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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26. 2022

에로스와 예배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_제임스스미스_1장 에로스적 이해

0. 들어가기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시대마다 정의가 달라지고, 정당성이 달라졌다. 교회가 한창 성장하던 시기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맑은 정신에 근면한 사람으로 새벽기도를 다니며 새벽을 열고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던 리더의 모습이었다. 경제발전이 어느정도 안정되면서 양극화가 심해지는 시기에 동일하게 나누어진 교회들의 양극화는 대형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과 개척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으로 나누어 졌고, 대형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들은 성공한 삶의 표본처럼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에 미래의 영생까지 누리는 클라스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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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에 시대는 진보와 보수를 왔다갔다하면서 문제들은 곪아터지고 사람들은 정신이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예배'에 몰두하면서 삶과 종교를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해 갔다. 그리고 지금은 밖에 내어다 버려도 아무도 찾지 않는 것처럼 교회의 위상은 땅으로 추락했다. 간혹 여전히 성공했으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맘몸'을 동시에 섬겨도 이 세상에서 잘살고 성공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반대급부도 있다. 하나님과 맘몸을 동시에 섬기지 않으면 결국 이 세상이 지옥이 되는 그런 세상 말이다.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할까?

사실 내가 자라온 토양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매우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은 그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도전과 어떤 노력을 했을까를 찾아보게 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이러는 사이에 오늘도 공부하는 제임스 스미스를 만난다. 제임스 스미스는 미국 칼빈대학교의 철학과 신학을 하는 교수이지만 네덜란드의 세계관주의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독특한 대안을 내어 놓는다. 프랑스의 메를로 퐁티와 같은 몸의 현상학자나 부르디외와 같은 사회학자들의 이론을 가지고 와서 '예배하는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습관'의 형성을 부각시킨다. 다시 예배로 돌아가서 회복하자는 맞는데, 그 예배를 대하는 태도 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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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affect이란 움직임을 향해, 생각과 확장을 향해 우리를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힘-관계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는 와중에도 우리를 붙잡아 둘 수도 있고, 도무지 다루기 어려운 세상에 압도된 채로 우리를 내버려 둘 수도 있는 그런 힘-의식적인 앎 이면에 있거나 그것과 나란히 존재하거나 대개는 ㅡ껏과 전혀 다른 체감적 힘, 감정을 넘어서고자 하는 생명의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동은 몸이 세상의 완고함과 주기, 그것의 유인만큼이나 거부에도 지속적으로 몰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끈질긴 증거다_정동이론



1. 이야기를 통한 인식


스미스는 여기서 내가 행하는 바가 내가 생각하는 바의 산물이라고 전제하는 ‘주지주의적’ 행동 이론을 반박한다. 주지주의적 행동 이론의 근본적 문제는 ‘보기’와 ‘평가하기’를 두 개의 분리된 과정이라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먼저 ‘사실’을 확인하고, 적용될 수 있는 관련된 ‘도덕적’ 원리를 숙고한 다음, 선택하여 그 결과로 행동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사실 지각과 평가는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나는 어떤 장면을 받아들이자마자 그것에 관해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에 근거해 그 장면을 판단한다. 보기와 평가하기는 두 개의 분리된 과정이 아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정서와 감정은 내가 그 상황을 특정한 종류의 상황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배경’의 일부다. 맥길크리스트는 정서를 탄순한 개별적 감정이 아니라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 세상을 향한 입장 혹은 성향 -궁극적으로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즉, 관점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감정적 지각 장치는 ‘서사’에 의해 ‘훈련’ 받는다. 나는 도심의 공교육 상황에 관한 이야기와 서사, 그림을 암묵적 정서적으로 흡수하고, 나 자신에게 빈곤이나 인종, 세속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운다.



