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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21. 2021

부정신학의 눈으로 신학을 바라보기

더글라스존홀_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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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홀은 1970년대부터 환경신학자로 서구신학계에서는 유명한 사람이다. 특히 청지기 윤리에서도 '생태모델'을 제시하면서 청지기로서 지구와 환경, 동물과 자연에 대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가고 있다. 신정론에 있어서도 '악'의 문제를 다루는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비아출판사나 카톨릭출판사에서는 '기독교'보다는 그리스도교라고 보통 부르는데 여기서 이번에 더글라스존홀의 책을 번역했다. 홀은 서구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는 다음과 같이 3가지의 흐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기독교가 한 사회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볼 때 프리크리스텐돔, 크리스텐돔, 포스트크리스텐톰으로 나눌 수 있다. 기독교가 미비하게 영향을 미치기 전이 프리그리스텐돔이라면, 사회와 국가에서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크리스텐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변방에 밀리면서 사회속에서 사라지는 과정에 있는 것을 포스트크리스텐돔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떨까? 



어쩌면 유사 크리스텐돔을 유렸던 한국교회의 1990년대 전후의 부흥이후에 2020년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유사 크리스텐돔의 시대가 지나가고 기독교 세계가 붕괴해가는 질문은 비단 한국에서만 중요한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서구 기독교에서는 경험하고 있던 문제였다. 존 홀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결국은 홀의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다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부터 시작하는 프로그램에 많은 분들을 초대한다. 


https://brunch.co.kr/@minnation/2534



1. 홀의 문제의식


그리스도교 세계는 붕괴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진지한 그리스도교인들은 한가지 물음에 긴급하게, 새롭게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실로,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 이 신앙-전통에서 '종교'라는 껍질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의 핵심에 충실하면서도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고, 겸손하게, 사랑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을까?_들어가며p21


홀의 문제의식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들어가서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세대이다. 그럼 누가 하는가? 담대하게 보수적인 기독교, 극단적인 기독교인들만 이야기를 한다. 기독교 신앙을 독점하고 있는 근본주의 세력들에 대해서 세상은 더욱 더 반감을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교양을 갖춘 그리스도교인들은 점점 시대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감춰지고 있다. 



2. 타당성 구조


그럼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어떤 개념이나 존재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타당성 구조'라고 말한다. 누구나 보더라도 생활을 할 때 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럼 '타당성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질까?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던지, 태극기를 들고 가서 성소수자에게 비난과 욕설을 퍼붙는 이들의 신앙이 과연 좋다고 여길까?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어떤 타당성을 획득하고 있는가? 타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종교는 앞으로 다루겠지만 사회 속에서 도태되거나 혹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3. 계몽적 기독교로 변화


한국기독교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주술적 종교의 방식을 취했다. 하나님의 만나가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만나가 뿌려지거나,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역사가 불의 혀처럼 임하는 과정을 실제한다고 믿는 주술적 종교가 이제는 습관, 제도, 예전이 더 강해지고 있다. 물론 주술적 종교의 방식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경험과 체험'이었다.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훈훈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란 체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문화적인 것이 가까울 것이다. 현재 시대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주술적 기독교에서 계몽적 기독교로 변화되는 요청이 있는 것이 아닐까?



4. 부정신학의 눈으로 보기


애초에 우리에게 신앙을 주는 이는, 우리 안에서 시낭ㅇ이 솟아나게 하는 이는 초우러적 신비다. 그리스도교, 특히 서구 드리스도교는 종교적 확신과 정치적 힘을 추구하는 가운데 너무나도 자주 이 초월적 신비를 부시했고, 가렸ㄷ.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부정'. 혹은 '부정신학'은 자신이 궁극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감지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저 초월적 신비를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이 신학은 어떤 강령이나 체계, 생각이나 말로 환원될 수 없는 '한 분'을 향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보통 신자들이 성스럽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을 비평한다. P23


존 홀은 부정신학을 시전한다. 무엇이 아닌가? 그리스도교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게 부정신학의 특징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이 기독교인가? 무엇인 하나님의 특성인가?라고 하는 긍정신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기독교가 아닌 것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진정한 실체에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5. 종교학자들의 시대

예전에는 순환논증이 가능했다. 성경 본문을 성경으로 증명했다. 마찬가지로 목사와 교회의 권위를 교회의 목사들이 정당화시켜주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객관성'의 입장에서 종교학자나 종교사회학자가 교회를 진단하고 기독교를 진단하는 방식이 많이 등장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장단점이 모두 존재한다. 예를 들면, '탈교회'라는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왜'그런지가 아니라 상황자체를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그친다. 그래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행동이나 실천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주 편한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어느정도의 객관적인 거리를 가진 기독교인들은 마치 저 산위에서 조망하면서도 자신의 손에 흙은 묻히지 않는 태도를 '교양인'의 태도로 취할 수 있게 만든다. 



