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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20. 2022

잘못된 구조까지 바꿔야 하나?

제임스스미스_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_2장,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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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정의하는데 시간을 많이 쏟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이 시대의 증상이다. 원인은 근본적인 인간에 대한 정의가 흔들리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은 누군가가 '인간은 이런 존재다'라고 외친다고 바꾸지 않는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로 믿고 있으면서 자신의 삶이 그것과 맞다는 행위를 실천할 때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새로운 인간관이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스스로 해석했을 때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의 결과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이나 트랜스휴머니즘과 같은 논의들이 회자가 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임스스미스의 논리를 따라가려면 미국의 실용주의와 프랑스의 현상학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해가 조금은 어렵고 또 자칫하면 그 의도를 완전히 오해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다양한 출처들이 철학과 신학을 넘나들기 때문에 만만치 않다. 특히 이번 책에서는 욕망과 실천을 기반으로 인간의 존재론으로 접근한다. 사랑에는 실천이 필요하며 예배를 통해 실현되는 인간관을 살펴보도록 하자. 


https://brunch.co.kr/@minnation/3214


2장 사랑에는 실천이  필요하다.


1장의 핵심 주장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생각하는 사물이나 믿는 동물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에 대한 왕국의 전망에 대한 열정적인 욕망을 하는 행위자다. 이것이 인감됨의 구조적 특징이다. 우리는 사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왕국을 욕망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다. 대부분의 경우 적응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이 구조적 지향은 다른 방향을 취하거나 다른 목적 혹은 좋은 삶에 대한 다른 전망을 지향할 수도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663


결국은 칼빈까지 올라간다



1. 두꺼운 실천과 얇은 실천 : 문화를 형성하는 의례의 힘


우리의 사랑이나 욕망이 특정한 방향을 향해 겨누어지는 방식은 우리의 사랑을 형성하고 빚어내며 방향 짓는 ‘실천’을 통해서다.

따라서 지금까지 주장했듯이 습관(선인지적 성향)은 실천, 즉 우리의 성품 안에 특정한 행위를 계속해서 새겨 넣어 그것이 우리에게 제 2의 본성이 되게하는 일상적 반복과 의례에 의해 형성된다.(115f)

실천은 특정한 상황과 환경에서 우리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도록 훈련시키는 의례이며 일상적인 반복이다.

이를 닦거나 매일 아침 같은 시리얼을 먹는 습관과 같이 얇은 습관들이 있다. 얇은 습관들은 대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이런 실천과 습관들은 우리의 사랑이나 근원적 욕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두꺼운 실천과 얇은 실천

반대로 두꺼운 습관, 즉 그 행동 안에 의미가 가득담겨 있는 반복된 실천들은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주일 예배 참석, 매일 드리는 기도 등) -> 우리의 일상 안에 두꺼운 습관들을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어떤 습관이나 실천도 우리가 구성한 욕망의 틀 안에서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습관이 두꺼운 습관인 것은 아니지만, 가장 얇은 습관과 실천조차 궁극적인 무언가를 지향하는 욕망과 궁극적으로 연결된다. 

특정한 습관과 실천은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며, 다른 습관과 실천은 다른 목적을 지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실천이든 이것이 지향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염두에 둘 떄, 우리가 인식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첫째, 얇은 실천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두꺼운 실천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중립적 실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실천이 가진 형성하는 기능(무의식 중에 형성되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실천이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동화되는 모든 방식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실천에 대한 이해는 사실 후설의 현상학부터 시작해야 한다



2. 형성, 잘못된 형성, 대항적 형성 : 세속적 예전과 기독교 예전


- 의례 ritual : 일상적 반복을 지칭하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의례는 실천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의례가 어떤 목적을 지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실천 practice : 의례의 한 종류, 의미가 더 있는 실천을 스미스는 두꺼운 실천이라고 말한다. 
- 예전 liturgy : 모든 의레가 예전인 것은 아니다. 모든 실천이 예전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예전은 실천의 한 종류다.

더 구체적으로 예전은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의례이다. 예전은 정체성을 형성하고,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전망을 심어 주며, 그럼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다른 의례적 형성보다 우선하는 의례다. 가장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의례적 실천의 형식이자, 궁극적 욕망을 교육하는 의례적 실천!

