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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14. 2022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제임스 스미스의 3부작_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서론과 1장

0. 들어가기


'White man's burden'이라는 말이 있다. 이른바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부담감이다. 그것은 과거 백인들이주로 일삼았던 제국주의와 식민주주의의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서 백인들이 다시 부담감을 가지고 해결하기 위해서 나선다는 말이다. 이 말은 국제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비판에 대한 표현이지만, 지성사에 있어서도 그렇고 신학에 있어서도 그렇고 동시에 적용이 되는 것 같다. 이미 세계는 신자본주의 이전에 기독교적인 형성이 있었고, 다시 자본주의적 형성이 있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앞장섰고, 또 동화되었으며 때론 반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도 'form'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체계를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해가고 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바꾸어 갈 것인가? 이런 실천적인 고민들도 해야 한다. 비판점을 동시에 잡아 놓고 계속 걸어가보자.


https://brunch.co.kr/@minnation/3201


서론에 대한 전체적인 도식화

전통 인간론, 지성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하지만 인간은 몸의 관점에서 '욕망하는 인간'이며, 이 욕망하는 방식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라는 전제) 이것을 말하는 이유, 세계관 중심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문제 제기가 주요 내용이다. 몸의 관점에서 욕망하는 인간을 생각한다면, 예전(혹은 예전이 일어나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데, 예전의 질서와 상징은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게 혹은 욕망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간에 기독교 교육은 '생각하는 인간'에만 초점을 맞춰왔기에 예전과 형성적 요소를 간과한다. 따라서 예전과 형성의 관점에서 기독교 교육과 예배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교육의 핵심은 형성(빚어가는 것), "무엇을 욕망하는 인간을 만들 것인가?"


교육이 무엇을 아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문제라면?



1. <서론: '관점'을 넘어서> 신앙과 학문에는 실천이 필요하다.


교육이 무엇을 아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문제라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교육은 지금까지 지식을 습득하고 정보를 수집해서 일정한 결과물을 내는 것으로 치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육을 다시 '마음의 문제'로 가지고 온다면, 우리의 성품과 마음의 구조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어야 한다. 마음의 지향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텔로스(목적)가 정해지는 과정에서 결정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고 욕망하는지가 목적지를 정할 수 있게 만들고 그 목적지가 정해지면 우리의 마음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해서 시간과 노력,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스미스는 마음이 작동하는 지점인 욕망에서 시작한다. 서론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익숙한 것 낯설게 하기

- 쇼핑몰의 질서와 상징에 따라 인간은 움직인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 모든 문화적 공간은 예전적이고 형성적 공간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종교 기관이자 교육기관이다.

- 다시 말해 가치중립적인 공간은 없다.

- 그것이 바로 종교적 본질 (여기서 종교란 삶의 방식)


"예전은 우리를 특정한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규정한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세계관에서 예배로, 그리고 다시 예배에서 세계관으로)

- 기독교 교육이 상정하는 인간의 전제: 근대적 인간론 (관념/정신/주지주의)

- 그것의 종착지, 기독교 세계관, '올바르게' 생각하기

- 그것으로는 공간이 갖는 예전적 성격을 이해할 수 없다

- 왜냐하면 예전은 전인적이고 정서적이고 구체적인 인간론을 전제


"만약 우리의 정체성의 핵심이 지성보다는 몸에 자리하고 있다면?"