6. 폭력적인 종교


종교는 사람을 죽인다


폭력적인 세계 속에서 종교는 무엇이었나? 무엇이어야하는가? 이런 고민들을 해본다. 종교는 사람의 2001년 9월 12일 가디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종교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면서 정상적인 생활까지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종교는 폭력을 외치며 그것을 정당화하는 위치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것을 벗어나는 컨셉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양한 방식의 명상이나 문화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우리 중 다수는 종교를 헛소리지만 악의는 없다고 생각했다. 종교적 믿음은 근거가 부족한 신념일지언정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므로 별다른 해가 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911사태이훙 모든 것은 바뀌었다. 밖으로 드러난 신앙은 무해한 헛소리가 아니다. 치명적으로 헛소리다. 종교적 믿음은 위험하다. 이는 무엇을 하든 자신들이 옳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음 위험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그릇된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사릅게 다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제동 장치까지 제거해 버린다_서론 p26



7. 문화종교의 시대

기독교는 초기 단계에서 '대면적 관계'를 통해서 회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난 사람들에게 삶 자체를 살아갈 때 자신의 삶을 투영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기도회를 참석하고, 성가대에 가입하고, 중등부교사모임을 하는 등등은 문화적인 부분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어도 어느정도 생활과 엮여들어가는 부분들이 보인다. 그러다가 이제 기독교가 사회제도와 축제, 분위기와 맞물려 가면서 대부분의 사람도 모두 누리를 수 있는 문화의 형태로 발전한다. 예를 들면, 추수감사절에 먹는 칠면조 고기나 크리스마스때 선물을 주고 받으며 축제를 즐기는 것들이 바로 이것에 속한다. 앞으로 우리는 문화적인 차원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나아가야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볼 것이다.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북미권 신학자로 손꼽히는 더글라스 존 홀이 평생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해 숙고해 온 바를 ‘부정 신학’의 방법을 빌려 표현한 책. 그가 85세 때 쓴 저작으로 본인 스스로 “생의 마지막 저작”이자 “평생의 신학 작업이 반영된 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총 6장에 걸쳐 그리스도교의 주요 요소들(종교, 성서, 교리, 교회, 진리)을 부정 신학의 방법으로 접근해 ‘그리스도교는 문화-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의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교리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이와 관련된 논의를 진행한다.



논의를 진행하면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마르틴 루터, 칼뱅과 같은 고전적인 프로테스탄트 신학 전통에 있는 논의들과 바르트, 틸리히, 본회퍼, 칼 라너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의 논의를 균형감 있게 살피며 그리스도교를 이루는 주요 요소들의 자리를 검토하고 그 핵심에 있어야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부정 신학이라는 신학사의 중요한, 하지만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는 활용되지 않은 방법론이 어떠한 식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성찰하는데 활용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며, 오늘날 그리스도교 세계가 처한 문제점이 신학적 문제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헤아려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목차


바치는 글
들어가며
서론

폭력적인 세계 속 종교
거짓 걸림돌 피하기
부정의 방법으로 신학하기
연구 목적

1. 문화-종교가 아니다
종교가 아니다!
문화-종교와 예언자적 신앙
그리스도교와 문화, 종교적 다원성

2. 성서의 종교가 아니다
경전의 백성?
근본주의와 성서주의
신대륙에서의 성서
종교개혁 사상에서의 성서
결론: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미래

3. 교리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교리: 필요한 것, 그러나 복잡한 것
그리스도교 교리는 왜 이렇게 복잡한가?
종교에서의 교리, 신앙에서의 교리
결론: 교리의 미래

4. 도덕 체계가 아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도덕으로 축소된 신앙
도덕적 차원이 왜 이렇게 우세할까?
도덕적 권고의 한계들
종교도 도덕도 아닌, 삶
율법이 아닌 복음