문화적 실천과 의례들이 우리의 욕망을 형성하고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규정하는한, 그것들은 다름 아닌 예전의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기독교 예배은 세속적 예전이 잘못 형성한 것에 대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전적이고 형성적이며 교육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예배의 실천은 본래적인, 창조될 때 부여된 하나님에 대한 욕망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를 만들어 간다




3장 위험한 시대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예배의 렌즈를 통해 문화 '읽기')


문제제기

세속적 예전 안에는 인간 번영에 대한 어떤 전망이 내포되어 있는가 (131p)

세 가지 세속적 예전 (1) 쇼핑몰 (2) 국가 (3) 대학


"나는 당신이 지금까지 기독교의 제자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문화적 제도 다수가 종교적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더 분명히 깨닫기 원한다. 여기서 종교적이라는 말은 이것들이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고, 우리의 열정을 얻기 위해 경쟁하며,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전망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제도라는 뜻이다. (133p)"


쇼핑몰 (소비주의)

쇼핑몰의 예전에는 어떠한 전망이 내재되어 있는가? 쇼핑몰은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기 원하는가?

쇼핑몰 예전, 소비자본주의와 연결된 실천과 의례가 극대화된 공간

쇼핑몰이 제시하는 왕국의 특징

1) '완벽'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결핍'되어 있음을 암시

2) 왜곡된 사회성 (공동체성이 아닌 경쟁에 기반한 상호주관성)

3) 소비를 통한 구원 (결핍의 충족)

4) 희생의 은폐 (지속 불가능한 세계)


"나이키와 스타벅스 같은 슈퍼 브랜드는 에로스적이고 상품 중심적인 신비주의를 통해 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연결시키고, 자신들의 상품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며 원초적인 욕구에 대한 해답이라는 의식을 전해 줌으로써 소비자들과의 "영적 유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국가 (국가에 충성)

국가의 예전, 국가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궁극적 희생'을 감수하는 충성스러운 시민 양성

국가의 예전은 엔터테인과 연계, 마이클 헨비 "군사-연예 복합체"

1) 국가주의와 연관된 스포츠 예전 (경쟁과 폭력, 희생에 기반한 통일성)

2) 반복적인 충성 예전 (조회)

3) 영화 등 연예 사업 (상상력의 자극을 통한 국가적 이상의 공고화)


국가주의는 기독교와 너무나 친밀하다


대학 (도구적 인간)

"대학은 지식과 연구를 뒷받침하는 인식론적 조건 때문만이 아니라 욕망을 교육하는 의례와 예전에 의해 움직이는 형성적이며 예전적인 기관이기 때문에 대단히 종교적인 기관이다."

대학이 추구하는 욕망, 도구적 인간의 양성 (쾌락에 대한 이기적 추구, 집단적 구별짓기)

"배움에 대한 도구적 관계를 중시한느 전망"

"계급 구별짓기와 계급 감수성은 학생들이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틀"

"안식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고 열광적이고 미친 듯하 속도, 소모와 고갈의 리듬 양성"


우상숭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장 칼뱅 (1)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신성'에 대한 '지각'을 드러낸다.

- 장 칼뱅 (2) 우상숭배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며 예전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

- "세속적 예전은 (중략) 우리가 하나님을 욕망한다는 간접적인 표지"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증언에서는, 잘못 정향된 욕망을 지닌 이런 세속적 예전들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185p)"


기독교의 역할?

(1984에서 그리는 저항) 형성적인 것에 대한 실패 (1) 인식 실패 (2) 대안 전략의 실패 (합리주의로 대응)

"교회는 소비 예전에 바르게 대항하기보다 그것을 모방해 단순히 기독교 상품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는 세상의 상품을 '예수화'한 것에 불과하다. (중략) 나는 소비라는 실천을 예전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예배의 형태가 성부를 사랑하고 그분의 나라를 욕망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는 욕망의 교육이 되도록 의도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196p)"

기독교의 실천이 어떻게 대항적 형성으로서 기능해야 하는가 (5장의 물음)


헤르만 도예베르트의 논리는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다'라는 것을 우선한다.


민네이션, 생각

기독교 세계관은 구조와 방향을 나누고 구조는 선하지만 방향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든 구조는 건드리지 않고 방향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오류가 많다. 구조 자체가 악한 구조로 만들어졌다면 어떨까? 그 구조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 일터신학이나 창조타락구속의 관점에서도 칼빈이 말한 선한 직업관에 대한 비판은 힘들다. 그러니 계속해서 누구는 만들고 누구는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제임스의 문제의식은 이런 부분에서 충분히 이해가 간다. 우리의 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이미 형성된 의식에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는 않는 것이다. 

쇼핑몰, 국가, 엔터테인먼트는 우리의 의례를 만드는 핵심이다. 이러한 의례는 실천을 동반하고 다시 예배라는 의전으로 연결된다. 

기독교는 너무 순진하다라는 것이 아니라 '순진하고 싶어한다'라고 써야 한다. 이미 세속에서 살면서도 마치 그것들을 초월한 것처럼 말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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