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스미스_아비투스의 개념과 몸 그리고 습관
한국교회는 과연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가? 한국교회에는 소망이 없는가? 아니 한국 교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직 보수적 기독교에 대한 전향이 아니면 무교회주의자가 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한 것도 거의 20년이 넘은 것 같다. 지적으로 허영심을 버리면 모르는 것을 찾아보게 되고, 고민해서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한국의 기독교 신앙이 가진 문제점을 열거하라면 끝이 없겠지만, 그럼 어떤것이 대안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렵다. 점진주의자인 사람들에게는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는 연구가 수반된다. 오늘 공부는 그런 의미에서 삶 속에서, 기독교 신앙안에서 그 답을 찾아보는 공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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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스스미스 공부를 시작한다. 오늘은 제임스스미스의 책을 읽기 전에 오영환교수가 쓴 '제임스 스미스의 아비투스를 통한 몸의 욕망과 형성 : 뉴노멀시대의 고찰'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임스 스미스가 가지고 있는 '예배와 의식'에 대해서 삐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으로 접근한다. 아비투스는 흔히 '습속'이라는 어려운 단어로 해석이 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지는 문화적인 행위와 습관, 관례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배와 의식을 통해서 계속된 문화적 정체성을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전제부터 논쟁해볼지 한번 생각해보자.
제임스 스미스James K.A Smith는 미국에서 인문학으로 유명한 칼빈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이며, 개혁주의 전통을 충실하게 지키는 신학적 실천가이다. 신학자이면서 실천가인 스미스는 포스트모던 철학자와 사회학자들과의 끊임없는 학문적 조우를 통해서 학제간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개혁주의 전통과 급진 정통신학, 공공신학, 어거스틴의 논의까지 들어가면서 창의적이고 새로운 인간관과 문화적 예식들을 통해 실천적 대안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2017년 삼일교회에 방문하면서 엄청난 기독교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 신학자에게 이러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다.
스미스의 3부작이라고 하면 보면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왕을 기다리라'이다. 이 책은 하나님나라를 온전히 욕망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디자인이며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욕망의 방향이 틀어지면서 사회 속에서 인간의 삶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규정하고 형성해 가는 사회 속에서의 '의식'ritual을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핵심적인 의식은 예배이며 예배를 통한 회복을 기본적으로 이야기한다. 그 방법은 매우 실천적이여서 '급진 정통주의 신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스미스는 학문적 전통으로는 어거스틴에서부터 시작하면서 하우어워스를 인용하지만 '왕을 위하여'라는 3부작의 마지막에서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으로 넘어간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세상을 정의하고, 인간이란 무엇인지, 가치란 무엇인지를 고민할 때 성경적인 배경을 가지고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생각이 바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는 주지주의적 특징을 가진다. 주지주의는 지성적인 깨달음이, 인식론적인 이해가 세상을 바라보는 행동을 바꾸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은 한국에서는 한창 유행하다고 곧 시들해졌다. 그도 그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는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론'이나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주제였다. 대립항 자체가 지적인 이념이나 철학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넉다운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제임스 스미스가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몸' 속에 하나님나라와 성경의 가치를 습득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주지주의적 특성이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의 확장성을 막고 있다고 말한다. 스미스는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Homo Luturgicus이며 욕망하는 존재이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전제하면서 세계관 이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제를 선포한다. 인간이 예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배의 문제가 인간타락의 문제이며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인간이 회복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예배의 회복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러한 통합적인 인간관에 비하면 지적인 부분에서 '앎' 자체에만 집중해서 문제가 되는 것을 지적한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이분설과 삼분설이 있다. 이분설은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영혼이 우위에 있기 때문에 영혼은 영원하고 육체는 결국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세계관이 이분법이다. 이와 비슷하게 삼분설은 인간은 영과 육 사이에 혼이 있고, 혼은 지식, 감정,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분법에서는 영혼에 이미 정신이라는 의미에서 지적인 부분이 들어 있는 반면 삼분설에는 이것을 분리하면서 정신이란 지식과 감정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로 정의한다. 이분설이나 삼분설에서는 항상 고민이 이 요소들 간의 관계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삼분설에서도 '지식'에 더 집중한다고 스미스는 비판한다. 그래서 통합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미스의 대안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예배'를 통해서 영혼육이 통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미스의 대안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예배'를 통해서 영혼육이 통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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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투스는 '습관이나 습속'이라고 보통 번역된다. 개념의 어원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내면에는 에토스Ethos와 헥시스Hexis가 있다고 말한다. 에토스가 반복되는 행동에서 나오는 기계적인 습관인데 반해서 헥시스는 도덕적인 성향 즉 덕을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기에는 폴리스라는 제도의 범주 안에서 노모스라는 관념이 존재했다. 이러한 구조와 문화 안에서 인간의 내면은 에토스와 헥시스로 구성되어 사람들과의 사회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윤리적인 습관을 체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부르디외는 바로 이러한 습관을 차원을 근대로 가져온다.
