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세미나 9번째 강의
- 라캉은 예술 혹은 미술의 기능을 과거로 보는 사조에 대해서 기원론으로 들어가서 반박하기 시작한다.
- 과거로 부터 미술은 과거의 것을 응축하는 것이라는 기본 전제에 대해서 라캉은 앞으로 미래를 창조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라캉이 보기에 우상을 정의할 때 플라톤의 우상은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들'이라면 기독교의 우상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프란젤리코의 구도는 그 당시의 원근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질서가 없고, 흔들리고, 무엇인가 정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재 속에 신이 역사하는 방식을 담고 있다.
- 중세시대의 타락이 르네상스를 가지고 오고 신고전주의로 회귀한 르네상스의 예술은 다시 인상파에 의해서 중세의 신비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 역사가 원이 아니라 일직선이라면 계속 반복해서 진리와 현실이 만나도록 예술은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 라캉은 이러한 예술의 영역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주이상스와의 정면승부를 보여준다.
- 대면하게 되면 주이상스 앞에서 인간은 강박도 히스테리도 아닌 붕괴와 해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그 이후 인간은 다시 자신의 본질, 존재를 찾아내게 되고 그로부터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 욕망으로 살게'되는 것이다.
- 어떤 면에서 라캉은 실존주의의 방식으로 주체를 탄생시키기는 하지만 답은 제시해 주지 않는다.
- 엑스니힐로로 돌아가는 순간 라캉은 안내자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맞다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더 비 주체적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 라캉을 넘어서는 것이 라캉의 목적이라면 이런 고민도 의미있을듯하다.어쨌든 실재 속에서는 어차피 진리가 더 선명한 법이니까 말이다.
- 진리는 보편적이라는 표현을 만드는 동시대의 합리성과 다르다. 오히려 라캉이 진행하는 매번의 임상에서 반복되는 생명의 흐름일테니깐 말이다
20170522_철학아카데미
라캉의 인간학_백상현 교수
9번째강의_공백과 승화
들어가기, 빈공간
- 멜라닌클라인이 생각하는 것은 현실 앞에 주이상스가 등장했을 때 모든 사람은 피하려고 하지만, 예술을 통해서 현실을 봉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멜라닌클라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은 과거의 것들을 봉합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 그러나 라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술은 미래로 열려 있는 것이고, 새로운 창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라캉이 생각할 때 주이상스와 마주친 인간은 거기서부터 새로운 욕망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여기서 바로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 라캉의 미학은 여기서 빈공간에서 시작되는 주체적 욕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라캉은 이것을 설명하려고 예술의 처음, 알타미라 동굴벽화까지 들어간다.
그림자, 그림자 놀이
- 고대 그리스 고전주의 세계의 예술론에서 시작해보자.
- 이미 세상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것이라면, 어째서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려 하는가?
- 흔희 세상을 한 폭의 그림과 같다고 비유하곤 한다. 특별히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감탄은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 그림같은 세상, 한 폭의 수채화 같다는 등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 이런 표현들 앞에서 고민해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사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이데아의 이미지를 정확히 옮겨 놓은 것이 예술 혹은 미술의 목적이라면, 왜 예술의 형식이나 표현은 다르게 나타나는가?
플라톤, 반발
-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의 이ㅣ지는 실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화가들도 있다.
- 세상 역시 하나의 그림에 불과할 뿐 이라고 말이다.
- 화가는 이 같은 세상-그림의 이미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 이들에게 회화는 오히려 세상의 이미지와 경쟁하는 수단이다.
- 세상이 한폭의 그림이라면 화가들 역시 그에 필적하는 하나의 그림을 그려냄으로써 세상의 이미지가 보여주지 못했던 것을 드러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 소포클레스와 같이 '파토스'에 근거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각으로 부터 진리에 접근하는 존재들이였다고 라캉은 생각했다.
