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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17. 2022

능력없으면 비굴해진다고?

능력주의에 영혼이 상한 사람들

살다보면 누군가가 어떤 단어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소름돋는 때가 온다. 그 사람은 그냥 자신의 일상에서 하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가 있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때가 되면 항상 반추하면서 내가 저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사람은 자기인식이 항상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누구나 갑질이나 지배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깔고 가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자랑하는 것에 묶인다. 자신이 자랑하는 것은 사실 자신을 과잉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자랑하는 것들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의 본모습을 못 보지만 그것을 알면서 그러는 사람이 있고 모르면서 그러는 사람이 있다. 알면서 일부러 과잉대표하게 보여지는 것을 설계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능력없는 사람이 착한게 구는 건 겸손한게 아니라
비굴한거에요!


우연히 모임을 하다가 멀리서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선뜻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하던 일을 잠시 멈추게 되었다.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깐 자신들이 속한 그룹에서는 실력이 많고 능력자가 많은데 태도가 너무 착해서 사람들이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겸손한척 하지 말고 자신감있게 하라는 이야기였다. 곰곰히 생각을 해 보았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어떤 것이 이상한거지? 갑짜기 논리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능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능력'과 '개인주의'는 하나의 단어로 느껴진다. 누군가 능력을 가졌다면 그건 그 사람의 것이고, 그 사람이 오롯이 노력을 통해서 성취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는 하는 사람들은 그 만큼 자존감을 가지게 되고, 자신보다 덜 노력한 사람들을 열등하게 보는게 자연스러워진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은 실력을 키워서 자신을 비굴하게 만든 일진들을 일망타진한다


능력없는 사람은 말도 하지 말라는 거다. 말할 권리를 가질려면 능력을 키우고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도 없으면서 착한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그런 사람들이 그 사람 눈에는 비굴하게 보이는 것이다. 말은 언제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자신이 한 말은 자신의 영혼에서 나오는 말이다. 영혼이 병든 사람들의 언어는 항상 비교를 통한 열장감 아니면 우월감이다. 무엇인가에 반대급부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언어는 이미 그 사람 영혼에서부터 죽어서 입밖으로 나온다. 그러니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그 말은 다시 듣는 사람의 영혼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을 죽인다. 


비굴해지는 거라고 한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비굴해본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비굴과 겸손을 둘로 나누고 능력을 가진 사람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은 선하고 올바른 것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은 비굴하게 착한척하는 악인정도로 취급하는 것이다. 비굴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사람에게 이미 그 단어가 경험되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이 비굴에 처해봤고, 지금은 아니기 때문에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기준에서다. 착한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겸손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반드시 삶에 목적이 필요한데 능력없는 이들은 목적이 없기 때문에 비굴하고, 혹은 목적이 있어서 실력이 없기 때문에 비굴한게 되는 것이다. 어릴적부터 수 없이 들어온 이야기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 비굴함을 벗어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뭉크의 작품에서 우울과 고독을 본다


영혼이 병들고 보는 시력이 떨어지면 사람을 하나의 기능으로 보거나, 혹은 목적에 따라 이용대상으로 본다. 그렇게 보는 사람은 자신이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똑같은 잣대로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능력주의 시대에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인간취급도 못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이 능력주의 시대에는 비굴함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그 말을 했던 사람은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아주 당당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무엇이 저 사람을 그렇게 당당하게 만들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명문대를 나왔다는 스펙, 좀 산다는 가정형편, 어디서도 명함내밀 수 있는 아버지의 직업, 탄탄한 영어실력? 그런것들이 기준이 되어서 그것을 못하는 사람들은 열등하게 보는 그 사람의 뒷모습에서 어지러워 진다. 


사실은 내 이야기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능력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비교당하는게 싫어서 공부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편해지기 위해서 열심히 뛰었다. 착한척하는 것이 별로 인기없는 시대에 나는 조금은 냉소적으로 바뀌면서도 똑똑한 척은 다 했던 것도 같다. 아주 어린시절이지만 그 때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의는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가졌나가 되었다. 그러니 나보다 덜 가진 사람은 불쌍한 사람,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은 우러러 봐야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건 어린시절이야기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른이 되어서 온전한 관점으로 사람을 깊이있게 바라보고 별다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 같지는 않다. 매번 자신을 돌아보아 이게 맞는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새벽 2시에 매번 찾아와야만 겨우 바뀔 수 있는 것도 같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서 바로 말해줄까 하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그렇게 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에이 착한 거랑 능력없는 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죠?'라는 정도로 대응하지 않았을까?한다. 외로운 사람의 뒷모습은 항상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모두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의 비교의식으로 부터 나온 몇 마디의 단어가 허공을 가득 메우고 숨쉬기 힘들어질 때 나는 그 자리를 나왔지만 아마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고민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 같다. 그래도 착한 그 분들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뾰족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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