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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19. 2017

라캉과 승화

백상현* 라캉의 인간학

강의 에센스


- 주이상스에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실패하여 대상을 만나면 감정이 생긴다.

- 그 감정은 슬픔, 분노, 우울함 등이 된다. 이러한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 그러한 감정이 왜 생겼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목적이다.

- 주체와 대상 그리고 큰 사물과 욕망의 관계망 속에서 정신분석학은 시작한다.

- 주이상스와 주체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감정의 동요는 커진다.

- 정동의 심리학에서 볼 때 실제계를 적절하게 상징계가 표현해주지 못할 때 분노가 일어난다.

- 자신의 감정을 동요하는 것은 실제계에서 실패한 무의식이 상징계와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의식이다.

- 무의식에 쌓여 있는 이렇나 불만족은 항상 언어적인 빈약함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 자신의 표현, 존재감, 이해를 제대로 현실에서 충족받지 못했을 때 무의식속으로 들어가서 왜곡된 감정, 정동을 일으킨다.

- 무의식 속에 들어간 이상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화를 내기도하는 것이다,

- 이미지는 생각을 정지시키기 때문에 포착되는 순간 과거의 것이 된다. 이미지는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바깥으로 나가는 이미지'는 현재의 실제계가 가지고 있는 운동들을 정지시켜버림으로써 기존의 흐름을 정지 시킨다. 한 마디로 과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 언어 즉 상징계는 항상 해석이 발생하는 영역이면서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언어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사람을 움직이고, 마음을 꺼내 놓게 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만든다. 라캉에게는 이런 의미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분석하고, 이 두가지를 연결하는 것은 바로 '언어' 였던 것이다.

- 절대적인 쾌락이라는 의미에서 '도덕체계'의 최고점, '욕망체계'의 최고점은 같은 것이다.

- 진리는 자유를 선물한다. 라캉식으로 하면 진리는 상식을 가로지를 수 있는 진리이다. 현실을 정지시키고, 타자의 욕망을 파괴하고 인간본연의 자리로 회귀시키는 그런 진리이다





20170615_철학아카데미

라캉의 인간학_백상현 교수

8번째 강의_대상과 큰 사물


들어가기


- 라캉의 8번째 강의에서는 대상과 큰 사물을 다룬다.

- 큰 사물을 우회하기 위해서 대상을 만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 라캉에게서 정동affect라는 것은 감정 혹은 파토스라고 할 수 있다.

- 정동의 심리학, 어머니에 관한 클라인적 신화, 칸트적 일화들, 승화와 도착, 수집가 자크 프레베르의 우화' 등이 이번 8번째 강의의 주요 개념들이다.



정동의 심리학, La psychologie des affects


- 이번 강의에서 라캉은 정동의 심리적 현상에 대한 논평으로부터 큰 사물과 승화의 절차에 대한 탐사를 시작하고 있다.

- 그에 따르면 인간의 감정이란 모두 속임수이다.

- 슬픔이나 분노, 기쁨과 만족 따위의 감정들은 그것이 기원한다고 가정되는 원인과는 전혀 다른 장소로부터 오는 것이다.

- 정동의 기원은 큰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사물은 인간의 감정을 왜곡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숨긴다.

- 예를 들어, 강력한 주이상스의 장소이기도 한 큰 사물에 주체가 가까이 접근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쾌락이 아닌 불안이다.

- 반대로 큰 사물과 멀리 떨어지게 된 주체는 안정과 만족의 감정을 얻는다.

- 라캉이 '정동의 심리학'이라고 표현하는 이같은 감정의 논리학은 정신분석 임상이 단순한 감정치료의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안될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해 준다.

-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그 너머의 충동, 즉 큰 사물의 자리인 것이다.



어머니에 관한 클라인적 신화, Le mythe kleinien de la mere


- 물론 큰 사물의 개념이 라캉학파의 전유물은 아니다.

- 멜라니 클라인의 학파에서도 큰 사물은 중요한 개념이다.

- 그러나 '어머니에 관한 클라인 학파의 신화'는 큰 사물에 대한 상당한 오해를 야기하게 된다.

