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변화를 읽는 관점
부조리는 계속 양산된다. 말그래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것과 함께 새로운 빈곤도 등장한다. 새로운 가난은 또 새로운 부조리를 양산한다. 인간은 그 사이에 서 있다. 즐거움과 슬픔 사이에, 부조리와 희망 사이에, 새로움과 구차한 것 사이에. 그래서 인간의 어떤 활동으로 부조리를 양산할 수도 있고, 부조리를 해결할 수도 있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일은 사람들이 바꾸어 가는 것에 달려 있을 것이다.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바뀔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만 알아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판단은 할수 있으리라. 사회학은 어쩌면 이러한 인간들이 걸어가는 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관점일 것이다. 그 와중에 근대의 특징을 정확히 예측하며 미래의 길을 제시했던 혜안을 지그문트 바우만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모던니티는 모던의 사회가 끝나고 나서야 나올 수 있는 개념이다.
모더니티는 그래서 현재도 계속해서 modernize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우만은 이것을 액체 근대, 즉 계속해서 근대성이 생산되고 있는 시기라고 말한다.
사실은 post-moderninsm은 ism이지 post-modernity처럼 완전히 끝난 개념이 아닌 것이다.
합리화, 자본주의, 산업사회 등은 modenity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은 세계화의 측면에서 아직도 진행중인 곳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globality의 개념이 나오기 위해서는 세계화가 끝나야 한다. 그럼 세계화의 특징은 그저 연결성 정도로 마무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아직도 세계화는 globalized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창조가 창조적 파괴의 문제라는 것은 이를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곤 모든이들에게 명백한 사실이다.
모든 창조는 오염을 일으키며 가끔은 유독한 찌꺼기를 남긴다.
그것은 합리화된 대상에서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잉여'부분을 갈라서 후자를 폐기하는 합리화과정의 폐기물이다.
리차드 세넷은 최근 경영전략의 최고 지침으로 '체제의 단절적 재창조'라고 했다.
파괴적인 실체를 구조조정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 것이다.
구조조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는 인원감축이다.
마이클해머와 제임스 챔피를 인용해서 구조조정이 더 적은 수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걸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인원감축은 대량잉여를 낳게 된다.
근대화된 그리고 여전히 근대화하고 있는 지역에서 생산된 인간쓰레기의 폐기처분은 식민화와 제국주의의 정복의 가장 깊은 의미였다.
식민주의적인 잉여의 수출이 가능했던 것은 잉여를 수출하는 곳과 잉여를 수용하도록 강요당하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권력 격차가 발생했던 탓이었다.
불평등의 힘을 빌어 세계에서 근대화된 지역은 자신의 지역에서 생산된 인구과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적 해결책을 추구할 수 있었다.
지구가 만원이라는 이제 잉여를 수출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곳이 잉여로 가득차 있다.
현상의 지구성, 윤리의 지역성
장소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한곳의 행복과 다른 곳의 불행 사이에 연관성은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으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다.
상호의존은 지구적일 수 있으나 윤리적인 의무는 변함없이 지역적이다.
소비자와 생산자는 국가간의 차이로 나누어졌다.
근대 영역에서 정기적이고 시의적절하게 잉여쓰레기를 배출하고 청소했던 배출구가 봉쇄된 것이다.
그 결과 잉여인 쓰레기로 취급받는 인생과 정상인들은 섞여서 존재하게 되었다.
잉여, 쓰레기 된다는 것은 비식별역 안에 들어오면서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잉여와 정상의 비식별역이 확대되자 집단 보험을 폐기하는 결정을 국가들이 하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다시금 잉여와 정상을 격리시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감옥이 안방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러한 국가에서 사람들은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게 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불확실성과 사회적 보호가 아니라 개인의 취약성과 개인의 안전이라는 기초에 근거하고 있다.
새로운 지구적 개칙시대 환경에 고유하게 나타나는 인간 쓰레기를 지칭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용어이다.
부수적 피해는 사실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다. 영어로 그 의미는 원인이 되는 문제가 결과가 되는 문제를 만들었을 때, 원인 문제만큼이나 결과문제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개척시대를 일군 동력은 맹렬하고도 제어되지 않는 세계화였다.
세계화는 지금껏 모든 반발과 규제에 효과적으로 맞서고 있따.
다양한 근대적 쓰레기 생산과 관련된 두려움은 쓰레기와 관련된 훨씬 전통적인 우려와 근심을 압도한다.
