 태도인 진화론에 의해서 미래를 닫아놓게 된다. 그래서 복고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과거의 풍습, 관점, 스타일, 문화는 그 자체로 듀이의 관점을 비판하는 현상이 된다.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다윈주의를 받아들이면 인간은 그 자체로 도구가 된다. 도구적으로 유용한 것들이 진리가 된다면 유기체의 관점에서 도구와 연결된 사람도 도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연에 적응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관을 가진 듀이의 도구주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도 자연의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웅거의 비판은 가열차다.
급진적 실용주의가 원래의 의도에 더 충실하려면, 이러한 모호성을 행위자로서의 인간과 그 야망에 유리하도록 단호하게 해결해야 한다.
유한한 유기체의 자연주의적 형상은 강력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행위자로서 인간을 지지하는 철학은 이러한 진리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제약에 맞서 우연성을 사용할 수 있는 행위자로서의 인간상을 더 실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또한 자신의 관심에 냉담한 자연적 과정의 도구로 전락한 도구제작자로서의 인간상을 덜 실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유를 셕힌하고 사회를 캐편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위자로서의 인간상이 사유하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상보다 더 진리성을 갖게 되는 미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미국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퍼스의 의미론, 제임스의 진리론, 듀이의 경험론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 이론들은 해당 이론의 지속적인 관심의 바탕을 이루는 동기들을 명료화하지 못하고 심지어 배반한다.
각 이론 속에서 인간성과 자의식에 대한 통찰은 지식과 자연 일반에 대한 요청으로 너무 경솔하게 대표됨으로써 그 가치가 퇴색한다. 그리고 자연적 세계에 대한 지식이 인간에 대한 지식의 모델이 아니라 단지 그 어렴풋한 확장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각 이론은 실용주의에 자연주의 이론을 덧씌운다. 행위자로서 인간이 전부라고 생각한 철학자들은 인간적 실재뿐 아니라 자연적 실재 너머에 있는 지점을 향한 매우 오래되고 보편적인 탐색을 다시 한번 시작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우리가 실제로 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지점, 즉 인간적 세계 내의 한 지점에서 자연적 세계를 관찰한다는 사실에 동의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가지 특징적인 아이디어들이 처한 불운은 그 근본적인 모호성의 명백한 징표들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우리에게서 '민주적 실험주의'라는 대의에 대해 더 잘 봉사하고, 영원한 철학에 맞서는 반란을 더 잘 진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빼앗는다.
실용주의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당장의 생활과 삶과 일하는데 있어서 유익을 주어야 하는 것이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유익을 주기 위한 목적에 따라서 효과와 효율을 셋팅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한다. 영구혁신이라는 의미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 변혁해야한다는 것이 실용주의의 의미가 되었다.
인간 행위자는 맥락과 전통, 확립된 제도들과 통용되는 교리를 통해 형성되고, 사멸하는 육체에 갇혀 있으며, 출생과 죽음과 관련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존재로서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필사적으로 원하며, 자신이 갈망하는 무한한 것과 끝도 없는 연속되는 하찮은 신호들을 혼돈하며, 타인에게서 위안을 구하는가 하면 자신 안으로 숨어들아가 사물을 타자에 대한 방패로 사용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시간에 때로는 격정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끝도 없이 몽유병자처럼 배회하며,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지만 운명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조차도 운명과 투쟁하며, 자신의 운명과 모순된 야망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하지만 그러한 화해가 불가능하거나 혹시 가능하더라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필경 침통하게 인정하는 존재이다.
비록 변화가 점진적일지라도 무엇이든 맥락, 곧 우리의 맥락 안에서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무한한 단계적 조치들의 형태 속에서 변화는 관념들에 유도될 수 있다. 우린느 저항과 재구성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증대시키는 실천 관행과 제도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정신이 행위자가 가진 저항과 초월의 역량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면, 우리는 사회에 정신을 불어 넣을 수 있다.
필연성, 가능성, 우연성의 양상 범주가 자연적 세계에 적용되면, 그 범주는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규정하는 우리 관념들과 분리될 수 없다.
자연과학의 특정 분야, 곧 우주론은 필연적인 것은 필연적이고 가능한 것은 가능하며, 우연적인 것은 우연적이라는 의미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
필연성, 가능성, 우연성이라는 특수한 관념은 단지 특수한 이론이나 이론군에 대한 간단한 지시에 불과하다.