스미스의 궁극적 결론은, 기독교적 행동을 위한 교육을 위해서는 무의식 형성에,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빚어내는 감정을 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훈련이 서사를 통해서 일어난다면, 기독교적 행동을 위한 교육을 위해서는 기독교적 이야기에 참여하게끔 틀을 잡은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는 예배라는 말을 그러한 서사적 실천을 가리키는 약어로 사용한다. 우리는 특정 사건(예를 들어, 배우자의 행동)을 그저 그 자체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연관된 원형과 비슷한 것으로 바라보며, 이것이 우리의 감정적 반응을 좌우한다.


이야기 하면서 사람은 주체가 되어 간다


이야기는 리쾨르에 의하면 주체가 되는 과정이다.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이야기의 인물과 사건과 배경에서 '타자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과정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에서, 다시 우리의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정체성은 더욱 굳건해지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서도 특별하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설교가 하나의 이야기라는 단편적인 이해가 아니라 '예배의 과정'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예배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끝나고 돌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형성'되는 교육의 의미가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어떻게 감정이 만들어지고 또 감정이 해소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감정사회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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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욕망의 지리학: 본능과 지성 사이


영성 형성과 예전적 실천에 관한 역사적 기독교의 지혜 속에는 이야기와 몸, 상상력 사이의 운동미학적 연결성이 암시되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단순히 역사적 자료에서 이를 발굴해 내기보다는 메를로퐁티의 체현의 현상학을 논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육화된, 성례전적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메를로퐁티의 기획은 “사물 그 자체”로 돌아가라는 후설의 현상학적 공리로부터 출발한다. 목표는 ‘객체’와 ‘주체’, ‘사상’으로 이뤄진 단정하고 깔끔한 세계를 만들고서 이런 것들을 ‘세계’라고 착각하기보다는 우리의 혼란스럽고 복잡한 세계-내-존재를 현상학적으로 설명해 내는 것이다.


퐁티는 “사물 그 자체로 돌아간다는 것은, 지식보다 앞서며 지식이 언제나 말하는 세계, 마치 숲이나 평원, 강이 무엇인지를 미리 아는 우리에게는 지리가 시골 지역에 대한 기호-언어에 불과한 것처럼 그것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과학적 체계화가 추상적이며 파생적인 기호-언어에 불과한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조언한다. 지각은 서툴고 경솔한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무언가이며, 판단과 분석,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다. 퐁티는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바가 아니라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바”라고 경고한다. 메를로퐁티는 우리에게는 몸과 정신의 이분법에 사로잡히지 않고, 우리가 ‘사이에 있음’과 이 ‘사이에 있음’이 가진, 의식보다 앞선 독특한 지식을 제대로 설명해 내는 인간 모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저 ‘주체’가 아니며, 단순히 ‘객체’도 아니다. 우리는 몸을 입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메를로퐁티는 이 풍성함과 복잡성을 존중하기 위해 “세계-내-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신조어를 채택한다. 환경 안에 자리한 체현된 존재로서 지식보다 앞서며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지향성을 통해 환경을 헤쳐 나가는 행위자로써 세계-내-존재. 우리가 세계-내-존재라는 것은 “의식보다 앞선 지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의식보다 앞선 지식’으로 ‘아는’ 것은 바로 이 ‘습관화된 몸’이다.이것이 삶의 방식을 위한 공간이다. 삶은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세계 속에 나를 인식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나의 몸, 나의 지평


우리의 몸은 단순히 우리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 즉 “우리의 모든 경험 안에 잠재해 있으며 그 자체로 언제나 현전하며 모든 결정하는 생각보다 앞선 지평”이다. 여기서 메를로퐁티의 묘사는 우리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아찔할 정도로 다채로운 감각 인상을 하나의 ‘세상’으로 설계하게 만드는 ‘배경’에 비추어 우리 경험이 ‘구성’된다고 보는,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을 전제한다. 내 경험 몰입을 통해 나에게 찾아오는 ‘주어진’ 직관적 자료의 유입은 나의 ‘지평’이라는 맥락 안에서 무언가로 ‘결합’된다.