문화 신학의 구성 요소: 교육, 예전, 교회

- '문화 신학'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이해하기

- 인간론: 생각을 넘어 몸을 입은 행위자

- 도전과 저항을 위해서는 사상보다는 실천

- 예배와 예전의 관점에서 실천과 제도 이해

- 반문화가 아니면서도 대안적 문화 형성에 초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독교 교육을 해야 하는가 (두 가지 시사점)

1) 교육은 정보의 제공이 아닌 사람을 빚어내는 형성을 위한 기획이다

2)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 더 정확히는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는 급진적인 제자들을 형성하는 것이 기독교 교육과
예배의 근본 목적임을 깨닫게 하는 것



2. <1부: 욕망하고 상상하는 동물> 1장 예배하는 인간


1장에서 스미스는 이전에 경제적인 인간이나 사회적 인간,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뒤집으면서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예배하는 인간'을 제시한다. 여기서 또한 예배라는 형식은 습관을 통해서 정형화되며 습관은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기존에 기독교 세계관은 '인지적 영역'에서 시작해서 '정서적, 비인지적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스미스는 이것을 뒤집어서 오히려 습관을 통해서 정서적 영역이 확대되어 인지적 영역을 형성하도록 교육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1부의 도식화

예전, 배움, 형성 사이의 관계를 생각함으로써 예배와 세계관 사이의 관계를 재고하고자 제안하고 있다. 같은 문제에 접근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을 나타내는 두 가지 물음이 그 동기가 되었다. 그 한편에는 기독교 고등교육의 본질과 과제에 관한 물음이 있다. 왜 우리는 기독교 대학에서 공부하는가? 기독교 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왜 기독교 대학이 필요한가?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기독교 교육의 과제와 교회의 예전적 삶의 흐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른 한편으로, 문화 신학과 문화적 형성으로서의 예배와 관련해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어떤 점에서 다른 문화적 실천은 예전인 동시에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기독교 예배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다르게 형성하는 대안적 교육의 기능을 하는가? 이 두 종류의 물음은 모두 교육과 형성의 문제를 다룬다. 두 물음과 관련해 우리는 어떻게 물질적 실천이 우리에게 욕망을 교육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욕망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을 궁극적으로 예전적 동물로, 이해하는 철학적 인간론을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스미스는 인식론적인 문제점을 '세계관 주의자'들에게도 제기한다. 세계관주의자들은 이미 인식적인 틀을 만들어 놓고 그것대로만 세계를 바라본다고 비판한다. 그러다 보니 인지적이거나 생각을 필요로하지 않은 마음, 정, 인상과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스미스는 새로운 이해방법으로 습관과 예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존재론'을 부활시킨다. 존재하는 것들이 하나의 개체가 아니더라도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들이 실제에서는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면서 작용하는가? '감정'이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느끼는 기분과 흥분이 태도가 되고, 그것이 정체성을 만들기도 한다. 계속되는 것들, 지속되는 것들은 우리의 일부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에드먼트 후설이 이야기하는 4가지의 주관

1) 외재적 주관  
외재적 주관은 자아 외의 존재하는 지향성이 닿아서 인식된 자연, 사물, 공기, 건물, 우주와 같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주관에 의해서 그것들을 계속해서 인식된다.

2) 내재적 주관
내재적 주관은 외재적 주관이 인식될 때 내 안에서 느껴지는, 이해되는 것들이다. 몸이 아프다거나, 마음이 좋다던가, 머리가 아프던가, 시원하다라는 등의 여러가지 인식들이 내재적 주관을 만든다.

3) 수리적 주관
수리적 주관은 수학적 주관과 같다. 외재적 주관과 내재적 주관도 마찬가지로 몇개가 있는지, 어떤 배열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어느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려면 수리적 주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타자적 주관
타자적 주관은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외재적 주관과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을 사물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것들을 인식하는 것처럼 타자도 나처럼 다른 것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의식적인 능력이 있으나 그것도 역시 내 안에서는 '그와 그녀에 대한 주관'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잠시 후설을 이야기해보자. 스미스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세계관'이라는 요소보다는 '상상력이나 상징계'라는 요소를 더 즐겨 사용한다. 특히 퐁티를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후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상학을 창시한 후설은 한 사람이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할 때 4가지의 주관이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했다. 외재적 주관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생긴다면, 내재적 주관을 사용해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이러한 내재적 주관으로서 비인지적인 부분과 정서적인 부분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관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한마디로 '빅데이터'가 모여서 하나의 뚜렷한 방향이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교육은 그 지향을, 방향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2300


