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스미스 <왕을 기다리며>, 서론 예전적 정치: 공공신학 개혁하기
오늘부터 제임스 스미스 <왕을 기다리며>를 읽는다. 특히 서론에서는 예전적 정치라는 것을 다시 거론한다. 이전에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라는 책에서는 우리가 예배하는 인간이며, 인간은 지성적인 것 이전에 감정적인 부분에서 이미 형성된 것들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존재이고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인간은 기존에 합리적인 행위자나 혹은 생각하는 인간이기 이전에 '예배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를 위해서 이전의 책에서는 삐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과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을 가지고 왔다.
이번 책에서는 흡사 아브라함 카이퍼의 '왕을 위하여'라는 책 '프로레게'를 그대로 가져온 듯한 인상을 준다.그래서 책 이름은 '왕을 기다리며'이고 여기서는 예배하는 인간이 정치적인 인간과 만났을 때 어떻게 정치가 우리의 예배하는 인간이라는 전제를 실천하는지를 '형성적'관점에서 보여준다. 소위 '정치신학'에서 예전적인간이 어떻게 정치를 신학과 연결시키면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신학'의 관점에서 매킨타이어와 밀뱅크를 가지고 오면서 존롤스의 자유주의와 대립시킨다. 이 지점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어떻게 해서 '불가지론'자로 남길 원하면서 궁극적인 '목적'을 상실하는지를 모여준다. 그럼 과연 이 책에서는 무엇이 주제이고 어떤 것을 중심으로 보는지를 생각해보자.
신학이 복음적이려면 반드시 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적 질문을 배재해보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온전히 선포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죄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곳에서 그들을 노예 상태로 내러벼 두게 될 것이다
_올리버 오도노반 '열방의 소망'
https://brunch.co.kr/@minnation/3252
세계 제3차대전으로 인하여 모든것이 무너져 버린 지구. 인간은 원시적인 수단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고,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는 사람들간의 통신수단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베들레헴이 이끄는 홀니스트란 무리는 자신의 무리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각 부락 사이에 접촉을 막으면서 모든이들을 통제하려 하기 시작한다. 원래는 홀니스트의 일원으로 그들과 뜻을 같이 하였으나, 홀니스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케빈 코스트너는 낡은 우편용차를 발견하고 포스트맨이 된다. 처음엔 위장과 연명을 위해 장난삼아 했던 것이지만, 타지역 사람들간의 소식통으로서 서로간의 소식에 웃고, 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계속해서 이일을 하게 된다. 한때 사랑했던 여자의 남편또한 베들레헴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편지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고 베들레헴에 대항할 작전을 세우는데_영화 포스트맨의 줄거리
포스트맨이 던지는 이슈
연대에 관심이 없었던 주인공이 집배원 제복을 입고 공동체적(국가주의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정치적인 것은 준궁극적인 것이 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자체로 공민 종교(종교성+국가정체성)가 되려고 한다"
곧, 정치적인 것은 종교적 믿음과 연관되며, 그러한 믿음이 개인의 정체성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예배에는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으며, 우리의 정치에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정치적인 것과 예전의 관계, "정치적인 것은 우리에게 예전적인 것을 고찰하기를 요구한다."
기독교의 예전은 어떻게 공공신학(또는 정치신학)과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결국 스미스는 '포스트맨'에서 보여주는 결과를 보여주면서 정치적인 것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적 우화는 연대를 위한 인간의 깊은 열방이 도착한 지점은 결국 종교화된 정치적 입장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금적인 것은 종교적인 것인데, 종교적인 것은 반드시 정치적인 것이다. 이 경계는 불분명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정교분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치와 종교는 완전 분리되어 있고, 경제와 종교도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예배하는 인간에게서 과연 정치, 경제, 사회가 분리되어서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이런 고민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포스트맨을 통해서 보여준다.
제임스 스미스의 목표
제임스 스미스는 이 책 '왕을 기다리며'에서 공공신학을 개혁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이전까지 '정치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주의가 어떻게 정치와 종교를 연결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생각해보면 개혁주의든 아니든 기독교에서 정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정당정치' 혹은 '대의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절차와 형식 속에서 구현된 정치의 과정을 옹호함으로써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정당성', '합리성', '정의감'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스미스는 이것을 비판하면서 이것 이전에 이미 정치는 '예전적으로 구현된 종교'라는 것을 드러낸다.
1) 개혁주의 공공신학의 개혁 : 개혁주의 공공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영역'에 대한 문제이다. 영역과 공간의 문제로 정치를 바라보면 결국 '점령'이라는 방식을 쓸 수 밖에 없는데 스미스는 이것을 비판하고 있다.
2) 공교회적 관점에서 대안적 패러다임 제시 : 공교회는 기존 정치신학이 가지고 있는 '공간화'와 '합리화'를 넘어서서 공동체 안에서 예배한 인간으로서의 상상력을 회복해야 한다.