5.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필요성
거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회
경계를 넘어선 신앙?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누가 알까? -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익명의 그리스도교
결론: 그리스도교 세계 이후의 교회

6. 진리가 아니다
우리를 사로잡은 진리
생각의 다른 길
진리에 관한 성서적 사유 틀 - 관계성
관계적으로 생각하는 진리
진리-지향

결론
중심에 있는 한 얼굴
부정 신학
중심의 공간
중심에 있는 한 이름
나자렛 예언자, 예수
단순한 그리스도교
중심, 그 공간에 있는 한 얼굴

나가며



1928년생. 조직신학자. 토론토 왕립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다 목사의 소명을 갖게 되어 웨스턴대학교를 거쳐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M.Div, 신학석사S.T.M., 신학박사 학위Th.D를 받았다. 이후 캐나다 연합교회 소속 목사로 사목 활동을 하다 1965년 서스캐처원대학교 신학부 교수를 거쳐 1975년에는 맥길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 맥길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 지겐대학교, 일본 도시샤대학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퀸스대학교, 워털루대학교, 몬트리올 연합신학교 등 10개 대학교 및 신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2003년 그리스도교 신학 분야에 남긴 공헌을 인정받아 캐나다 훈장을 받았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개신교 신학자이자 상황신학 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남긴 조직신학자로 평가받는다.


저서로는 상황신학 3부작으로 불리는 『신앙을 생각하기』Thinking the Faith(1991), 『신앙을 공언하기』Professing the Faith(1993), 『신앙을 고백하기』Confessing the Faith(1996)와 『목소리들을 기억하다』Remembered Voices(1998), 『왜 그리스도교인인가?』Why Christian?(1998),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말과 그리스도교의 미래』The End of Christendom and the Future of Christianity(2002), 『복음을 기다리며』Waiting for Gospel(2012)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진실로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 반세기가 넘게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얻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질문에 모두가 만족할 만한 답을 내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을 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무엇이 아닌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상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고 정의하는 것보다 늘 더 어려운 법이다. 그 대상이 유기적이고 움직이며 변화하고 역사적인 실재일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물론 우리는 그 대상이 무엇이 아닌지를 명시하기 위해서라도 잠정적으로나마 (그리고 직관을 발휘하여) 그 대상이 어느 정도 통합되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한 방식으로나마 대상이 아닌 것을 대상의 중심부에서 제거해낸다면, 그렇게 해서 공간을 남겨둔다면 대상은 자신의 중심, 물자체Ding in sich가 있는 곳에서 자신을 스스로 입증하거나 혹은 (같은 말을 달리 표현하면) 그 형언할 수 없는 신비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다가가고,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증언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2디모 2:15)한다면, 그리하여 중심의 공간을 비운다면 우리가 정확하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그 거룩한 여백을 성령께서 채워주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목적이다.
--- pp.38~39

분명, 참되고 탁월한 신학은 하느님의 계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땅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전하는 계시는 비범하고 강렬한 지식(‘스키엔티아’scientia)이 아니며 단순한 정보도 아니다. 거룩한 분과 마주하여 우리가 갖게 된 것은 순전한 경이와 겸손이며 그러한 경이와 겸손의 결실은 지혜(‘사피엔티아’sapientia)다. 이는 어떤 면에서 궁극적인 것 자체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데서 나오는 일종의 신비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계시에 대한 경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요한 3:16)에 대한 깨달음과 감사에서 시작된다.
--- pp.41~42

신앙과 종교를 구별한 것은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이다(물론 오늘날 무수한 대학의 종교학과에 속해 있는 이라면 이에 관해 할 말은 너무나도 많을 것이다. 모든 현상을 이러한 식으로 비판하는 것이 가능한지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신앙과 종교를 구별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에 대해 비판한 또 다른 신학자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를 들 수 있다. 그는 바르트를 “종교 비판을 시작한 최초의 신학자”로 평가했으며 “이는 그의 커다란 공로”로 남아있다고 말했다.8 본회퍼 또한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과 종교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예수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삶으로 부르셨다.”
--- pp.69~70