클라우스 오페, 패트릭 커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단적인 잡라적 소박함이 집단적 궁핍화에 대한 유일한 긍정적 대인이 되고 있다'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복지사회가 오지도 않았다.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복지국가 논의가 활성화되고 진전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터미네이터와 같이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로 해결자를 보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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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6 이후 파리는 불량지구에서 반체제적인 빈곤층과 하층민들을 청소하여 통째로 바다 건너 알제리로 보냈다.
파리 코뮌 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목적지가 문제지점에서 더 먼 뉴칼레도니아였다.
인구 가운데 일자리가 없는 잉여노동력이란 상처부위를 도려내어 대량 이주시킨다.
이것으로 지역에서 만들어진 사회문제를 머나먼 땅으로 수출하는 또다른 이유는 도시 내부에 있는 잉여인구가 스스로 발화하기 쉬운 비판적 다수로 변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우발적이지만 반복적으로 폭발되는 도시의 불안은 권력을 자극하여 움직이게끔 만들었다.
산업예비군과 그것을 언제든 현역으로 투입시킬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비용은 오늘날 지구적이다.
그러나 모든 복지수급은 국가종속적, 국가권력 자체가 그렇듯이 지역적이다.
국가의 팔은 너무 짧아서 진실로 닿아야 할 곳에 닿지 못한다.
기업인들은 다시 필요해질 일이 없을 것 같은 노동의 재상품화에 돈을 댈 이점을 찾지 못한다.
민주국가에서 다수 유권자들이 사회불평등의 증가에 거리낌 없이 투표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존 갤브레이스는 묻는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건 투표권이 진실로 민주적이어서도 아니고, 투표권이 유산계급에서 모든 성인에게로 확대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결국 가난하고 무위도식하는 이들, 무난하게 생계를 이어갈 수 없고 근근하게 겨우 먹고 사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정치적으로도 눈에 띄지 않는 소수파였다.
이들은 투표소에 가서 투표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익과 바람을 무시하는 건 늘 비교적 쉬운 일이었고, 그렇게 하더라도 결코 정치인의 당선 가능성이 위협하지 않았다.
부의 재분배, 불평등의 철폐, 더 나아가 개인 복지의 집합적 보장을 지지했던 그 다수는 분명히 다른 계층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중위투표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빈곤의 극단에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엇다.
국가가 제공하는 안전망에 투표했던 이들이 반드시 그 안전망을 곧 바로 이용할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 보기에 이타적으로 행동했다.
적극적인 우대정책 덕분에, 자신감 넘치는 새 흑인 중류 계급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리한 기회를 부여받아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이 해냈다면 다른 모든 이들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기 노력때문에 성공했다는 경험론 때문이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에게는 더 이상 국가가 제공하는 사다리가 필요치 않으며 그들은 그 사다리를 쓰리게 하차장으로 보내고 싶어한다.
높은 자리에 먼저 오른 이들이 가장 ㅁ너저 그 사다리가 쓸모 없다고 선언하며, 그것이 사용자들에게 불공정하고 나쁜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불평했다.
복지국가는 질 높은 교육을 받고, 건강하며, 스스로를 믿고, 독립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한세대를 길러냈다.
그들은 막 손에 넣은 독립을 지키려 하며, 성공한 이들이 실패일로를 걷는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이 세대에겐 집합적 보험과 사회적 임금의 부정적 영향에 관한 주장들이 매우 인상적으로 들린다.
고용된 상태에서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고, 버려질 수 있는 '임시단순노동자들'의 몸뚱이는 일터에 있지만 그 영혼은 몸뚱이 안에 없다.
일터는여전히 생계의 원천이지만 삶의 의미는 아니다.
유연한 공장, 사무실, 작업장, 가게에서, 노동윤리의 가르침은 공허해 보인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이들과 공유해서 공동의 행동을 이끌어내려는 마음은 생기기 어렵다.
그러기에 모든 상황이 불리해 보인다.
얻을 수 있는 직업들은 불안정하고 언제든 사라질 수 있으며 지속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노동자의 연대와 집단적 저항에 공을 들이는 것은 아무리 오랜시간에 걸쳐서 위험을 감수하려 노력한다 해도, 얻는 것은 없고 손실 비용만 계산하기 어려울만큼 클 것이다.
잉여는 비정상적인 삶이고 전망없는 삶이다.
실업에서 잉여로 옮겨가면서 사회적 비용으로서 잉여가 고려되기 시작한다.
사회적 배제의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잉여가 등장하게 된다.
결국은 실업 그 자체는 사회적 두려움으로 자리를 잡는다.
노동윤리는 탈산업사회인 소비자 사회에서는 새로운 규율과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
잉여가 된다는 것은 소비자 사회에서 소비자로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드러낸다.
