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_3장 우리는 살기 위해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모든 것이 나를 통해 생각한다. 그것들을 통해 내가 생각한다.
나는, 그것들을 생각하지만 음악적으로 회화적으로 비판도 삼단논법도
추론도 없이 생각한다고 말한다_부르디외
요즘은 잘 던지는 질문은 아니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보자. 과연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력 혹은 언어라고 이야기한다. 당연히 언어들의 연관관계인 '이야기'는 더 없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떻게 기록되고 어떻게 전해지는가?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은 미래에 바른 길을 가게 만들 수 있을까? 오늘 다룰 부분에서 제임스스미스는 이야기가 상상력을 만들고, 상상력은 욕망을 만들어내고 욕망은 같은 의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항상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아비투스를 만든다고 말한다. 매우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인지과학적인 측면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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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는 동물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일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세상을 의미 있는 것으로 지각하도록 우리의 감정적 지각 장치를 훈련시키는 것은 서사다.
이야기는 (중략) 분석적이기보다는 심미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지니며 지성보다는 상상력으로 더 잘 '이해'된다.
결국 서사narrative를 통해 의미를 받아들이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서사를 받아들이는 주체는 바로 몸corps이다.
우리의 정체성과 사랑이 예전적으로 빚어지는 까닭은 바로 예전이 한 정치체의 체현된 이야기를 구성하는 의례와 실천이기 때문이다.
예전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전망을 심어주며, 다른 의례적 형성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의례'라면, 그것은 예전이 행동과 태도를 발생시키는 상상력이라는 진원지 안으로 흡수된, 이야기로 가득 찬 실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몸
우리 몸은 말이나 개념, 명제의 논증적 중재 없이 "미학적" 차원에서 의미를 만든다.
의미를 만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근원과 기초에는 유기체-환경 상호 작용이라는 신체적 역학이 자리 잡고 있다.
느낌이 모든 의미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무엇이 중요한가는 세상에 대한 (신체적) 느낌에 의해 결정된다.
가소성의 관점에서 볼 때 신체와 지각의 관계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다.
언어학자 존슨, "지형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몸은 우리의 정신이다."
"마음은 떠오른다" (중략) 우리의 능력은 획득한 무언가로서의 '마음'이 된다.
우리의 몸이 의미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개념적 분석이 아니라 서사,
곧 은유와 미학적 차원이다.
은유란 무엇인가?
은유에는 뭔가 말할 수 없는 것, 말할 수는 없지만 '알아차릴 수 있는' 의미의 과잉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의미는 우리의 감각 운동적 경험으로부터 '일차적 은유'를 획득한다. 이는 미리 자리 잡고 있는 칸트적 '범주'가 아니다. 하나의 환경 혹은 여러 환경에 몰입하며 습득된다.
추상적 개념은 "감각 운동적 경험의 의미론과 추론 유형을 활용하는 (일차적 은유에서 발생하는) 개념적 은유에 의해 정의된다."
개념은 우리 경험에 내려앉은 순수한 형상과 같은 범주라기보다는 우리 경험을 정제해 낸 것에 더 가깝다.
개념에 앞서는 은유가 존재한다. 은유를 통해서 개념concept이 만들어진다.
예전-은유-개념의 관계는 어떠한가?
예전과 환경
심층적/미학적/은유적 차원에서 우리를 위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의미 가득한 예전은 위로부터 내려온 추상적 개념을 전달하기보다 우리의 신체성 안에서 우리를 제대로 만나고 우리가 뼛속에 지니고 있는 프락토그노시아(신체적 관점에서 세상과의 접촉 방식, 태도)를 확장시킬 것이다.
예전들은 우리 '환경'의 일부를 이룰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일차적 은유를 확장함으로써 우리를 개념적 은유에 익숙하게 만들고, 다시 은유는 우리의 배경으로 스며들어 우리가 세상을 지향하고 구성하는 방식을 빚어낼 것이다.
예전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기대의 지평'으로서 의미의 원천이 되며, 이는 말하자면 우리가 '예전 외부'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을 통제하고 제한한다.
이는 우리가 내리는 의식적 판단이 아니라 그 자체에 이미 평가를 담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일차적 지각이다.
예전-은유-개념의 나선형적 확장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깐 무엇인가가 먼저가 아니라 계속해서 같이 진행되는 부분이다.
예전(세상과 신체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의 확장 & (일차적) 은유의 의미 풍부 & (추상적) 개념의 풍부
상상력의 중요성
예전적 인간론의 핵심에는 욕망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상상력이 욕망보다 앞선다.
나는 어떤 백성이나 문화의 이야기를 들이마셔 왔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왕국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무의식적이고 자동화된 방식으로 그 왕국을 욕망하게 된다. 내가 그 정치체의 이야기에 몰입해 왔기 때문에 나는 어떤 백성의 아비투스 안으로 통합되며 그 아비투스가 내 안에 새겨진다. 예전적 동물은 상상의 산물을 먹고 사는 상상하는 동물이다.
시와 이야기, 은유와 서사는 우리의 몸에 공명하는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이야기 - 상상 - 욕망 - 아비투스(신체)'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순환적이다.
서사는 인간의 의미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서사에 대한 인지과학적 입장 (문화적 다원주의 vs 인지적 서사론)
문화적 다원주의에 대해서 알아보자.