종교개혁자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여긴 것은 모든 권위를 초월하시는 하느님 한 분뿐이다. 예언자들은 불타는 덤불에서, 산 정상에서, 꿈에서, 한밤중에, 고난과 추방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절대적인 권위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도들은 제자의 길을 걸으라는 무명 떠돌이 랍비에게서 그 권위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스도교의 기나긴 역사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전통,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의회에서 결정한 신경들, 자신들이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이들의 합리적인 생각들, 성인과 신비주의자들의 신앙 체험, 지금 여기에 있는 교회의 사목 활동과 정신 등… 그리고 그중에서도 성서는, 특히 개신교 신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권위를 갖는 요소다. 하지만 그조차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당신 사이에 더 영원한 관계를 맺으시기 전에 잠정적으로 이 성서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이 아무리 성서를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겼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교를 성서의 종교, 성서를 믿는 종교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 pp. 133~134.

그리스도교 교리가 복잡한 두 번째 이유는 신약성서 자체가, 즉 복음서와 서신들이 초대 교회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질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질문 중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느님, 즉 히브리 유일신론에서 나온 한 분 하느님과의 관계였다.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성과 인성) 개념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교리가 성서에 엄격하게 종속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이는 곤혹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교리들은 성서를 증언하기 위해, 구약과 신약의 일치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나자렛 예수를 단순히 지혜로운 선생 혹은 예언자, 혹은 많은 신 중 하나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 약속된 메시아, 자신들 가운데 성육신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이어가면서 어떻게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신학을 없애지 않았다. 그들은 다신교라는 위험한 영역에서 방황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어쨌든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 pp.143~144.



출판사 리뷰

북미권을 대표하는 신학자 더글라스 존 홀의 마지막 저작
그리스도교는 무엇이 아닌가? 무엇이 그리스도교의 부차적인 요소이고 무엇이 핵심 요소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성찰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이의 사유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저작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오해들을 규명하는 데 있다. 지금부터 다룰 요소들은 분명 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그리스도교 신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이 그리스도교의 중심 자리에 오를 때,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앙 고백의 자리에 오를 때 이 요소들은 잘못된 걸림돌이 된다. 실제로 이 요소들은 그리스도교 바깥에 있는 이들은 물론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도 갈등과 소외를 낳는 지점으로 기능하고 있다(이를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취약 지점들을 파악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진정으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스도교에 관한 무수한 주장들이 만들어내는 짙은 안개와 어둠을 뚫고 참된 신앙 고백 혹은 복음의 선포가 그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말이다.” (서론 중)

더글라스 존 홀은 북미권, 특히 캐나다의 가장 대표적인 개신교 신학자로 손꼽히는 학자다. 그는 유니온신학교에서 20세기 초 신학의 마지막 거장들(폴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고 칼 바르트와 본회퍼의 신학적 유산을 북미라는 상황 속에서 이어가는데 평생을 바쳤다. 특히 그는 상황 신학이라는 현대 신학의 새로운 흐름에 중요한 공헌을 남긴 이로 꼽힌다. 이 책 〈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는 더글라스 존 홀이 평생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해 숙고해 온 바를 ‘부정 신학’의 방법을 빌려 표현한 책으로 본인 스스로 “생의 마지막 저작”이자 “평생의 신학 작업이 반영된 책”이라고 평가했다.


이 책에서 그는 총 6장에 걸쳐 그리스도교의 주요 요소들(종교, 성서, 교리, 교회, 진리)을 부정 신학의 방법으로 접근해 ‘그리스도교는 문화-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의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교리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이와 관련된 논의를 진행한다. 논의를 진행하면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마르틴 루터, 칼뱅과 같은 고전적인 프로테스탄트 신학 전통에 있는 논의들과 바르트, 틸리히, 본회퍼, 칼 라너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의 논의를 균형감 있게 살피며 그리스도교를 이루는 주요 요소들의 자리를 검토하고 그 핵심에 있어야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성서와 전통을 중시하면서, 그에 기대어 모든 ‘인간적인 것’을 상대화하는 고전적인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현대에 새롭게 제기된 탈그리스도교 세계라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적절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 노대가는 회고적 반성을 군데군데 곁들여 이야기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부정 신학이라는 신학사의 중요한, 하지만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는 활용되지 않은 방법론이 어떠한 식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성찰하는데 활용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며, 오늘날 그리스도교 세계가 처한 문제점이 신학적 문제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헤아려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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