3. 자아의 무게 중심 이동


자아를 구성하는 영역을 인지적 영역과 정서적 영역으로 나누어 보자. 일단 인지적 영역은 사상과 신념을 말한다. 정체성을 이곳에 위치시킬 때 이 모형은 인지주의, 합리주의 혹은 주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나는 생각하는 사물과 연결된 생각하는 존재이다'라고 할 수 있다. 정서적인 영역은 욕망과 염려, 관심, 동기부여가 중심이 되고 '정체성'을 이곳에 위치했을 경우에는 이것을 정서적 모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이 그렇다고 반지성주의는 아니고 오히려 합리적이거나 인지적인 것을 대체하는 지식을 넘어서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조차도 욕망과 사랑에 의해서 위치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인지적 영역이나 정서적 영역에서 우선되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정리해본 내용이지만 스미스의 도식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스미스는 인지적인 부분이 먼저가 아니라 정서적인 영역이 먼저이고, 정서적이고 비인지적인 부분에서 형성된 것들이 인지적인 부분을 이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스미스에서 형성의 우선순위가 매우 중요하다. 퐁티와 부르디외의 이론을 가지고와서 형성되는 과정에서 몸의 현상학과 동기를 설명하는 스미스는 '예배가 중요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왔고, 또 만들어 갈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어쩌면 기독교교육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배라는 의식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습관을 가진다. 기도를 하고, 수련회를 가서 하나님께 회개를 하고,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조모임과 셀모임을 통해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습관 말이다.


세계관이 아니라 사회적 상상이 필요하다


스미스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기존의 세계관 주의자들이 이야기했던 '인지적이고 주지주의적인' 접근의 관졈에서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사회적 상상'이라는 단어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세계관이라는 너무 협소한 부분의 프레임보다는 사회에서 다양하게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서 상상하게 되는 영역을 열어 놓자는 말이다. 여기서 스미스는 찰스테일러의 입장을 가지고 와서 사회적 사상이 어떤 부분인지 제시하고 감정적 영역이 상상력의 근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밝힌다. 스미스의 논리가 '형성'에 집중하고 있고 그 형성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에서 인간론을 '예배하는 인간'으로 다시 쓰고 있는 부분은 '급진 정통주의'라고 할 만하다. 이세 사회 속에 놓인 자아의 무게 중심은 인지적인 부분이 아니라 감성적이고 비인지적인 부분으로 옮겨간다.


찰스테일러의 함의

첫째, 만약 인간이 인지적 이론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회적 상상을 활용한다면, 이를 유추해 볼 때 인간은 교리적 신학을 개발하기도 전에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종교적 경건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대한 이해는 종교적 예배와 헌신의 실천에 수반되며 또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 이런 의례는 실천 안에 내제된 형성에 근거해 세상을 특정한 환경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형성한다.

둘째, 실천 안에 내재된 이해를 현재의 세계관 담론에서 흔히 사용하는 사상이나 신념, 교리와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본원적인 차원에 속하는 이해는 나머지를 배제한 교리나 사상, 공식으로 정제해 낼 수 없다. 테일러가 강조하듯이 실천 안에 자리하고 있는 환원할 수 없는 정수가 있다.


0. 나오기


이번 장에서는 서론과 1장을 주로 다루어 보았다. 앞으로 사랑의 실천과 세계관과 예배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스터디할 예정이다. 스미스가 던진 작은 돌이 세계관주의자들에게 어떤 파장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궁금하기도 하다. 앞으로 교육을 설계하는 입장에서 스미스의 논리와 주장을 어느정도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고민이 된다. 신기한 것은 인간의 능력은 이렇게 기존의 틀과 프레임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찾아내고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능력을 조금 더 확대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세계관에서 사회적 상상으로 이동하는 프로세스를 조금 더 살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qhuvlTvyn_E&t=40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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