문화적 다원주의의 전제, 정신에 관한 진화론적 이론
오늘날 우리가 지닌 '정신'의 근본적 형태는 "진화론적 적응의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
진화 심리학의 입장에서 모든 '설명'은 적응의 성공으로 환원된다.
'이야기하기 능력이 인간 종의 생존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크램닉의 비판, "가차없이 주제 중심적인" 무미건조한 형식주의
이야기가 마치 정보를 담는 그릇이나 정보의 통로일 뿐인 것처럼 취급
인지적 서사론
인지적 문학 비평의 관심, 허구가 작동하는 방식
'우리가 서사를 만들고 이해하는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 도구, 과정, 활동은 무엇인가?
인지적 서사론에서는 이야기와 소설, 소설가가 몸과 뇌로부터 세계-안에서-존재하는 특정한 방식을 부여받는 독자를 위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구체적인 방식에 관심을 기울인다.
인지적 서사론에서는 의미의 문학과 시를 의미의 독특한 양식 - 진리의 독특한 양식 - 으로 만드는 생물학적 능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생물학과 서사론의 교차점"
서사와 신체의 관계성에서 발생하는 의미
서사, 진리가 출현하는 영역
문화와 인지의 교류
이것은 이야기와 진리 중 하나를 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서사와 은유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진리의 독특한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나 시의 진리는 그 형식 안에, 그 운율과 박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독특한 정서 안에,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세계의 상호 작용과 반향 안에, 내가 직감 차원에서 '이해'하는 은유적 추론 안에 담겨 있다.
한 이야기의 결말은 '타당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암묵적 논리에 따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미학적 만남의 진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에로스적 이해를 지배하고 규정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흡수하는 진리다.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서사에서 출현하는 진리는 결국 문화와 연결된다.
아이폰과 우리의 인터페이스는, 우리를 성자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밀턴의 사탄을 더 닮도록 교묘하고도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훈련시키는 미세한 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폰을 통해서 전달되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장비와 상호 작용하는 방식, 작은 기계와의 친밀한 인터페이스에 의해 이뤄지는 상상력의 교묘한 교육 때문이다.
그런 경우 사용자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더라도 그 체제 안에 내재된 목적론적 (무)질서를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폰의 인터페이스가 만드는 무의식적 예전은
어떤 상상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아이폰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세상을 나에게 '가용한' 것,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소셜 미디어의 확산으로 모든 공간이 '상호 전시'의 공간이 되었다.
"시청자인 우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볼 만함이며 현대인의 가치는 보기라는 현상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 현상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논리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기술의 의례, 내가 우주의 중심인, 다른 사람들을 내 전시를 관람하는 관객으로만 대하고 관계를 맺는 사회적 상상을 강화시킨다.
"자의식은 목적론의 종말"을 맞게 된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집중하게 하는 자의식의 과잉은 고독에 빠지는 것을 방해한다. (텔로스의 상실
기독교 예배, 의도적으로 탈중심화시키는 실천으로서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불러내어 하나님의 삶 안으로 이끈다. 예배가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첫 자리의 바꿈인 동시에 초대,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찾으라는 초대다.
스미스와 지각의 성화
메를로퐁티의 어휘를 사용해보자면 갱신을 위해 행동하는 기독교적 행위자를 형성하려는 목표가 있을 때, 성향의 굴절을 위해서는 지각의 성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행동하도록 부르심받은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신체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지각을 빚어내는 것은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속해 이씀을 깨달은 세상을 우리가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대하 우리의 기분을 재조정하고, 따라서 다른 부르심에 의한 끌임을 느끼고자 한다면,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독교적 상상력이다.
상황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또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 경험을 구성하는 신체적 배경에 의해 빚어지기 때문에, 기독교적 행동을 위해서는 육화된 의미라는 신체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지각의 성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행위자가 되어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욕망을 체현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상상력이 하나님에 의해 징집되어야 한다.
우리의 지성을 설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상상력이 모든 피조물을 회복시키고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에 사로잡혀야 한다
우리는 감동받아야 한다
민네이션, 생각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필요한데, 대부분의 개념은 체험을 축적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축적은 하나의 경험의 집으로 모아지는데, 이러한 경험이 쌓여서 의미를 만들어내면 하나의 습관이 되고 또한 편향이 되거나 고집이 되기도 한다.
제임스 스미스는 아비투스의 개념을 삐에르 부리디외에게 가져오고, 몸의 현상학으로부터 퐁티의 논의를 빌려온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몸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지각한다. 그리고 몸의 인식만큼이 정신의 인식이다. 퐁티는 우리가 산을 보면 이미 그 산 위에 시선이 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이 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몸의 체험들이 공동체적으로 공유되면서 하나의 행동이나 현상을 같이 경험하는 사람들이 같은 아비투스를 가지게 된다.
스미스가 말하는 예전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체험과 경험의 개념화는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는 인도하고 이러한 상상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텔로스라고 하는 삶의 목적, 좋은 삶을 향한 지향은 우리 몸에 이미 각인되어 있다. 우리가회복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원래 추구하던 것들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상상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면서 수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그 이야기에 따라서 수 많은 상상을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과 같은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들으면 이 체제 자체는 이미 악함을 담고 있다. 그럼 이것도 어떻게 보면 상상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깐 상상력으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의 삶과 목적에 맞는 상상력으로 우리 몸이 들어 있는 이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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