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금포 타령_라비던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님 만나 보겠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성황 님 조른다
에 헤이요 에 헤이요 에 헤이야 님 만나 보겠네
에 헤이요 에 헤이요 에 헤이야 님 만나 보겠네
워 아아 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무정한 우리 님 말없이 가더니
봉죽을 받고서 돌 아를 오셨네
에 헤이요 에 헤이요 에 헤이야 님 만나 보겠네
에 헤이요 에 헤이요 에 헤이야 님 만나 보겠네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젓고
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자 내 님을 향해
바람이 없으면 (장산곶 마루에)
노를 젓고 (북소리 나더니)
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자 내 님 향해
(우 우 님 만나 보겠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배 띄워라)
강 건너 벗님네들 앉아서 기다리랴
그리워 서럽다고 울기만 하랴
에 헤이요 에 헤이요 에 헤이야 님 만나 보겠네
에 헤이요 에 헤이요 에 헤이야 님 만나 보겠네
에 헤이요 에 헤이요 에 헤이야 님 만나 보겠네
에 헤이요 에 헤이요 에 헤이야 님 만나 보겠네
한국의 역사를 읽고 있노라면 조선말기에서 대한제국의 성립시기에 민중들이 겪었을 아픔이 얼마나 깊을지 예상이 안될 때가 있다. 위로는 사대부들에게, 외부로는 서양과 일본에게, 내부적으로는 허무주의에 맞서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러다가 이런 노래를 들으면 그야말로 '한의 정서'가 온 몸 가득 퍼진다. 독이 퍼지는 것처럼 온 몸에 한의 서러움이 모세혈관까지 퍼지면서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낀다.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20세기 역사가 그토록 그리기 싫어했던 식민지 역사와 수탈의 피비린내, 인류애의 붕괴가 그려온 삶의 배경은 지금으로 치면 '삶의 이유'가 전혀 없다. 어떻게 그 절망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을 살아갔을까?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희극'처럼 보이지만, 몽금포타령과 같은 노래들은 희극이 아니라 더 절절한 비극처럼 느껴진다. 한을 받아내고 인정하고,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몇 가닥의 빛줄기가 비추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4계절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 일수록 따뜻한 봄을 기다리니깐 말이다. 사랑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이들에게 봄은 어쩌면 떠나간 님이 다시 돌아오는 꽃길이면서도 자신의 삶도 봄과 같이 활짝 필 것이라는 진리가 아니었을까? 왜 슬픔은 잃은 자들의 것이며, 사라진 이들에 대한 경외심은 이렇게 겨울이 깊어질 때만 다가오는 것일까? 세월호의 깊은 바다가 너무 차갑고, 이태원의 좁은 골목이 너무 깊어 보이는 이시간에 한의 정서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다.
님 만나보겠네
님 만나보겠네
님 만날 때까지 울음을 그칠 수 없는 이들이 얼굴이 떠오르는 밤, 잠자기에는 글렀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 함께 같이 울부짖으면서 이 밤을 붙잡는 것도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도움이 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그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 그런 마음으로 이런 글을 남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등 따숩고 배부르고, 아무런 걱정이 없어서 내일이 희망으로만 점철된 이들에게서 보지 못하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꽃을 피워내는 이들의 뒷모습이 아른 거리는 밤. 이무것도 하지 않고 그 한의 정서에 푹 취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님 만나보겠네
님 만나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