인간과 관련한 인간적 경험 속에서 우연성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는 우리의 이해를 자연주의의 족쇄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연성은 단순히 게으른 사변이 아니다. 바로 이 부담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른다. 우리가 애써 이 부담을 부정하거나 가볍게 다루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이 부담은 서로 다른 요소들의 단단한 조합이다.
우연성은 맥락초월적이고, 예측을 벗어나기 때문에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이 우연성 때문에 인간의 행위주체성은 언제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연성의 4가지 구성요소
1. 인간 삶의 더 넓은 구조로서 우주와 그 역사가 존재한다.
2. 자연탐구에 있어서 이론의 확정이 어렵다.
3. 역사적인 시간은 개인과 집단으로 확히 나누어지지 않고, 영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4. 인생에는 행운과 은총, 사랑이 들어 온다.
인간은 모순투성이로 시간의 실재성에 갇혀서 살아간다. 그러나 미래를 지향함으로써 실존의 현재 조건에 완전히 휘둘리지 않고 현재를 살아간다.
과거의 사태가 미래에 영향을 덜 미치도록 하는 사유와 사회를 조직해야 한다.
위기에 의존하지 않는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주어진 역사적 상황에서 미래를 위해 살려는 노력은 우리가 관념과 사회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구조의 수정을 조직화하는 구조의 구성요소들은 초시간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구성요소들을 시간성에 물든 자료들로 버무린다.
위의 세가지 주제를 결합하면 실험주의가 된다. 새로움과 창조의 관념을 추가해서 반영부에 있는 가능성을 끌어내야 한다.
새로움의 생산을 촉진하는 방법은 사람들의 협동적인 작업방식을 상상력의 사회적 구현체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일상적인 투쟁과 비상적인 투쟁이 교차한느 영원한 과정에서 영구혁명이 일어나고 이 자리에는 어김없이 실험주의가 있다.
정치는 실험주의를 사회생활의 다른 영역을 조직하는 힘으로 만든다. 우리가 얼마나 위기에 덜 의존하면서 변화를 달성하는 것이 정치에서 실험주의를 잘 실현한 결과이다.
인간은 스키마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에서 전환이 필요하다. 라벨링이 필요하고 하나의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
종교적 차원에서 행위의 주체성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명명덕이라는 동양철학의 흐름을 가지고 오면 '하늘이 내려준 소명이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살면서 풀리지 않은 고민과 딜레마가 있다. 모든 사람이 하늘의 소명을 받았다면 불의의 사고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 자체를 진리로 놓는 것은 아니다.
존 듀이의 경험으로서의 예술은 추상화 작업에서 수리적으로 접근한다. 과학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웅거는 예술이 배제된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유기체인 인간의 존재는 예술성을 탑재하고 있다.
웅거는 우연성과 필연성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은 자유이다. 스스로 있는 자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한편으로는 창의적인 부분도 포함되지 않는가? 문화적인 영역에서는 실용주의가 발전하게 되면 더 큰 창의성을 높일 수 있을 것 같다.
피카소는 '그림으로 전쟁한다'라는 표현을 남겼다.
큰 위기가 왔을 때 바꿀려고 하지 말고 일상에서 계속 혁신을 진행하라.
철학이나 정치든 융합될 수 있다.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로움을 줄 수 있느냐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다.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세상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만, 기존의 방식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것은 기계가 아닌가? 어느순간에는 단절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나온다.
실용주의가 모든 것의 답은 아니다. 종교나 가정, 예술 모두를 실용주의로 해석할 수는 없다.
효율은 인풋대비 아웃풋을 말하는 것이고, 효과는 목정한 바를 이루는 것이다. 사회복지에서도 효율보다는 효과를 더 중요시한다. 실용주의는 효과인 것인가, 효율을 말하는 것인가? 삶을 합리적으로 살고 싶지만 막상 우리의 삶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실용주의 입장에서는 시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닌가?
실용주의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정의해야 한다. 인간을 정의하면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지점을 고민해야 한다.
웅거는 자연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실용주의를 이야기했고, 또한 같은 방식으로 현실주의에 대해서 실용주의를 말한다.
우리는 현실주의와 싸워야 하고, 이상주의와도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