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어도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며 놀라는 사람도 있다. 성경의 세계는 결코 여행사의 안내책장에 나오는 그런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 속에서 일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난과 불의와 악이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우리의 본성과 역사 속에서 끈기 있고 깊이 있게 일하시지만, 종종 은밀하게 일하신다. 이 세계는 깔끔하고 단정한 곳이 못 되며, 우리가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르네상스 시대화가 루카 시뇨렐리가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대성당에 그린 벽화 ‘세상의 종말’(1504년) 일부.
어디에나 신비가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세계는, 우리의 직업을 계획하여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세계,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예측 가능한 세계가 아니다. 모든 일이 우리의 미숙한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꿈의 세계도 아니다. 고통과 가난과 학대가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분개하여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하고 부르짖는다.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우리의 꿈의 세계가 성경이 제시하는 실제 세계로 바뀌기까지, 길고 긴 세월이 걸린다. 그 실제 세계는 은혜와 자비, 희생과 사랑, 자유와 기쁨의 세계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세계다.
메시지 성경_신약 머릿말
나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있다. 어쩌면 청소년기의 순수한 질문들이 가득했던 때보다 지금은 더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살다보니 악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있고, 불평등한 구조가 지속되고, 착한 사람들이 더 아픈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는 것 같으시니깐. 그런데도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저 사람들은 속편하게 살아도 문제 없는 삶이니깐'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어느순간 누구나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죽음과 삶이 덫없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다시 성경을 보고, 하나님께 물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렸을적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닌 사람들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벗어나지 못한다라는 강박보다는 나는 언제라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 있지만, 언제라도 하나님이 찾아오실 것이라는 확신은 있다.
그런데 도피하는 것은 싫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왜 이렇게 현실이 꼬이는지 답은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으니 일단은 그냥 살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이렇게 답답하고 어려우면 하나님은 더 그러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다시 현실의 문제와 시름하고 앉아 있다. 아직은 미시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 있고 실행하고 있지만, 또 작은 것들 안에 큰 것들이 담겨 있으니깐. 계속 살다보면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면 심판보다는 '기다림'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다가 불의의 사고로, 악한 사람들의 총질로 세상을 마감하는 이들을 보면서 또 고민이 든다.
그럼 죽은 다음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모두 좋은 곳으로 가나요?
내세를 생각하는 종교는 항상 죽은 이후가 더 좋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물론 한국의 토착신앙을 그것을 판단하는 존재를 전제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더 종교로 도피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같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기독교는 오히려 하나님께 도피할라치면 하나님이 더 현실에 나가계셔서 결국 나도 현장에 서 있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만, 골방 안에서만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수고는 대부분 지루함이나 '기도는 노동'이라는 말로 치부되기 쉽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물어보면 너무나 빠르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나가온다. 살리고,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회복하고, 변화시키고, 일으키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사람은 '질문'이 많을 지언정 하나님의 사랑을 떠날 수는 없다. 떠나더라도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신다는 것을 안다.
여전히 나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때문에 골치아프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해결해볼려고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너무 많다. 왜 그러셨는지,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지 또 물어본다. 가끔씩 믿음의 사람들 뒷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처럼, 어쩌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보이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드러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우리 어머니의 뒷모습에서도 하나님이 보이고,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의 등짝에 피어 있는 땀방울에서도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노동하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신비로 가득한 세상에서 신비로움을 볼 수 있고 즐길수 있고 또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매일 좋은 것만 찾아다닐 수 없고, 손에 흙 안무칠 수 없고, 남들 다 겪는 고통도 다 겪고 있으니. 그만큼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현실을 도피하기는 싫어서 현실의 중앙으로 걸어가려고 계속 노력해야겠다.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하지만 하나님께 더 많이 물어보고, 더 고민하고. 고민 좀 그만하라는 사람들의 말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고민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인가? 지금이? 불평등이 세계최고, 역대최고인 한국사회에서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잘 살고 있어요'라고 하면서 몇백만원짜리 가방을 자랑하는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고민이 없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