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스미스_서론 : 감정의 교육
따라서 개신교인들은 칼뱅을 따라서 교회의 실천이 인간의 칭의를 달성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인간의 성화와 하나님의 활동 및 능력과 진정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_Matthew Myer Boulton
칼빈에게서는 칭의도 중요하지만 '성화'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개혁파라고 하는 리폼드 교회들에게서도 이것을 받아들여서 기독교 윤리와 실천, 행위를 생각할 때 '칭의'는 시작이고 '성화'가 완성이라고 본다. 칭의와 성화는 구분될 수 있어도 떨어질 수는 없다.
예배의 목적 그리기
앤드루는 그것을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배의 마지막이 보냄이고, 예배 마무리에 자리한 축도는 위임이며, 예배의 마지막은 텔로스와 목적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그들이 다음에 하는 일, 즉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예배가 끝났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 후에 우리는 보냄을 받는다.
이제 앤드류는 예배의 마지막end가 예배의 목적end임을 깨닫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장점은 마침/보냄s/ending이다. 이 이미와 아직의 시간에 예배의 목적과 텔로스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 만남을 마친 후 하나님의 증인이자 그분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 보냄받는 것이다.
교회와 기독교 교육
교회와 기독교 대학의 갱신은 곧 기독교 예배와 기독교 교육의 갱신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을 '예전적 동물', 즉 예배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예배의 실천에 의해 형성된 피조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우리의 존재론이 달려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다.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에서 시작해서 문화분석의 새로운 렌즈를 만들기 위해서 근본적인 욕망을 빚어내는 '형성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교회와 기독교 대학은 예전적 형성을 기반으로 '보냄'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감정교육을 쓴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 대학은 형성적 교육 뿐 아니라 통전적 교육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감정교육'sentimental education을 하는 곳이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행동이다. 적절한 지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적절한 행동 철학이 필요하다.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수집하라고 다그치며
그들에게 과업과 책무를 할당하지 말고 그들에게 끝없이
거대한 바다를 동경하는 법을 가르치라_생텍쥐페리
세계관과 행동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스미스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텔로스에 대한 전망에 우리 마음이 사로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제공한다는 목표자체로는 교회와 기독교 대학의 사명으로는 부적합하다.
이러한 교육관은 충분히 근원적이지 못하다. 지성적인 측면에만 집중함으로써 정서적인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육은 정보의 확산이 아니라 감정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통전적이면서도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이해가 '형성'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져야 함을 이야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사이트 feat.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첫째,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향성을 지배함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과 상상력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대안적 인간론을 제시했다.
둘째, 교육 역시 우리의 사랑과 욕망을 형성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며, 그런 형성은 '예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체현된 공동체적 의례를 통해서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셋째, 형성에 있어서 예전적 실천의 우선성을 감안할 때, 기독교 교육의 책무가 기독교 예배와 예전적 형성이라는 교회적 실천 안에 다리 자리잡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와 세계관, 교회와 대학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
우리는 명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와 모순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
세계관의 한계 : 코스트코에서 웬델베리 읽기 feat. 민네이션 요약 및 비판
코스트코에서 식료품을 사고 있는 자신을 볼 때, 금욕이나 금주 혹은 자신의 삶을 적절하게 통제하라고 하는 명령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현자타임이 오게 된다.
건강하게 생각하고 건강하게 살기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맥도날드에 앉아서 페스트푸드를 먹으면서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에 의해서 형성된 자신들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삶의 라이프사타일을 제공해주는 산업사회의 생산품들 간의 인지부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많은 곳에서 인간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활동과 형성들이 존재한다. 플로깅만 하더라도 그렇다. 자신이 사용한 쓰레기를 자신이 다시 줍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은 다르게 형성된다. 지나가다가 보면 쓰레기가 보이게 되고, 그것을 줍기 위해서 허리를 굽히는 순간 이 쓰레기를 생산하는 일을 멈춰야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깐 말이다.
제임스 스미스가 말하는 감정의 교육 역시 인간의 지정의에 갖혀진 것이 아닐까? 그런 구분을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은 동양인의 사고에서는 '아 이제야 깨달았구나 너희들이 만든 인식론의 그릇이 너무 작다는걸?'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동안 오리엔티즘이나 엑시덴탈리즘이나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망하거나 그 틀을 빠져나오거나 했다.
