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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20. 2022

성례전적 상상력_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에 대한 저항

제임스스미스_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_4장 예배에서 세계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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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는 인간은 본질적이고 근워적으로 사랑하는 바에 의해서, 욕망에 의해서 규정되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정서적인 존재'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실천하면서 산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인간 번영에 대한 궁극적 전망을 가리킨다는 것과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궁극적인 인간의 관심은 결국 예전에 의해서 하나님으로 모이게 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흔한 예전은 사실 세속적 예전(쇼핑몰 입장에서부터 퇴장까지의 예전)과 다르지 않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이미 예전은 실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예전의 흐름을 이해하고 우리의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한다면 기독교교육의 관점에서 예배와 세계관 이전에 이미 형성되고 있는 실천의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3204


2부에서는 기존의 '세계관-예배'의 관계에서 '예배-세계관'으로서의 전회를 시도한다. 예배와 기독교 세계관 사이의 관계는 사실 '성례전적 성격'sacramentality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예배의 근본적인 측면을 검토할 것이다. 기독교의 예배와 세계관에서 '사회적 상상력'으로의 이동은 하나님나라의 전망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있게 만들어 준다. 예배에서 세계관으로의 이동은 세계관에서 예배로의 이동이라는 방향과 반대로 진행된다. 예배의 형식과 흐름이 결국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게 되고 이러한 결론이 결국 하나님나라와 연결된다.


제다이들은 제국과 맞서는 실천으로 비로소 제다이가 된다



1. 세계관에 예배의 우선성


인간은 일차적으로 생각하는 사물, 심지어는 믿는 사물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랑의 의해 규정되는 상상하고 욕망하는 동물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습관이나 성향을 우리 안에 아로새김으 우리의 행동을 변화키는 방식을 통해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이끄 물질적 실천, 즉 예전에 의해 영향을 받고 형성되는, 몸을 지닌 정서적 피조물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천 안에는 우리의 욕망과 행동을 방향 짓고 인도하며 형성하는 사회적 상상이 내제되어 있다.

사회적 상상은 인지나 반성보다 선행하는 세계이해이다. 생각하기 믿기에 앞서 하나의 질서로서 가능하다.


세계관과 예배에 관한 질문

무엇이 좋은 삶으로 그려지는가?

이런 실천 안에서 세계대 해나 어떤 이해가 담겨 있는가?

기독교 예배 안에는 왕국에 대한 어떤 전망이 내재되어 있는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 전망은 세속적 예전에서 지향하는 왕국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예배는 독교 신앙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실천과 신념의 전회

일반적으로 우리는 교리와 신념이 우선하고 이것이 예배의 실천을 통해 표현되거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세계관이 먼저 자리잡은 다음 그 인식의 틀에 부합하는 실천을 고안해 낸다고 생각한다.

실천과 지식, 세계관과 예배의 관계를 이렇게 하향적, 관계에서도 우선적으로 이래하는 그림은 성경과 예배의 관계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모형에 따르면 우리는 교리와 신념의 원천인 성경으로부터 시작하고, 그런 다음 이를 '적용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일치하고 이를 표현하는 예배의 실천을 만들어 낸다.


실천과 신념의 전회를 위한 문제제기

1. 이념과 교리가 먼저이고 예배가 그 다음이라는 그림은 역사적 기록과 들어맞지 않는다.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교리를 정돈하거나 기독교 세계관 요소를 명확히 진술하기 오래전부터 에배해왔다.

2. 교리나 세계관이 예배 안에서 '표현된다'고 보는 일반적인 설명은 욕망하고 사랑하는 그래서 예배하는 인간이라는 인간관과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은 욕망과 실천으로서 에배를 우선시하는 상향식의 실천 우선적 모델이 더 적합하다. 온몸으로 드리는 기독교 예배는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만지고 변화시킨다.



2. 성례전적 상상력 :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에 대한 저항


기독교 예배 관해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점은, 그것이 대단히 지성적이고 물질적이며 현세적이라는 사실이다.

에배와 자연의 모든 것의 이면과 그 아래, 그리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 이 모든 지상적 요소 안에 거하시며, 우리는 물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실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은 우리가 몸을 입은 존재임을 받아들이신다는, 곧 몸을 입은 존재로서의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핵심적 확신과 암시적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의 중요한 가르침인 피조물의 선을 개념적으로 주장하기 전에 이러한 이해는 교회의 예배 안에서 재현되고 수행된다.

하나님이 현세적이며 지상적인 것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은 피조물과 물질성이 우리가 피해야할 유감스럽고 한탄스러운 조건이 아니라 선물로 받아 누려야할 선이라고 인저아시는 하나님의 실행이다.