- 플라톤 주의자들에 반대로 라캉은 완전히 새로운 정동적인, 감각적인, 파토스적인 것이 미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 플라톤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체계적인 로고스의 세계는 '바벨탑'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로고스, 파토스
- 로고스는 필연성, 질서, 보편성을 통해서 과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는 것들에 대해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 이 모방은 일종의 놀이이지 극것이 진리는 아닌 것이다.
- 이에 반해서 파토스는 특별하고, 무질서하며, 개연성이 없어지는 것으로 플라톤과 그 주의자들은 이야기 해 왔다.
기독교, 로고스
- 기독교에서는 로고스의 우위가 드러난다.
- 기독교에서 신은 '나는 나다'라고 이야기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
- 인간은 신의 언어, 로고스를 수궁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 그러므로 신의 언어, 로고스는 선포 즉 케리그마의 영역이다.
- '나는 나다'라고 말하는 것은 논박의 거리가 아니라 선포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선포되는 것이다.
- 말과 언어로 구성된 상징계에서 볼 때 기독교의 로고스는 완전히 강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그런 의미에서 설명되어지는 로고스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신개념이 생겨난다.
- 라캉은 이것은 언어가 가진 논리적 힘과 뵤사력에 대한 신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 '나를 나'라고 묘사하는 동어 반복의 이같은 표현은 스스로를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장소, 즉 언어적 의미의 공백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 공백으로서의 신, 공백은 그림자가 없다라는 것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기독교의 신의 명령이다.
- 모든 이미지는 의미를 자발적으로 생산한다. 고로, 우상은 의미의 생산의 장치이니 그것을 금하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논리이고 자캉의 분석이다.
성상 파괴의 시대, 라캉
- 로고스-파토스'라는 플라톤의 주장과 대립하여 공백(실재)과 의미(상징계)의 관계를 반대로 보는 라캉의 관점이 성상 파괴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간다.
- 신에 대한 해석 즉 의미의 생산은 아주 위험한 것이므로 교회 권력이 독점해야 했기 때문이다.
- 공백에 대해서 모방하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우상의 탄생과 가은 것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문제화했다.
- 로고스-파토스의 구도가 아니라 공백-의미의 구도에서 '신의 대한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항상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 자신들이 포착한 신관념과 인간의 세상을 연결하는 화폭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 진리는 그려질 수 없기 때문에 화가들은 삽화정도만 그리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다.
그릴 수 없음을 그리기, 프란젤리코
- 아케이로포이에토스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예수의 얼굴 이미지가 천에 직접 남겨진 흔적이라고 간주한다.
- 이 형식은 이미지로 신의 고정관념을 가두어주지 않기 위해서 '그릴 수 없음을 그리기'의 한 측면이다.
- 프란젤리코의 '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로 아케이로포이에토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 '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것과 '나는 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 사회의 로고스로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 다시 말하면 동시대의 상징계로 신을 상징하고 그것을 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 프란젤리코의 '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그림에는 그래서 기하학적인 원들의 반복이다. 결국 원의 프랙탈이라고 할 수 있다.
- 프란젤리코는 산마르크 수도원에서 이러한 원형들의 반복을 여러가지로 표현했다.
- 수태고지'도 마찬가지로 원들의 배열이 프랙탈로 배열되는데 질서대로 주지 않고 공간을 흔들리는 구조로 만들어 낸다.
- 형태를 안정적인 구조로 만들지 않는 것은 로고스적이고 네트로피 같은 방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 여기에는 프란젤리코의 예술의 배경에는 예수회 사도였던 그의 세계 인식이 들어 있다.
- 그의 세계인식은 성경을 해석하는데서 나왔다. 성경을 해석하는데로 4가지의 방법이 있었다.
- 먼저 성서 안에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식에 부합하는 해석을 하기 때문에 신의 수준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 내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 두번째는 은유로 보자는 것이다. 은유는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 트로폴로지라는 해석은 윤리적인 의미의 은유로 치환하자는 주장이며 이것이 3번째 해석한다.
- 마지막으로 아나고지아'라는 신비주의적 해석관이었다. 신비주의적이라는 것은 신의 현현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의 기반을 두고 있었다.