기존 정치신학이 지닌 두 가지 한계
공간과 시간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무엇인가를 점령한다는 것은 공간과 영역의 문제이다. 스미스는 어거스틴의 신국론을 가지고 오면서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이 서로 겹쳐 있다고 보는 '공간적 관점'을 비파한다. 공간이 중심이 되면 누군가를 이것을 가지고 싸워야하고 정복해야 하는데, 스미스는 이런 관점을 비판하면서 이것이 가진 한계는 '순간'적인 것들이 공간화로 안착되면서 바꿀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관점에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1) 기독교와 정치에 대한 '공간화된' 접근 (경계와 대립) : 우리는 기독교와 정치를 대체로 공간화된 관점에서 바라본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라는 영역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어떻게 두 왕국의 지배권 사이에서 움직일 것인가, 어떻게 자유주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대안적 폴리스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2) 합리적 행위자를 전제 (신념에 기반한 의식적 숙고에 따라 행동하는 행위자) : 우리는 시민들이란 경제학자들이 상상하기 좋아하는 합리적 행위자 신념과 사상에 근거한 의식적 숙고의 결과에 따라 행동하는 의사결정 기계들이라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써 '정치적인 것'은 우리가 사상과 신념을 교환하는
'공간'을 다스리는 규칙과 절차로 환원된다
정치적인 것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정치적인 것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삶의 방식이다."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정치는 결국 일상과 연결된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을 공간화와 합리화로 환원할 때 정치적인 것의 본질인 형성, 곧 하나의 텔로스를 지향하며 살아가기 위한 습관과 실천을 요구를 망각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신학은 정치적 삶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습관과 욕망의 형성과 직결되어 있는지 주의 깊게 고찰하는 데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정치는 형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우리를 형성한다.
'정치적인 것'이 형성의 문제라면?
"정치가 습관을 형성한다면 (중략) 이는 우리가 예전의 문제에 서 있다는 뜻이다."
(우리를 빚어갈 방향성인) 기독교의 텔로스는 곧 종말론, 부활하신 왕과 함께 도래할 나라에 대한 소망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개혁주의 공공신학의 개혁이 필요하다.
스미스의 공공신학, "우리가 믿는 바를 믿지 않고, 우리가 사랑하는 바를 사랑하지 않고, 우리가 기다리는 바를 소망하지 않는 이웃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따라서 "'정치'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국가나 다스림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 총체성의 관점에서 - '사회'라는 폴리스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다."
국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사회'와 '폴리스'의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첫번째, 예전의 관점에서 정치적인 것 바라보기 (예전으로서의 정치)
"시민이 생각하는 존재나 믿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라면?" 그래서 정치는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대안으로 나왔다면 우리의 사고는 어떻게 바뀌는가?
예전적 인간을 시민 개념으로 확장하게 되면 시민들은 정치적인 참여를 통해서 '텔로스'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형성되어 간다.
두번째, '종교적인' 것의 관점에서 국가 바라보기 (종교로서의 국가)
"예전이라는 렌즈는 (법과 제도를 넘어) 우리의 공동의 삶과 얽혀 있는 의례"이다.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절차와 형식들은 일종의 종교적인 것을 형성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국가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 안에 국가의 신화를 심어 주며 우리로 하여금 선에 대한 특정 전망을 향한 무의식적 충성을 습관화하게 하는 의식과 예전 - 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라고 하면서 공동체의 습관에 주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번째, '정치적인 것'의 관점에서 교회 바라보기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교회)
"예전이라는 렌즈가 '국가' 종교적 측면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똑같이 교회의 정치적 성격, 즉 그리스도의 몸이 일종의 상상력의 공화국, 하늘에 시민권을 두고 있는 이들로 이뤄진 정치체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천을 우리 안에 사회적 상상을 심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라는 텔로스를 지향하게 만든다."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정치가 달라질 수 있는지 상상하도록 초대하는 정치체이며 (중략) 우리 이웃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닌 이야기가 되라고 보냄받는다."
국가가 종교적이면서 교회가 정치적이다
1) 우리는 정치적인 것이 지상 도성에서 이뤄지는 정치의 특수 사례와 동의어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2)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 기관과 실천이 장차 올 왕국을 되울릴 수 있기를 바로고 기도해야할 뿐 아니라 사실은 그것이 이미 일어났음을 인식해야 한다.
3) 그럼에도 후기 근대의 자유 민주주의-오늘날 지상 도성의 기본 형태-는 궁극적으로 불완전하고 무질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무질서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4) 우리는 예전이라는 렌즈로 우리의 정치적-공적 삶을 바라보는 작업을 통해 우리 자신의 동화와 주의를 기울이고, 더 나아가 지상 도성에 굴복하는 원인을 진단해보아야 한다.
제임스 스미스는 기본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옹호한다. 따라서 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죄를 지었고 타락했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땅에서는 우리는 '이방인'이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미스의 논리는 정치에서도 동일하게 우리의 시민권이 이방인으로서 정치의 기본적인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 점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연결되는 지점도 발생하고 또한 멀어지는 부분도 발생하게 된다. 아무튼 핵심은 '예배하는 인간'이 '정치하는 인간'과 만나는 것은 결국 비교가 없어지고 예배하는 인간이 정치를 한다는 것, 정치하는 인간이 예배를 한다는 것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글쎄 아직은 거리를 좀 두고 다음 장들로 넘어가보자. 그럼에도 '정치신학'의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과정으로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지, 교회와 신앙, 종교는 어떻게 여기서 개입하거나 주도하는지를 계속해서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