습관이 곧 우리 자신이다
아비투스를 몸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자. 객관화된 제도와 조직이 일정한 공간 안에서 일정한 시간을 지내면서 만들어지는 습관은 우리 몸에 각인된다. 누군가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습관화된 코드이다. 이러한 습관은 의식화되기 보단 오히려 몸에 베인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습관이 바로 그 사람이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것, 자신의 존재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한다. 의식하기 이전에 사회적인 제도 속에서 우리의 몸이 스스로 습득하는 습관 그것이 바로 아비투스인 것이다. 아비투스는 경험에 의해서 강화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몸을 통해서 이미 익숙한 아비투스를 경험시킨다. 자~ 이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스미스가 아비투스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접근해보자. 아래 내용은 논문에 나오는 스미스의 접근이다.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며, 지성보다 앞선 상상과 감정과 지각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구성하며 학습되고 실천되며, 어떤 특정한 지향을 향해 나간다는 것이 스미스 인간론의 핵심이다. 스 미스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목적을 향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습관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덕이란 좋은 도덕적 습관이며, 이것은 지적인 것보다 정서 적으로 습득하게 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 덕을 교육하는 것은 일종의 형성이며 특정한 성향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Smith,2018b: 36).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는 성향은 지속적 으로 반복되는 의례를 통해 우리 내면 깊이 성품에 새겨지며, 이를 통해 어떠한 성향이 자리 잡는다 (Smith,2018b: 38).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결국 많은 실천의 실천이기 때문”이다(Dykstra,1999: 67)_제임스 스미스의 아비투스를 통한 몸의 욕망과 형성: 뉴노멀 시대의 고찰 / 오경환
사실, 스미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약간은 불편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형성fomulation이라고 할때, 이것은 다분히 영미철학이 가지고 있는 분석철학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분석철학은 모든 것들을 다 쪼갠다음에 그것들이 다시 결합하는 과정에서 주체나 이론,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계하는 것을 말한. 그러니깐 '습관의 형성'이라는 것도 기존에 있던 논의들을 분석하고 쪼개서 다시 시간과 메뉴얼, 프로세스에 따라서 조합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미권의 사람들에게 스미스의 논의는 매우 자연스럽지만, 그 외의 문화권에서는 낯설거나 혹은 모더니즘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게 된다.
스미스는 예전적 인간론을 제시하기 위해 부르디외가 추진한 기획을 차용한다. 부르디외가 제안한 “실천으로서의 실천 이론”의 의의는 의미 있는 어떤 행동을 일으키는 습관화된 성향의 중요성을 파악 해 낸 것이다. 아비투스는 일종의 양립 가능성인데,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는 사람도 아니며 외부적 힘에 의해 강제되어 형성되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지각과 행동은 모두 제약되지 만, 동시에 자발적이고 또한 즉흥적이며 자유로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Smith,2018a: 154- 155)는 이 지점에서 기독교 교육과 형성의 목적을 지적으로 고도화된 ‘세계관’의 습득이 아닌 기독교 적 아비투스의 습득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세상을 구성하는 법을 배 우지만, 동시에 자신의 세상을 스스로 구성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각하는 나는 언 제나 우리이며, 이것은 공동체 내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므로 주목해야 할 것은 결국 믿 음과 몸의 결합이다_제임스 스미스의 아비투스를 통한 몸의 욕망과 형성: 뉴노멀 시대의 고찰 / 오경환
특이한 점은 부르디외에의 철학을 가져오면서 메를로 퐁티의 관점까지 가져온다는 것이다. 물론 부르디외를 인용하려면 부르디외게 참고했던 퐁티의 몸의 현상학을 인용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과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결합하면서 스미스는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지는 아비투스를 몸이 체화하면서 덕성과 습관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으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전 혹은 의식ritula은 몸에 자연스럽게 각인되는 덕성이면서 습관이 되는 것이다. 급진정통주의자인 스미스는 이것을 다시 기독교에 접목시켜 기독교에서 가장 흔하지만 가장 잃어 버리고 있는 '예배'라는 의식으로 돌아온다. 예배가 일어나는 '장'안에서 아비투스가 만들어지는 몸들의 중요성을 바라보게 만든다.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신체와 지각의 철학자이자 살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퐁티는 감각과 신체의 움직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인간의 육체가 존재하는 일정한 장소안에서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반응하고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퐁티가 데카르트를 이해하면서 새로운 서술을 내 놓는다. 코기토인 인간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존재론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퐁티는 오히려 신체를 바탕으로 '나는 할 수 있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치환시킨다. 퐁티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동기와 행동이다. 인간은 어떤 과정에서 동기가 생기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행동으로 이어지는가의 문제 말이다.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대하는 '나의 제스처, 태도'가
더 본질적인 나라고 말한다
스미스는 사실 바로 이 문제에 집중한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때, 왜 그것을 하게 되는 동기가 생기는지 말이다. 인간은 식사를 하고 옷을 입는다. 그런데 그 동기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그 동기가 대부분은 다양한 종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시작된다. 스미스가 보기에 인간의 동기는 항상 정신에서 주어지는게 아니라 삶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어느 장에 서 있고, 어떤 사람들과 어떤 과정을 경험하는지에 따라서 동기가 달라지고 동기의 결과인 행동도 달라지게 되어 있다. 현상학은 '시선'과 '의식'의 지속성으로 인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긴다고 하기 때문에 퐁티가 말하는 동기도 당연히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보는 것은 결국 인간의 신체가 어디에 서 있는가에서부터 누구와 함께 있는가로 연결되기에 경험의 문제로 치환된다.