원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과 원조를 받을 자격이 없는 빈민이 구별되고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비난이 집중되며, 사회가 그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합리화된다.
따라서 빈곤은 개인의 결함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불행으로 받아들여지고, 사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무관심해진다.
더 이상 가난을 줄이는 방편은 공급하지 않지만, 노동윤리는 사회가 빈곤층의 영속을 받아들이게 도울 수 있고, 빈곤층이 존재하더라도 입 다물고 빈곤층과 함께 살수록 도울 수 있다.
노동계급은 사회생활에서 부여된 역할이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 계급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킨다.
그들은 그 사회 전체에 중요하게 이바지하며 그에 따라 보상받기를 기다린다.
하층계급이란 말은 사회적 유동성의 이미지에 속한다.
그 사회에서 사람들은 늘 이동하고 그 때 그 때의 위치는 오로지 일시적이며, 본질적으로 변화무쌍하다.
하층계급은 사다리 아래에 위치한 또는 버려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계급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킨다.
그 사다리는 그들이 여전히 오를 수 있고, 그래서 현재의 열등성에서 벗어나는 방편일 수 있다.
최하층계급이란 용어는 포괄적이고 종합적이지 않은 사회의 이미지다.
이들은계급을 넘어서 계급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한 계급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킨다.
이들에게는 재진입의 기회도 욕구도 없다.
역할이 없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삶에 아무런 이바지도 하지 못하며, 본질적으로 구제될 길이 없다.
허버트 겐스에 따르면 이들은 학교를 그만둔이들, 직업이 없는 빈곤층, 절음 여성들의 경우에는 결혼제도의 바깥에서 아이를 낳아 복지수급에 기대어 사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홈리스, 가난뱅이, 거지, 알코올 및 약물중독자, 거리의 범죄자들이 들어간다.
이용어는 유연해져서 공동주택에 사는 빈민들, 불법 이민자들, 비행청소년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 용어의 유연성은 빈곤층의 실제 행동과 상관없이 낙인을 찍는데 이용되는 꼬리표 같은 용어가 되기 쉽다.
이들은 매우 이질적이고 잡다한 집합이다.
그들 모두를 한 범주에 몰아넣는 것은 분류상의 결정이지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그들을 하나의 실체로 응축시키고, 그들이 사회에 무시무시한 위험요소라고 비난하는 것은 가치선택이자 가치판단이지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최하층계급'이란 말은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이었다.
1963년 그는 나날이 수많은 이들을 영구히 실직자로 만드는 탈산업화의 위험을 나타내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다.
실직의 이유는 실업자가된 이들의 무능력이나 도덕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일자리를 원하는 이들에게 돌아갈 일자리의 부족 탓이었다.
뮈르달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최하층계급이 배제의 희생양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최하층계급'이란 개념이 대중의 관심이 된 건 1977년 8월 29일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이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통제하기 어렵고, 사회적으로 이질적이며 해로운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 그들은 가까이 할 수 없는 이들, 미국의 최하층계급이다.'라고 의미부여했다.
구제하기 힘들 사람들이면서 가까이 할 수 없고,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서 최하층계급이 되었으며 이러한 결과 최하층계급의 빈곤을 합리화시킨다.
소비자 사회의 원칙은 자유롭게 선택하려면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가 능력의 증거이자 능력 부족의 증거다.
최하층계급은 개인의 잘못된 선택의 총생산물이다.
그것은 구성원들의 선택의 무능력의 증거이다.
이것은 결국에는 도덕적으로 결함있는 사람들이라는 범주로 몰아넣게 되고,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가난 자체가 범죄로 등치되는 결과가 나온다.
최하층계급은 결국 빈곤을 양산시키고 범죄시된다는 것이다.
회복, 혹은 정상성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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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은 어떻게 오게 되었을까?
가치관의 문제에서 다시 보자면, 우리가 만들어낸 가치의 편중성이 법에 의해서 결정되면서 불평등한 문화를 불평등한 구조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가?
왜 세계는 이렇게 불평등할까? 무엇이 문제인가를 안다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도 알 게되지 않을까?
우리의 인식 안에 어떤 것이 비판적으로 다가올 때, 그것은 잘못된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현실을 잘못규정하고 있는 개념일 경우가 크다.
영원히 필리핀 처럼, 네팔처럼되는 것은 아닐까? 불가촉천민이라는 개념이 등장할 것도 같은 분위기이다.
그럼 이런 분위기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가? 과연 바꿀수 있는가?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논리와 함께 자본주의 발달을 연결해 보면, 한국적 상황에서 어떻게 해결을 낼 수 있을까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초기에 셋팅을 잘 할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