- 이어지는 강의에서 라캉은 클라인학파의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큰 사물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다.

- 큰 사물은 마치 충만한 어머니의 이미지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클라인학파의 관점은 그것을 상상적 대상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 큰 사물은 사실에 있어서 완결된 이미지가 아닌 파편적 충동들의 장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 특히 이에 대한 논증을 위해 라캉은 미술치료를 비판을 하고 있는데, 오늘날 국내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예술치료의 관행들이 가진 모순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강의라고 할 수 있다.

- 멜라닌 클라인은 '아버지의 이름' 아니라 '어머니의 신체'로 부터 욕망이 생긴다고 말하는데, 이 부분에서 라캉과 다르다.

- 라캉은 멜라닌 클라인을 완전히 부인하면서 원초적인 욕망의 대상인 '큰사물이 사실은 상상적 대상이지 주이상스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 엘리샤프나 엠리의 논문들은 클라인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으나 이것을 라캉은 비판한다.

- 어머니의 이미지'는 상상적인 대상이지 '큰 사물'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클라인은 이것을 동일시 여김으로써 이미지의 회복만 가져올 뿐이지 무의식 안의 충동적인 자아는 회복되지 않고, 안정되지 않는다.

- 강박증자는 '어머니의 신화화'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화로운 어머니나 아름다운 어머니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강박증을 행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 이미지는 생각을 정지시키지, 진행시키지는 않는다. 무의식의 드러나는 장소는 이미지가 아니라 텍스트이다.

- 멜라니 클라인은 자아의 파편을 모으는 작업을 '예술'적인 방식을 통해서 드러낼려고 한다. 그러나 예술은 창조의 영역이지 과거를 융합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다.

- 만약 예술을 정신분석학에 사용하려면 주이상스를 반대적으로 표현해주는 대상들의 파편을 가지고 자신이 반대로 두려워하는 것 혹은 피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라캉과 같은 관점이 될 수 있다.

- 하지만 멜라니 클라인의 접근 방법은 치유의 방법론이 아님에도 치유의 방법으로 이야기 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칸트적 일화들, Les apologues kantien


- 클라인 학파에 대한 비판은 이어서 라캉은 '칸트의 두 가지 일화'를 강의에 도입한다.

- 이것 역시 큰 사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또다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상요되는 칸트의 일화는 '단두대의 일화'와 '위증의 일화'이다.

- 이를 통해 라캉은 큰 사물에 접근하는 새로운 윤리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논증하려고 한다.

- 이 두가지 일화는 주이상사의 무게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사회적 금지 혹은 억압을 넘어서는 어떤 행동들, 선택들은 큰 사물의 무게를 보여주는 것이다.

- 만일 인류의 대부분의 윤리학이 현실 원칙에 근거하여 큰 사물을 억압한느 방향으로 나아가고있었다면, 칸트의 이 일화들을 뒤집어 보여줌을로써 새로운 도덕 원칙이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한다.

- 위반의 도덕학이 바로 그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eq6YIQwCNI&t=999s


승화와 도착, Sublimation et perversioin


- 칸트가 이야기하는 일화들을 어기는 사람은 없는가? 분명히 윤리적인 도덕체계를 어기고 단두대로, 위증으로 나가가는 사람들이 있다.

- 이런 사람들이 바로 승화의 실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이 승화의 의미이다.

-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날려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 승화의 성도착이 바로 그것이다.

- 칸트의 일화 속에서 단두대와 폭군의 위증 강요의 위협은 상징적 법의 역할을 하면서 큰 사물로부터 주체를 멀리 도망가게 만드는 현실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 그러나 단두대에도 불구하고, 폭군의 위협에도 부룩하고 죽음충동에 접근하는 주체가 발견되는 것은 궁정풍 사랑의 승화와 성도착증자의 범죄 행위에서이다. 칸트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이것이다.

- 이둘 모두 현실원칙을 위반하는 특수한 절차이고, 라캉은 바로 여기서 큰 사물에 접근한느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것이다.