제임스 스미스와 같은 학자들의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가면서 마치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여러권의 책에서 지지부지하게 써내려가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삶 자체를 바꾸는 노력없이 내 버려둔 자본주의의 산물들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세례주듯이 형성하고 있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는 결국 경제와 사회, 문화, 교육 모든 것에서 영향을 미치는 형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형성의 시작까지 가보면 다시 세계관, 생각으로 돌아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코스트코나 맥도날드, 코카콜라와 같은 미국식 자본주의에 의존적인 생활이 된 이상,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체계와 방법, 제품과 서비스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이것들을 모두 거부한다고 될 일인가?
비판지점은 '행동과 수행'과정에 관련된 메뉴얼과 실용주의는 그 자체로 비판이 되지 않을까? 다른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지만 그 자유를 빼앗아가고 다시 워싱톤컨센서스와 같이 가장 좋게 형성되는 것이 우선이 되어 버리는 방식 말이다. 그러면 다시 '대학순위' 이런 식으로 우열이 가려지는 것이 아닌가? 이게 형성이나 과정에만 초점을 맞춘 최후가 아닌가? 마치 헤어지자고 한 연인에게 아무리 말해도 마음을 돌리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람 같이 말이다.
스미스의 주장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에 의해 규정되는 예전적 동물이기 때문에, 또한 우리의 사랑과 욕망이 형성적 실천에 의해 갖추어지고 빚어지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의 통전적 모형은 욕망의 교육을 포함해야 한다.
그런 교육은 정보를 확산하는 통로에 그치지 않고 형성을 위한 전략이 된다.
행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행동과 행위를 추종하는 중심은 수면 아래에서 작둉하는 사랑과 갈망, 습관의 집합체이다. 그 목적은 결국 기독교적 행동이다.
지성에 대한 상대화를 통해서 지성의 자리를 다시 잡게 하고 감정과 습관의 형성과 자리배치를 다시 해보자는 것이다.
지성의 자리를 정해주는 것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다. 합리성조차도 신실해야 하며, 단련하고 훈련하며 습관화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의 포커스
스미스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중심으로 우리의 행동과 행위를 '추동'하는 의식적이지 않으며 이론보다 앞선 요소를 이해하자.
세상에 대한 우리의 습관화된 지향의 신체적 형성을 설명하자.
이러한 '의미의 신체적 토대'에 뿌리 내리고 있으며 인간 행동을 안내하고 유발하는 일종의 선이론적 남침반 역할을 하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간단히 말해서 마음에 이르는 길은 몸을 통하는 것, 몸에 이르는 길은 이야기를 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세속적 예전과 습관
세속적 예전도 이런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세속적 예전 역시 우리의 상상력을 부추김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통제하는 체현된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무의식적 충동과 욕망을 이끌어낸다.
기독교 예배의 실천이 성령의 임재와 전햐 다른 이야기에 의해서 특징지어 지듯이, 세속적 예전조차도 '자연적'이지 않다. 세속적 예전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의해 부추겨진다. 바로 대항적 형성의 필요성 때문에 의도적인 기독교적 형성이 피조물로서 우리의 특성으로 인해 운동미학과 시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신체성과 상상력, 이야기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예전적 인간론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하나님나라와 상상력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우선 정서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일종의 중간 단계의 주직화 혹은 종합능력이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상상력의 현상학'에서 '시적 층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각자체와 구별되어야 하는 인지보다 앞선 지각이 존재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교실에 있고 내가 미적 대상의 예로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로 당신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면, 이제 당신은 그 의자를 대상으로서 지각한다. 그러나 곧 자신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전제가 되어서 다른 생각들이 진행된다.
상상력이란 세상을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이해하는 일상적인 능력을 명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존캐그John Kaag는 상상력을 '유기체가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지성의 창의적 힘을 통해 계속해서 변하는 환경을 극복해 가는 역동적 과정이자 전반적으로 인간에게 공통되며 우리의 사회적이고도 자연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의 일을 해내 가기 위해 필수적인 창의적이면서도 신체적인 지성의 과정'으로 정의하다.
상상력은 휴리스틱하고 이미 지각된 것들을 가지고 새롭게 조합하는 창조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전제하고 시작하지만 그것들이 없으면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되는 것 말이다. 예를 들면, 의자라고 하는 순간 의자가 놓여 있는 어떤 공간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력이 이미 작동한 것이다.
필 케네슨Phil Kenneson은 상상력은 단순히 고안하다는 의미보다는 생산적이다. 이해할 수 있는 전체를 수용하고 구성하는 인간의 복잡한 사회적 능력이다.
예배와 그리스도의 몸
1. 우리의 순진한 주지주의를 제거하고 세속적 예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식함으로써, 잘못된 형성의 역학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하는 유혹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예배의 신체적 기초와 이것이 예배의 미학적 혹은 서사적 양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는 점을 이해할 때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형식에 새로운 지향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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