- 이 후에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는 구도를 흔드는 게 아니라 고정관념을 깨는 방식으로 등장하면서 공백으로 접근한다.
- 프란젠리코는 신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여정'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 길'에 관해서 안다는 것은 기존의 관념과 정해진 길을 간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들에게서 자유를 얻어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바벨의 승리
- 원근법의 발명과, 공간의 분리를 통해서 바벨의 언어인 질서와 로고스가 승리하게 되었다.
- 원근법은 발명은, 현실과 초월의 분리를 의미한다. 이제 신성함의 장소는 현실에서 물러나 상상 속의 추월적 장소가 된다.
- 그러나 계몽주의 시절에 그러진 것들은 하나의 거점으로 부터 모두 총체적으로 보이는 방식으로 '강박증'을 표현하게 된다.
- '히스테리의 이미지'라는 것은 프란첼리코와 같이 도래하기 전에 분해시키는 것을 말한다.
중세의 회귀
- 19세기 인상주의 운동의 등장은 중세의 회귀를 의미한다. 중세의 회귀를 의미한다.
- 중세적 아나고지아의 실천이 타락의 형태가 된다.
- 공간-시간-의미의 타락이 일어난다.
- 빙켈만이 퇴락이라고 부르던 것이 출현한다.
현대, 해체주의
- 들뢰즈, 데리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에게서는 플라톤주의-인간의 타락-다시 한곳으로 모임'이라는 구도는 옳바르지 않다.
- 플라톤의 예술은 항상 화가를 가짜로 만들고 현실에서 몰아내는 일을 하였다.
- 빙켈만은 로고스의 입장에서 중세적인 로고스가 다시 부활했다고 이야기 했다.
마네, 드가
- 마네의 작품은 공간의 타락이다. 이러한 관점은 푸코의 관점이다.
- 드가의 작품은 시간의 타락이다.
- 페르난드노프의 마지막 유형은 형태의, 몸의 타락이다.
라캉,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의미
- 라캉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고 존재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
-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도 않고, 실재하지도 않는다.
- 어린시절의 욕망의 구조를 선사받고 그것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라캉의 방법론이다.
- 신고전주의자들은 공간의 안정성을 확보한 뒤에 내세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죽음 이후에도 안정성을 주기도 한다.
- 이런식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하는 화가들은 여전히 플라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마네, 파괴
- 마네는 신고전주의가 흥행하던 시기에 인상파 화가들이 흔하게 진행하는 기존 구도의 파괴를 진행한다.
- 이러한 이미지, 공간, 구도의 파괴는 그 당시 유행하던 '사진'기술이 가지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기를 회화로 가져온 것이었다.
- 마네는 회화가 가지고 있던 상상계, 초월성, 비현실성을 붕괴시키고 타락시켜 버린다.
- 그래서 작품은 작품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속이지 않고-우리에게 사물 그 자체로 존재하게 만든다.
- 신고전주의에서는 작품이 작품이 아니라는 것,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라고 했는데 인상주의 이후에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마네를 넘어서 고흐까지 나가면 공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 공간의 파괴 혹은 공백의 기능은 중세의 화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페티쉬, 물신
- 고흐의 그림은 중세시대회화가 가지고 있던 공간을 대하는 개념과 비슷하다.
- 공간이 출현하지 이전에, 공강니 존재하지 않는 고딕회화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기술을 고흐가 보여주는 것이다.
- 물건을 신처럼 여기는 것이 물신화 즉 페티쉬이다.
- 물신이라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많은 의미들을 일축하고 의미가 주어진 하나의 사물에 모든 상징을 응집해버리는 것이다.
- 물신화는 질서의 탈주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 질서는 의미를 통해서 하나의 사물이 공간 전체를 소유해버리는 것을 보여준다.
- 프랭크 스텔라에 와서는 윤곽만 가지고 공간을 분할하면서 물신화의 기능을 가진다.