- 이후 라캉의 본격적으로 '장치화된 위반'의 윤리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 금지를 넘어서서 큰 사물에 넘어서는 주체들의 특징은 욕망의 대상을 승격시키는, 승화의 단계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 욕망의 대상을 큰 사물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프로이트, 승화


- 프로이트에게서 승화라는 것은 금지된 욕망의 대상을 '허용된 대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 오히려 큰 사물을 산물로 대체하는 것이 프로이트라면, 라캉은 산물을 큰 사물로 대체하는 것이다.

- 프로이트에게 승화는 '억압이 없는 만족'이라고 표현하는데 라캉은 이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 '허용된 대상'이라는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허용되었다는 의미에서 억압의 그물이 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다른 이들의 인정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사실은 '타자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승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 라캉에게는 당연히 승화라는 것은 '상징계'의 틀 안에 갖혀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반의 윤리학, 금지의 윤리학은 진정으로 상징계 혹은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마주하는 다시 이야기하면 주이상스에 도착하는 방식인 승화는 바로 위반으로 가능하다.

- 그러한 위반은 허용된'과 같은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들이 아닌 것이다.


수집가 자크 프레베르의 우화, Apologue de Jaques Prevert collectionneur


- 프레베르의 성냥곽' 일화는 필자가 보기에 승화가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현대 미술의 '공백 지향성'을 설명해 주는 뛰어난 사례 제시이기도 하다.

- 프레베르는 라캉의 친구인데 성냥곽을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한종류의 성냥곽만 수집하는 것이다.

- 수집된 성냥곽은 유용성도 없고 유형성도 없는 똑같은 배치를 연속적으로 해 놓은 것뿐인것이다. 라캉은 여기서 승화의 암시를 하는 것으로 8번째 강의를 마무리 한다.

- 똑같은 배치는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데아의 유형의 승화단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 미술 비평을 연구하는 독자가 주목해 볼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 이를 현대미술에 적용해 보면 앤디워홀과 같은 작품들은 '끝없는 반복'이다. 사물의 의미나 유용성이 아니라 끝없는 배치를 통해서 '산물'로 돌아오는 것이다.

- 앤디워홀은 실크스크린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반복되고 있는데 반복되지 않는 것을 등장하는 것이다. 실크스크린은 물감의 양이 점점 줄어 들기 때문에 똑같이 찍어내려고 하지만 사실은 똑같이 찍어낼 수 없다.

- 앤디워홀이 찾고 싶었던 것은 '공집합' 혹은 '균열'이 생기는 지점인 '반복이 불가능한 지점'을 찾는 것이다.

- 질서의 부재, 균열, 공백이 앤디워홀의 작품에서 나오는 것이다.

- 기표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라캉이 말하는 사물의 장소, 페티시의 장소, 즉 공백의 장소인 것이다.

- 바로 아무것도 없는 장소, 아무것도 없는 존재하지 않은 곳이 바로 주이상스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라캉과 앤디워홀은 같은 방법론에 있다.

- 주이상스가 사라져 버리면 인간은 처음에는 우울해하다가 결국에는 새로운 주이상스, 서사적인 욕망을 만들어 낸다.

- 미니멀리즘도 큰 사물의 영역까지 끌어 당기는, 바디우식으로 하면 '사건의 횡단'하는 과정을 통해서 공백으로 가는 것이다.

- 이렇게 동일한 작업을 라캉은 프레베르의 성냥곽'의 일화에서 '승화'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정동의 심리학, 심화


- 인간의 감정, 정념 또는 정동이란 무엇일까?

- 이번 강의의 도입부에서 라깡은 먼저 감정의 문제를 제기한다.

- 정신분석을 비롯한 다른 모든 정신-심리 치료의 임상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증상들은 모두 환자의 감정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 쉽게 말해서, 환자가 정신병원이나 정신분석 상담소를 찾아는 이유 중 십중 팔구는 자신의 감정들에 관한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서이다.

- 환자들의 일반적인 호소는 다음과 같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고통받거나, 갑작스런 우울의 감정으로 일상을 이어나가기가 힘겹다.

- 또는 우울과 조증의 극단적 반복 속에서 대인관계에 심각한 장애를 겪는다. 특정 상황이나 대상에 공포를 느끼거나, 분노조절 장애 속에서 자신과 타인의 삶에 상처를 입는다.

