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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신학이라는 방법은 '무엇이 아니다'라고 정의하면 진정한 무엇이 남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서가 아니다, 교리가 아니다, 도덕체계가 아니다' 등등으로 살펴보았다. 오늘은 그리스도교는 '교회가 아니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주제를 다루어 본다.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많은 것을, 교회는 갖고 있지 않다.
교회가 가진 많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갖고 계시지 않다.
1. 교회의 필요성? 교회는 반드시 필요한가?
성서, 그리스도교 윤리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라는 명사를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 중 하나다. 이론적으로 특정 상황에서 교회가 없는 그리스도교가 가능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우찌무라간조의 무교회주의와 같은 운동 말이다. 교회라는 말 자체는 분명 우연히, 혹은 자의적으로 구성된 집단과 같은 인상을 줄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 그를 기억하는 이들, 그거 여전히 자신들과 함께 한다고 믿는 이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공동체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긴 역사 속에서 이 공동체는 교회로서 그 역할을 담당해왔다. 다음과 같은 논의들이 교회의 필요성과 연결해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루이지 :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했지만, 나타난 것은 교회였다. 이것은 교회의 제도적인 차원에서 가치를 떨어
마크스 보호 : 그리스도교를 말하다'에서는 중생, 재림, 성령, 예수그리스도, 거듭남 등등 주제를 다루지만 교회를 다루지는 않는다. 탈교회주의,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역사적 예수를 논의하는 것과 같다.
일반 신자 : 최근들어 교회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교회 자체를 떠나서 더 영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교회는 종교적이지 영적이지는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종교라는 틀 속에서 교회는 자체의 문화로 매몰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존재론을 부정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하나의 보수적인, 다소 복음주의라는 측면에서 보수적인 부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반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그리스도교의 필수 요소이다.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메시지, 복음을 듣는 이들이 죄, 즉 무관심하고 망가지고 파괴적인 관계로 인해 서로 분리된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연합, 하나의 몸을 창조하려고 한다. 이것이 이 땅에서 복음의 목적이다. 교회가 새로운 창조를 완전히 이룬 곳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다. 교회는 그 자체로 복음 선포의 첫번째 결실이다. 교회가 없다면 그리스도교 메시지는 너무나 추상적인, 순전한 이론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화해의 메시지는 실제로 화해를 이룬 공동체가 선언할 때만 신뢰할만하다.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데 교회가 그리스도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2. 교회의 본질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살아 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교회는 살아 있다. 그렇다면 시대의 상황과 환경에 계속해서 반응하는 유기체와 같이 교회도 반응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시대와 상황에 맞게 반응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문화를 만들었다면 분명 교회를 이탈하는 사람보다는 교회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정의는 '공유된 정체성'과 '지속적인 만남'이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예수님을 통해서 부르심을 맞은 성도라는 정체성과 매주 예배라는 방식으로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이다. 이 공동체 안에,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라는 공동체 안에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고 대화하고 기도한다.
3. 교회는 타자를 위해서
교회는 타자를 위해서 현존할 때 교회가 된다_본회퍼
교회가 세계를 향해 새롭고 철저하게 방향을 전환하게끔 한다. 널리 알려진 본문인 요한복음 3장에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이 나오고 그 다음에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랑의 대상처럼 행동할 때, 교회는 자신의 목적을 노골적으로 배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가 '교회의 존재는 교회의 사명에 종속된다는 것'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실은 비단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만 했던 순교자들의 활동으로만 입증되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 특히 니케아 신경의 교리에 관한 정식에도 분명이 나타나 있다. 신경에 따르면 교회는 세가지의 전통적인 표지가 있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라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됨, 교회의 구별됨과 거룩함, 그리고 교회의 보편적, 초국가적인 공교회의 특징은 그리스도교 고백의 핵심에 속한다. 네번째 표지는 사도성이다. 네번째 표지를 되새기거나 실행하지 않는 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백성이 되기보다 기관 혹은 제도로 고착되는 교회는 유혹에 빠진 교회, 인간 조직이라면 으레 빠지기 쉬운 자신의 생존에 집착하려는 유혹에 빠진 교회이다.
4. 선교적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의 본질에 관해서 구심적인 교회보다 원심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 구심점을 교회에 두고 사람들을 모아서 예배와 문화를 만드는 방식은 선교적 교회라는 원심력 중심의 교회에 대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는다. 우리는 매번 전도와 선교를 이분화하고 전도는 교회로 인도하는 것, 선교는 해외에 나가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그 자체로 그냥 구심적인 교회이다. 사람들을 모아놓는 것 자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교회를 확장하고 건물을 더 크게 만들고 신자들을 더 늘리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정말 이게 맞는가? 21세기 선교학에서는 선교적 교회라는 논리가 주장된다. 오히려 교회는 사람들을 보내는 일을 한다. 구원을 알리고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보내신것처럼 우리도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야 한다. 그렇다면 국내에서는 전도, 해외에서는 선교가 아니라 모두 선교인 것이다. 바깥으로 우리는 나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 보내심을 받았다는 미시오데이와도 연결된다.
5. 고체 교회와 액체교회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알아보자. 고체교회는 말 그대로 중세시대의 성당처럼 한 자리에 사람들이 모이게 만드는 유동성이 없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시간을 정하고, 그들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문화를 순종하도록 가르친다. 반대로 액체교회는 정해진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유동하는 사람들, 시대적 상황에 맞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처럼 흘러가서 필요한 시기, 필요한 장소에서 교회가 만들어지고 그 시간이 지나면 또 필요한 곳에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을 누가 정하는가? 누가 교회를 움직이는가? 교회는 움직여야 하는가? 교회가 추구하는 진리의 방법이 액체교회의 방식인가? 이런 고민들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 익명이 그리스도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가리킨 현실을 향한 개방성이라는 점에서 동시대 교리를 넘어섰다. 이 공의회는 분명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의 보수 세력이 이후 수십년간 이 교리를 아무리 협소하게 적용하더라도 어찌훌 수 없을 정도로 공의회에 참석한 상상력 넘치는 이들은 과거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보인 배타성에 대안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서 칼라너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제 거의 남은 것도 없느 것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오랜 기간 앞에 세워둔 방어벽을 포기할 용기가 있다면, 공적 영역에서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세계라는 허울을 이제 벗어버리고자 한다면, 모든 이에게 세례를 주려, 모든 이를 교회에서 결혼시키려, 모든 이를 교적부에 등록하기 위해 열을 올리는 것, 참된 신앙과 내적 확신이 아니라 단순한 전통, 관습, 관계를 이어가려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멈춘다면, 이 모든 것을 내려 놓음으로써 그리스도교라는 의복을 애써 입음으로써 일어나는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난다면, 그리스도교가 모든 사람의 종교 본성을 그럴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인상, 특정 집단의 종교라는 인상을 지운다면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선교적 사명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사도적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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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 액체교회, 공동체로서의 교회, 타자를 위한 교회 등등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교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미래를 바꿀 수 있다. 현실을 바꾼다면 말이다. 그리스도교를 모두 포함하지는 못하지만 살아있는 교회는 현상에 반응을 하면서도 그 본질을 선교적으로 계속해서 내보내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거룩, 섬김과 타자를 위한 희생, 기쁨과 즐거움등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더욱더 서로를 돌아보아 더욱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 교회는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본질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