기독교 예배에는 신체성에 대한 실천적인 인정이 내제되어 있고, 이는 궁극으로 성육신을 통해 몸으로 실천을 인정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를 재확인하셨음을 환기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피조물의 선함의 완성인 몸의 부활을 기대한다.


영지주의 이거나 이론원

몸에 대 이원론적이나 영지주의적인 관념을 견지하는 모든 기독교 예배는 사실상 하나의 실천모순이다.

왜냐하면 예전적이거나 성례전적으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모든 기독교 예배는 불가피하게 물질적이며 육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몸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몸을 제거하려는 우리의 플라톤적 욕망을 계속해서 방해하며, 계해서 우리의 이원론적 담화 속에 스며들어 창조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재와 먼지, 피와 살, 물고와 빵을 통해 일하셨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아주 좋다'라고 선언하신다.


영지주의를 표현한 그림


물질성과 성례전

물질성에 대한 이러한 예전적 긍정을 흔히 세계에 대한 성례전적 이해로 설명한다.

창조와 신체성을 이루는 신체적, 물질적 요소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 만나고 사로잡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특정한 성례전이 의미를 지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가능하도록 우주가 창조되고 구성되는 것이다.

성례전은 하나님이 그 분의 피조물 안에 그리고 피조물과 더불어 계시는 일반적인 성례전적 임재가 특수한 방식으로 강화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렉산더 슈메만은 성례전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 점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우주서 그 총체성을 가리키든지 시간과 역사로서 생명과 생성을 가리키든지, 세계가 하나님의 현현epiphany이라는 근본적이며 시원적인 직관은 예배 안에서 표현될 뿐 아니라 에배 전체가 바로 그런 현상과 경험이다.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에 대한 저항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라는 행위 자체는 물질과 몸을 본질적으로 악으로 이해하는 이원론적 영지주의와 세계를 '단지' 자연적인 으로만 이해하는 환원론적 자연주의 모두에 대한 거부다.

기독교 예배의 실천은 두종류의 환원론을 거부한다.

한편으로는 이원론적이며 초자연주의적인 영지주의에 대해 저아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물질성이라는 불순물을 취급하지 않으신다는 주장이건 물질적인 것을 단지 물질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라는 보는 관념이건, 이 둘은 모두 세계를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 곳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기독교 예배에 내재된 세계 이해에서는 물질성의 선함을 긍정할 뿐만 아니라 물질은 물질 이상의 것에 참여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적 물질주의라는 외줄타리를 한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 안에 내재된 성례전적 상상력에서는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라는 이분법을 멀리한다.

그 대신 온세상은 하나님의 위엄으로 가득하다.

기독교적 사회적 상상에서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못하지 않으며 언제나 보이는 것 이상이다.


성례전적 상상력의 도전과 유혹

1. 첫째, 기이하게도 기독교 예배를 통해 배우고 피조물의 선함과 세상의 성례전적 성격을 가르쳐주는 이 성례전은 교회를 주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교회를 빈공간으로 임재의 또 하나의 장소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애리스토틀 파파니콜라우는 '비록 모든 피조물이 성례전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피조물이 같은 정도로 성례전적이지는 않다.']

2. 두번째는 예전을 다른 실천과 같이 그저 몸으로 수행하는 하난의 실천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다. 자연적이거나 내재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체현의 중심성이 성령의 역동적 임재를 부인하는 예배의 자연화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성령은 물질적 실천을 통해서 그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자라게 하시,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제임스스미스


3. 보론 : 기독교 예배의 모습


고교회적이거나 예전적인 맥락만이 예전적이며 형성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기독교에배는 규범에 의해 지배되고, 전통을 활용하, 신체적 의례나 반복 행위를 포함하고, 형성적 실천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예전적이다.

기독교 예배가 예전과 관련된 요소 중 일부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면 무엇인가 결여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니깐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라는 책은 성례전을 포함한 모든 예배가 특별하게 가져야 하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0. 나오기


기독교 신앙은 예배와 실천이 따로 놀지 않는다. 특히 기존의 세계관적인 접근이 가진 한계는 그것이 생각에만 그칠 가능성이 높고, 신념으로 화석화되어서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임스스미스는 예배를 형성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성례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방식을 다시 부각시켜서 기독교 예배가 온전한 방향으로 바귀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논의할 부분은 매우 많지만 예배에 대한 태도를 다시 바로잡고 성령의 임재가 넘쳐나는 성례전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는 지점에서는 그야말로 정통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 앞으로 조금 더 살펴보면서 실천과 예배 이후에 예배와 세계관의 연관성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자.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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