정신분석, 미술
- 정신분석은 어떻게 보면 아나고지아(신비주의)적인 해석과 비슷하다.
- 중세시대에는 신비주의전통에 따라서 현실을 과학으로 만들지 않고 로고스에 포섭되지 않는 주체를 탄생시킨다.
- 세미나 7에서 라캉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고, 누군가가 자신을 판단하려고 할 때 신비주의로 방패를 삼고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어 가도록 주체화 시키는 것이 바로 라캉의 임상적 정신분석이다.
- 플라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따라서 프로이트까지 오게되면 보편성 안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증상을 명명하여 치료를 하게 된다.
- 이것은 바벨의 언어이고 로고스의 언어이고, 보편성의 언어이고, 플라톤의 상징계이다.
- 그러나 라캉은 과학으로 정립하지 않고, 보편성으로 주체를 소멸시키지 않기로 작성한 것이다.
해체주의, 윤리
- 20세기 예술가들의 목적은 매혹적으로 해체하기였다.
- 매혹적이 되면 화가가 시도했던 해체주의를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해체시키는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 해체주의의 자유와 타락, 그리고 붕괴와 진리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 해체주의를 가지고 있는 특징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해주고, 그러한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이고 이것은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시 로고스, 파토스
- 증상은 파토스이고 로고스는 과학과 의학이다.
- 증상은 무질서적이고,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 신비주의적이고 감성적이것이여서 어느것 하나 정해지는 것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라캉, 승화
- 내가 어떤 사물을 통해서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자신이 변하게 되는 것이 승화이다.
- 나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상징계가 붕괴하는 것이 바로 승화이다.
- 이러한 승화의 모델을 '사드의 실험문학'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 사드의 실험문학이라는 것은 위반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 금기를 깨는 것이 사디즘의 근본인데 그 금기를 깨는 것은 위반하는 것이다.
- 그래서 사드의 문학에서는 비윤리적인, 사회가 인정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 미술은 자신이 속한 미술사와 통시적으로 싸워야 하고 그 당시의 시대정신을 가지고 보편성을 들이대는 공시적인 미술정신과 싸워야하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엑스니힐로, 공으로 돌아갈 수 있고 거기서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으로 창조를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 라캉은 예술 혹은 미술의 기능을 과거로 보는 사조에 대해서 기원론으로 들어가서 반박하기 시작한다.
- 과거로 부터 미술은 과거의 것을 응축하는 것이라는 기본 전제에 대해서 라캉은 앞으로 미래를 창조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라캉이 보기에 우상을 정의할 때 플라톤의 우상은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들'이라면 기독교의 우상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프란젤리코의 구도는 그 당시의 원근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질서가 없고, 흔들리고, 무엇인가 정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재 속에 신이 역사하는 방식을 담고 있다.
- 중세시대의 타락이 르네상스를 가지고 오고 신고전주의로 회귀한 르네상스의 예술은 다시 인상파에 의해서 중세의 신비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 역사가 원이 아니라 일직선이라면 계속 반복해서 진리와 현실이 만나도록 예술은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 라캉은 이러한 예술의 영역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주이상스와의 정면승부를 보여준다.
- 대면하게 되면 주이상스 앞에서 인간은 강박도 히스테리도 아닌 붕괴와 해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그 이후 인간은 다시 자신의 본질, 존재를 찾아내게 되고 그로부터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 욕망으로 살게'되는 것이다.
- 어떤 면에서 라캉은 실존주의의 방식으로 주체를 탄생시키기는 하지만 답은 제시해 주지 않는다.
- 엑스니힐로로 돌아가는 순간 라캉은 안내자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맞다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더 비 주체적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 라캉을 넘어서는 것이 라캉의 목적이라면 이런 고민도 의미있을듯하다.
- 어쨌든 실재 속에서는 어차피 진리가 더 선명한 법이니까 말이다.
- 진리는 보편적이라는 표현을 만드는 동시대의 합리성과 다르다.
- 오히려 라캉이 진행하는 매번의 임상에서 반복되는 생명의 흐름일테니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