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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11. 2022

사회적인 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2장_제임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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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적으로 생각하고 사회를 분석하는 것에 길들여지면, 모든 것들을 서열화하기 시작한다. 메타인지라고 하는 것도 모든 것을 생각해보는 생각의 생각이지만 이것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계속해서 위와 아래, 좌와 우리를 나누고 어딘가에 위치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위상학의 대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가장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가장 아래에 죄인이 있는 도식으로 그 사이 어디쯤에 칭화와 영화와 성화를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어디쯤에서 서로를 비교하기도 하고 자신의 신앙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보여줘야만 하는 문화가 형성된다. 


부리디외의 이론


그런데 과연 진짜 그런가? 독일신학자 루돌프오토가 말한 '성스러움은 스펨트럼이지 차원이 아니다'라고 했던 말도 빗겨나가서 '감정'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행위'의 동기는 어떻게 발생하며, 사회 속에서 우리의 몸과 습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런 고민을 던져 보면 어떨까? 그런 과정에 있다. 제임스 스미스를 읽기 위해서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그송을 거쳐서 몸의 형상학자 메를로퐁티와 '구별짓기'의 사회학자 삐에르 부르디외를 지나와야 한다. 오늘은 사회적 몸에 대한 논의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나는 종교에서 관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비는 관념이 아니다. 유비는 공동체다. 유비는 공명이다. 야스퍼스와 베르그송, 부버가 매우 열등한 관념주의자의 부류로서 감각에서 시작되고 관념이나 사상에 의해 왜곡되는 즉각적인 유비적 지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_마셜맥루언


https://brunch.co.kr/@minnation/3234





1. 이론적 이성 비판


부르디외, The Logic of Practice

예전적 인간론은 실현의 우선성과 환원불가능성에 대한 이론이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이론을 체계화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시 마랗면 이론적 이성이 먼저 있는게 아니다. 지성의 절대화에 대한 상대화를 주장하는 기획이다. 

삐에르 부르디외는 인류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세계의 온전성을 개곽화시킴으로써 본질을 흐린다고 비판한다. 

사회과학자들은 현상에서 실제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객관화라는 명목으로 현상에서 한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실천을 이해하기 때문에 인식론적 단절을 만들어 낸다. 

인식론적 단절은 그래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다르게 만들기 때문에 '사회적 단절'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실천 자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실천에 관학 적합한 이론을 찾아내는 것이 부르디외의 목표이다. 


객관화라는 도구의 본질 혹은 효과를 고려하지 못하는 한 실천의 논리 자체를 파괴하는 구성 개념을 통해서만 논리를 파악할 수 있음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만 깨달았다_삐에르 부르디외



부르디외, 비판의 두 대상

칸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부르디외는 이론적 이성비판을 실행한다. 

이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이성의 한계와 조건을 숙고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이론적 해석을 생산해내는 인식론적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내는 왜곡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실천에 대한 우리의 이론적 분석이 환원불가능성의 논리를 포함하여 제대로된 현상을 분석하게 하기 위함이다. 

환원불가능한 원리들을 포함시켜서 지성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실천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부르디외의 접근은 '예전적 인간론'에 대해서도 기존의 지성중심적인 접근으로서의 예배와 예식이 아니라 환원불가능한 실제와 연결된 진실된 이해가 가능하게 만든다. 

'본래적 존재'로서 인간은 논리보다 앞선 실천의 논리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 

주지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부르디외는 '주관주의' 혹은 '주의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다시 말하면 '지성'이 우선되는 것도 아니고 '의지'가 우선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주의주의에 대한 비판은 샤르트르를 비롯한 의지와 실천을 연결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샤르트르에 대한 비판은 자유로운 주체가 '결단주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혼란을 일으키지만 실상은 실제 주체가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환경의 영향, 즉 사회의 영향을 무시한 단편적인 결과이다. 

행동을 야기하는 습관화된 성향의 중요성으로부터 예전적 인간의 전형을 찾아야 한다. 


자율적인 합리적 행위자에게 성향이나 경향인
아비투스가 없으면 제대로된 삶을 살 수 없다


부르디외에 말하는 장이론과 상징체계 그리고 아비투스


2. 실천감각으로서의 아비투스


부르디외, 아비투스

우리는 우연히 무엇인가를 행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천하는 인간으로서 근본적으로 세상 안에서 세상에 대해 행동하는 행위자이다. 

합리적 예측으로 이해된 이성의 결정에도 두지 않고 행위자 외부나 행위자를 초월하는 구조의 결정에도 두지 않는 실천안에 내재된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즉 예전을 행하는 가운데 인간안에서 만들어지는 지식이 있으며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결단도 아닌 과정과 실천 속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다. 

실천 안에서 구성되며 언제나 실천적 기능을 지향하는 구조화 되어 있으면서 구조화하는 성향을 아비투스의 체계라고 한다.

아비투스는 내 안에 새겨진 공동체적이고 집단적인 성향이다. 이것은 언제나 현실을 만들어 간다. 


아비투스의 특징

영속성과 치환 가능성 : 아비투스는 영속적이며 치환 가능하다. 오랜시간 동안 지속되고 전해지고, 공유되고, 전수될 수 있다. 아비투스는 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제도를 만들기도 하고 제도를 실천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 '제도화 된 몸'은 '사회적인 몸'이 된다. 

무의식적 지향성 : 아비투스는 의식적 지향없이 기능한다. 합리적 성찰이나 의식적 자각없이도 실천되다. 

