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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술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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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11. 2022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형도_기억할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습관처럼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구름하나 없는 하늘에 거리는 가로등으로 빛났다


움직이는 것들을 반짝이고 있었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버스정류장이었는데

어떤 소년과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 좁고 누추한 정류장이 환하게 밝아지고

그들의 웃음으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지난날이 생각나서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짧은 순간의 지나침으로도 웃음이 번져갔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참을 웃었고 우연히 그 소년을 생각하게 되었다


햇빛이 없이도 가로수만으로 밟게 빛났던

고작 그 정도의 지나침으로도


40년을 지나온 것 같이

마음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민네이션_고작 그정도의 지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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