- 이와 같은 극단적 감정 장애의 경우가 아닐지라도 증오의 감정이나 이해 불가능한 애증의 감정으로 특정 타인과의 삶이 고통 속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 이들 증상의 나열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은 알게되는 것은 정신치료라는 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일종의 감정치료와 같은 것에 다름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 오는날 한국사회에서 분노조절 장애나 우울증 치료 등등에 도입되는 임상의 양상들 역시 바로 이러한 감정 장애에 대한 치료라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라캉은 세미나의 시작에서부터 단호하게 감정치료의 모순들을 지적하며 시작한다.

- 감정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실체도, 보편성도 없다는 것이다.



욕망, 감정


- 우리의 욕망은 서사를 통해서 일어난다고 세미나 11일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 서사는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일어나는 머릿속에서 들뢰즈에 의하면 기표-이미지가 '운동-이미지'가 될 때 욕망이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 따라서 새로운 욕망은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 우울증은 욕망과 마주해 버리거나 대상이 소멸해 버렸을 때이다.

- 세대간의 차이는 바로 이러한 욕망과 관련이 있다. 기성세대 혹은 기득권의 서사는 다음세대에거는 맞지 않는다.

- 오히려 말을 하는 것이 욕망의 차이를 만들거나, 욕망의 실패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 라캉의 인간학에서는 욕망의 서사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 누군가 욕망을 상실했을 때 기다림과 듣는 준비를 하는 것 만으로도 욕망의 서사는 현상학적 의식의 지향성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이미지


- 마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그 당시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그럼 어떻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나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미지에 포착되고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미지가 붕괴되자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 진정한 기적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핍박을 죽었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다시 사랑하는 것이다.

- 부활 후의 예수님은 어떻게 이들이 다시 사랑하도록 했겠는가?

- 예수님은 부활 후에 예수님을 만지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내 말을 믿으라고 했다.

- 부활 후의 예수님은 자신을 이미지에 메이지 않게 했고, 언어 속에서 흘러가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게 해 주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다시 육신이 말씀이 되신 것이다.

- 우리는 그렇게 처음에는 이미지에 포착되지만, 나중에는 말씀으로 새로워진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 상상계 안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날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 주이상스에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실패하여 대상을 만나면 감정이 생긴다.

- 그 감정은 슬픔, 분노, 우울함 등이 된다. 이러한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 그러한 감정이 왜 생겼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목적이다.

- 주체와 대상 그리고 큰 사물과 욕망의 관계망 속에서 정신분석학은 시작한다.

- 주이상스와 주체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감정의 동요는 커진다.

- 정동의 심리학에서 볼 때 실제계를 적절하게 상징계가 표현해주지 못할 때 분노가 일어난다.

- 자신의 감정을 동요하는 것은 실제계에서 실패한 무의식이 상징계와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의식이다.

- 무의식에 쌓여 있는 이렇나 불만족은 항상 언어적인 빈약함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 자신의 표현, 존재감, 이해를 제대로 현실에서 충족받지 못했을 때 무의식속으로 들어가서 왜곡된 감정, 정동을 일으킨다.

- 무의식 속에 들어간 이상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화를 내기도하는 것이다,

- 이미지는 생각을 정지시키기 때문에 포착되는 순간 과거의 것이 된다. 이미지는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바깥으로 나가는 이미지'는 현재의 실제계가 가지고 있는 운동들을 정지시켜버림으로써 기존의 흐름을 정지 시킨다. 한 마디로 과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 언어 즉 상징계는 항상 해석이 발생하는 영역이면서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언어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사람을 움직이고, 마음을 꺼내 놓게 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만든다. 라캉에게는 이런 의미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분석하고, 이 두가지를 연결하는 것은 바로 '언어' 였던 것이다.

- 절대적인 쾌락이라는 의미에서 '도덕체계'의 최고점, '욕망체계'의 최고점은 같은 것이다.

- 진리는 자유를 선물한다. 라캉식으로 하면 진리는 상식을 가로지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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