아비투스는 일종의 양립 가능론이다. 관성없이 살아갈 수도 있고 외부의 원인과 힘을 자신안에 만들어진 성향으로 대체하거나 연결해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제약되어 있으면서 제약하는 자유이기 때문에 지각과 행동 역시 제약되어 있지만 또 제약하면서 세상을 구성해 간다. 

나의 지각은 공동체적이고 지각하고 있는 나는 언제나 이미 우리이다. 


기독교 교육과 형성의 목적은 세계관의 습득이 아니라
기독교적 아비투스의 습득이다.




3. 믿음과 몸 : 실천의 논리


부르디외, 실천감각

부르디외는 실천감각과 실천논리를 모두 체험적인 용어로 채택한다. 

부르디외는 실천감각을 몸이나 세상의 재현, 더구나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재현을 전제하지 않는 쎄상에 대한 유사-신체적 관여로 설명한다. 

실천감각이란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노하우, 아비투스와 동일시 되는 독특한 종류의 세계이해이다. 

실천감각은 세상에 대한 신체적 지향이자 관여이다. 실천감각은 내재성이다. 세상과 우리의 관계 안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실천감각은 나와 내 환경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세계와 나란히 있는 존재속에서 발생하는 후광효과이다.

실천 감각들은 내 선택들에 방향을 짓는다. 어떻게 보면 신제주의에서 말하는 경로의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천감각, 믿음

부르디외는 사이 공간에서 경계 개념으로 작업하면서 실천감각을 일종의 믿음이라고 부른다. 

실천적 믿음은 정신의 상태가 아니며 정해진 교의나 교리를 자의적으로 고수하려는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몸의 상태이다. 

실천감각은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몸의 성향이라는 의미에서 믿음이다. 이를 통해서 말에 앞서 세상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몸의 가치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위한 저장소이다. 우리의 궁극적 믿음, 우리를 규정하는 믿음,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까지도 몸 안에 지니고 있다. 

실천감각은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에 대한 나의 지각을 방향 지을 정도로 흡수한 공동체적 아비투스다.



부르디외, 의례

부르디외는 의례가 개념화에 저항하는 실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의례는 개념 없이 행하도록 만들어진 논리를 개념 안에 담아내려 하고 실천적 작동과 신체적 움직임을 논리적 작용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대부분의 실천들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 계획된 것어펌 보인다.

의례는 행하거나 말하는 바를 야기 하기하기 위한 수행적 실천이다. 

의례는 행위자의 실존의 조건과 성향 안에서 존재 이유를 찾는다. 

기사의 종교를 예로 들면서 기사의 종교는 결국 의례와 몸짓, 공식의 문제이며 의례적 실천의 실천적, 신체적 성격을 가진다. 기사의 종교는 태도, 손의 위치, 몸의 자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의례의 순서를 포함한다. 

의례는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믿는법을 배우는 방식이다. 

신제도주의에서는 맥락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4. 통합과 입문 : 몸 위에 쓰기


아비투스, 입문

우리는 어떻게 아비투스를 습득하는가? 아비투스는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고 우리의 환경을 경험하고 맥락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성향들의 결합체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체감적 개연성의 구조다. 

어떻게 체감적 개연성의 구조를 학습하고 흡수하는가? 

일종의 '토착민 되기'를 통해서 아비투스를 체험하고 흡수하게 된다.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태어나지만 자연스럽게 아비투스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딘과정이 필요하고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기까지 끌어들이기가 필요하다. 

의례를 통해서 우리는 아비투스를 자연스럽게 무의식의 영역으로 끌어 들이고 또 그 안에서 새롭게 구성하고 만들어 간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계속해서 아비투스를 습득하는 과정을 보면 안다. 


성 김대건 신부님이 실행하고 있는 예전 (영화 '탄생'의 한 장면)


사회적 몸, 아비투스

한 사람이 사회적 몸 안에 통합되는 것은 사호적 몸이 내 몸을 끌어 들여 이루어진다. 이것은 입문이며 입문은 운동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회적 질서는 행위자가 알고 있듯이 정신의 상태를 야기하는 몸의 상태가 되었을 때 연관된 생각과 감정을 소환하는 전반적 자세 안에 몸을 다시 자리잡게 하는 단순한 작용에 의해서 몸이 체계화를 시작한다. 

정치체는 나로 하여금 하나의 지향을 저장하고 있는 일련의 가촉적 움직임과 일상적 반복을 몰입하게 한다. 따라서 이 공동체에 입장함으로써 더디게 사람들은 아비투스를 습득하여 자연스럽게 토착민이 된다. 

한 사회에서 우리의 몸은 사회적 몸이 되어 감에 따라서 아비투스를 실천하고 또한 다른 공간에서도 자신이 가진 아비투스를 의례를 통해서 실천하려고 한다.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듯이, 무슬림은 하루에 몇 번씩 기도를 하고, 불교도들은 어디서나 부처를 생각하는 예식을 드린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 나오는 습관의 형성


0. 나오기


인간은 몸을 통해서 모든 것들을 한다. 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록 정신에 대한 해석이 교묘해진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몸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우리의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통해서 바라본 인간의 몸이 사회적 몸이 되어가는 방식과 자연스럽게 체득된 아비투스를 통해서 자신이 있는 어느곳에서나 예전적인 인간론을 실천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 신앙을 가지기까지 더딘학습은 바롱 예배와 같은 예전이었으며, 그 예전의 파괴 혹은 희미해짐이 곧 정체성과 이야기, 사회적 몸의 존재론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코로나 19이후에 예전적인 인간론의 붕괴가 가져오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스미스의 논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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