이러한 배경 지평(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몸)은 오랜 시간에 걸쳐 습득된 것이다. 나의 지평은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나의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습관화와 성향, 경향의 축적을 나타낸다. 나의 지평은 사회적이며 공유될 것일 수밖에 없지만, 이 논의에서 메를로퐁티의 기여는 우리 경험이 몸 안에서, 몸에 의해 수행되는 무언가라는 점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스미스는 이러한 퐁티의 견해를 가지고 우리의 몸이 수행하는 활동들은 계속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고 주장한다. 몸은 그 자체로 태도를 보여준다. 마음이 표현되지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이전에 몸은 움직이고 또 반응한다. 나의 몸은 나의 지평이다.


퐁티의 현상학을 잘 설명하는 폴 세잔의 그림_보는 순간 동기를 만들어내는 그림


4. 에로스와 예배


결국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몸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순간, 우리의 예배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곧 지성적인 부분에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허울만 남게 되었다. 깨닫는 것은 실천으로 옮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깨다는 것은 곧 잃어버리기도 하고 우리에게 습관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곧 유용성을 잃어 버린다. 몸이라는 에로스를 예배와 연결하지 못하는 순간, 로고스라는 말씀으로 아는 것만 남아서 실천이 사라지는 것이다. 예배시간에 졸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배시간에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만 있도록 셋팅된 예배는 우리의 예배의 핵심인 몸을 잃어 버리고 오직 머리속의 뉴런세포만 깨어서 살아있는 것 마냥 여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에로스를 부활시켜서 예배와 연결해야 한다.


몸이 말해주는 예배는 단순히 찬양을 부르고, 말씀을 들으면서 적고 그것을 기도로 읊조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예배의 순서들이 언젠가 성의를 잃어 버리고, 우리에게 듣기 싫은 설교를 듣고 버텨야만 하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를 회복시키자라는 기치 아래 다시 예배의 그 지루함 속으로 사람들을 끌고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삶이 묻어 있다. 예배는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의 몸이며, 마치 사랑을 할 때 우리의 몸의 변화와 같이 예배에서 우리 몸의 움직임과 태도를 다시 셋팅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몸의 변화이기도 한 것이다


0. 나오기


지칠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매번 무의미하고 건조한 예배에 목사들의 '설교'에 의존하는 것도 말이다. 같은 목사의 설교를 10년 이상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목사가 이상한게 아니라, 그 성도가 이상한게 아니라 이 과정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스미스의 도전은 일견 맞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퐁티와 부르디외가 극복하지 못한 지점과 또한 예상하지 못한 효과들도 생각했던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현상학'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현상에서 우리의 눈에, 의식에 다가오는 것들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생각하고 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과거와 미래를 그리는 능력은 멀리하게 되지 않나? 소위 말하는 관념론이나 로고스중심주의가 가진 장점들도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교회에서는 스미스의 논의가 '급진정통주의'라는 미명하에 예배로 복귀라는 보수적인 이야기로 들린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목사들이 스미스의 책을 읽고 '예배로 돌아가자'라는 기치를 걸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적용하는가가 중요하겠지만, 이성의 한계 혹은 감성의 한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점에서 멈추게 되지 않을까? 섭리를 자유의지로 치환하거나 로고스를 에로스에 포섭시키는 것들은 방식자체로는 특이하고 새롭지만 우리의 삶에 정말로 그게 중요했던 걸까?라는 생각도 든다. 소위 'performaty'라는 개념이 있다. 수행하게 되는 과정에서 나의 정체성과 습관이 형성된다는 패미니즘의 논리이다.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정체성 말이다. 스미스는 어떻게 보면 그 이야기를 돌려서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수행성이 가진 '진보'의 개념은 '정통'과는 거리가 먼데도 그것이 오히려 급진정통주의라고 불리는게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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