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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02. 2022

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 6장
_진리가 아니다

더클라스 존 홀_부정신학의 눈으로 바라본 그리스도교

더클라스 존 홀_부정신학의 눈으로 바라본 그리스도교

0. 들어가기


모든 종교는 진리를 스스로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나 천주교, 이슬람, 기독교는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보유해야만 자신들의 행동에 확신이 생긴다. 부정신학의 관점에서 우리는 '무엇이~아니다'라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럼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진리관'을 어떻게 다르게 가지고 있는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기존의 진리는 보유하고 소유하고 스스로가 맞다는 진리의 개념에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기독교의 진리주장에 대해서 오늘은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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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를 사로잡은 진리


진리에 다가갈 때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부정의 방식으로 다가가야할 이유가 있다. 진리란 살아 있고 이를 제압하거나 해부할 수 없으며 어떤 때는 묘사하는 것도 힘들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이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실재를 읽어내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라인홀트니버는 1939년 영국 기포드 강연에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서 진리를 가지고 못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인간의 정신은 자연과 역사의 흐름을 넘어설 정도로 자유롭다. 
이는 우리의 진리를 '진리'로 여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진리가 무엇이 아닌지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소유하는 진리가 아닌, 박제된 진리가 아닌 살아 움직이면서 시시각각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되는 진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은 매번, 매일 진리인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 그러나 그 진리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과 오독이다. 진리를 살아 있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어떤 관계 속에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2. 진리는 관계성이다. 


성경에 바탕을 둔 사고에서 진리가 관계적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부분을 관계성에서 찾고 있다. 사랑, 신앙, 희망, 긍휼 정의, 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관계적이다. 누구와 누구, 누구와 무엇의 관계가 시간 위에서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철학과 다르다. 히브리신앙과 그리스철학의 가장 큰 차이는 신과의 관계성의 유무이다. 그리스철학에서 신은 '이신론'과 같이 응시의 주체이지만 관조하기만 한다. 운동을 하게만 만들고 움직이지 않는다. 히브리서에서는 반대로 참여하고 반응하고, 말씀하시고, 함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신다. 하나님의 대한 관념이 진리의 시작이라면 하나님이 변화하시고 움직이시고 살아있다고 하면 그 진리는 계속해서 운동하고 변화한다. 그래서 진리는 한번에 규정할 수 없고, 정의내릴 수 없다. 다만 관계적으로 함께 걸어갈 수는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실체는 '타자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이 실체라면 다른 것들이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발전시키면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의 경험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범주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범주를 결정하는 인간의 분류법의 생각 자체를 누가 만들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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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리와 존재론


모든 철학적 개념의 근간이 되는 존재론ontology 혹은 존재에 관한 이론이 관계적이라는 것리다. 아테네 전통과 달리 예루살ㄹ메 전통은 존재하는 것을 '더불어 존재하는 것'being-with로, 혹은 '공동존재'Miitsein이해한다. 만물의 속성에 대한 이러한 이핸느 무수한 결을, 그리고 다양한 측면을 지닌 현실에 자연스럽게 부합한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존재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타자들과의 관계, 상호 연결된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이 쓰는 '통전적'holistic, '상황적'contextual이라는 표현에는 모두 이 성서에 바탕을 둔 친교의 존재론ontology of communion이라는 형이상학이 내포되어 있다.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서로 통합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핵심이다. 


https://brunch.co.kr/@minnation/2227


4. 진리는 동사다


인간을 호모사피엔스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명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사적 특성을 갖는다. 이기이한 말하는 동물은 무엇ㅇ인가를 지향하는 존재이며 무엇인가가 더불어서 존재한다. 인간이 혼자서 존재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은 '동사'로 살아가고 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존재가 움직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움직이는 존재를 보는 것 모두 진리를 제대로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다. 움직이는 존재가 움직이는 존재를 바라볼 때, 더군다나 그 존재와 함께 같은 지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경험하는 진리를 진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더홀은 이 부분에서 진리는 동사적으로 맞다는 것이다. 명사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동사로 움직이는 것이 포착될 때 진리라는 것이다. 



5. 진리는 신비로움이다


오해하지는 말자. 진리가 신비롭다는 것은 '수수께끼'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오묘하고 한번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것과 그가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이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다'라는 것을 먼저 고민해봐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떤 방식으로 나와 계시는지, 피조물과 계시는지에 대한 경험이 들어간다. 이것을 나의 언어로 표현한다고 하면 한번에 하나님은 이런분이시면서 이렇게 계신다라고 하는 것이 경험이 깊어질수록 더욱 어려워진다. 사실 이건 하나님과 연결된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다. 관계적으로 보자면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 사람에 대해서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표현자체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 다시 진리로 오면 그것은 신비로운 것이다. 



트로스troth에는 진실함과 신실함, 헌신이라는 뜻이 모두 담겨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트로스를 맹세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진리를 주고, 진실하고 신실하기고 맹세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린느 성서가 이야기하는 진리의 동사적이고 실천적인 특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약속하는 것은 단순히 진실만을 말하는 것, 서로에게 숨기는 비밀이 없고, 모든 것ㅇ르 나누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진실하고, 진실하게 살겠다는, 달리 말하면 상대방을 사랑하겠다는, 상대방을 위해 살겠다는, 자신을 상대방과 함께하는 존재로서 이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그리고 함께 고난을 감내하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친교의 존재론은 다른 인간뿐만 아니라 '말하는 인간'으로 대표되는 모든 피조물에게 대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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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리를 향한 지향


더불어 존재하는 것, 더불어 고통받는 것과 같이 독일어에서는 오히려 앵글로색슨 사유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어 체계가 있다. 영어권 사유 세계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생각을 더 선호한다. 성서가 이야기하는 진리를 좀 더 엄밀히 사유하기 위해, 독일어 표현으로 진리지향을 떠올릴 수 있다. C.F 폰 바이츠제커는 '진리'Wahrheit'와 '지향'orientierung을 합친 진리지향Wahrheitsorientierung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란 살아 있고 실존적인 실재이며, 존재가 가장 충만하고 궁극적으로 표현된 것,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서로 연결된다.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는 동시에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다
_마르틴 루터


인간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계시해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소유할 수 없는 진리개념을 가지게 되면서도 숨어있는 여백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진리를 하나로 정리하는 것보다는 '진리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 진리를 향해서 조금씩 접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다시 신비와도 연결된다. 우리의 일상은 항상 과잉이다. 진리의 과잉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징계는 그 중에 일부를 이미지로 언어로, 기억으로 치환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상징에서 보여지는 상상과 실재가 서로 연결된 통합적인 삶이다. 



7. 안다고 하는 것이 더 모르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록 확실히 더 모른다는 것이다. 안다고 하는 것과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혹은 이해해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리가 아니다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소유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안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하면 '야댜'이다. 이 단어는 동사이다. 경험해보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경험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대한 지향'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이해하고 있고, 앞으로 더 이해할 것이라는 것을 기대함으로 세상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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