결론적으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결국 '욕망'이고 인간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욕망하는 존재'로 만들어졌지만 욕망의 대상이 바뀜에 따라서 방향을 잃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온전한 욕망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역할을 기독교가 해야하고 그 시작은 이전의 주지주의적 해법처럼 '강의나 교육, 설교나 지적인 대화'가 아니라 인간이 기본적으로 누리고 있는 '형식으로서의 예배와 태도로서의 신앙'인 것이다. 과연 스미스의 대안이 맞을지는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매우 예리하게 현재의 기독교 세계관운동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것을 빠져나오는 간단한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제임스 스미스는 기존의 '세계관-문화'라는 형식에서 '예배-세계관-문화'라는 도식을 제공한다. 예배로 다시 귀환하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는 하지만 식상하지는 않다. 예배가 가지고 있는 순기능과 교육의 효과만이 아니라 퐁티와 부르디외에게서 가져온 '몸의 현상학과 아비투스'개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배를 대하는 태도는 곧 우리의 정체성이다. 예배에서 우리가 행하는 제스쳐는 곧 우리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쇼핑몰을 갈 때 입구에서부터 나오는데까지 예배와 같은 형식의 '형성'을 경험한다. 입구에서 반기고 소비자를 찬양하면서 쇼핑몰의 중간에서는 소비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욕망의 충족물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올 때는 다음에 또 올 수 있도록 새로운 욕망을 부축인다. 결국 소비의 천국인 쇼핑몰은 하나의 예배와 같은 맥락과 흐름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성 : 보는 능력이 눈 안에 있듯이, 나 이성은 정신 안에 있다.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며, 본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혼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즉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눈, 보는 능력, 이해하는 능력이다. 손상되고 병든 정신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건강한 정신만이 그 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건강한 정신만이 그 분을 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정신은 치유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정신이 이것이 참이며 오직 이러한 때에야 그 분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치유에 대해 아무런 소망도 갖고 있지 않다면, 정신은 탐구하기를 포기하고 의사의 권고를 따르기를 거부하지 않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 : 분명히 그럴 것이다. 특히 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혹독한 치료가 필요하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성 : 따라서 믿음에 소망이 더해져야 한다. 하지만 정신이 이 모두가 참이라고 믿고 치유가 가능하다고 소망하지만 약속된 빛을 사랑하고 욕망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러는 동안 어둠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둠은 습관을 통해 그에게 유쾌 것이 되었다면, 정신은 의사를 거부하지 않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 : 완벽히 옳은 말이다.
이성 : 그러므로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_아우구스티누스, '독백' Solioquies
하나님을 욕망하라는 책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을 제공한다. 이 독백에서 스미스가 강조하는 것은 믿음에는 소망이 필요하고, 소망은 결국 사랑으로 완벽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욕망한 것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제의'가 필요하다. 일상에서 그것은 하나의 '의전'ritual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명확한 의전은 '예배'이다. 그러나 예배가 쇼핑몰에 입장한 소비자들을 만족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순간 예배를 아무리 드려도 기도교인들은 더 기독교인이 아닌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정신의 눈으로 본다고 하면서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들을 새롭게 형성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이성은 날마다 더 빛을 잃어갈 것이다. 습관이 곧 영성이다. 그 말은 습관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곧 우리의 영성의 수준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대하는 태도와 예배가 드려지는 과정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부분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이제 스미스를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스미스의 3부작을 읽으면서 과연 퐁티가 가진 현상학의 한계와 아비투스 개념이 가지고 있는 정신작용의 영향력의 간과를 극복하고 기독교 예전의 독특성과 풍부함을 드러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퐁티-부르디외를 비롯한 샤르트르와 푸코가 가진 시대적 한계, 맥락에 충실성 때문에 생긴 비판들도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면역학적 세계'에서 '자기착취적 자아'로 변화된 세상에서 여전히 예배는 그 대안이 되며, 여전히 현상학은 현상 자체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말이다. 어찌되었든 논문과 책을 오가면서 앞으로 스미스의 논리를 더 깊게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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