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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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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27. 2016

신비와 무한

절대화할 수 없는 것들을 신비함으로 놓아두기

사람들에겐 절대로

모르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이 직접 경험한

측면에 도달하지 못하면

절대로 모르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전율이나

놀라운 세계에 발을 들여놨을 때의 쾌감과 즐거움이나, 무엇인가 처음시작하는 설레임이나, 자기 혼자만의 비밀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설레임이나,

어린왕자를 읽으면서 '나는 너의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설레여'라는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을 때, 뺨의 감촉은 누구하고도 공유할 수 없는

감정과 감각, 경험이다.


굳이 인권의 천부인격성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오직 그 사람만이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우주가 있다.

그 우주는 아무도 침범하거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허락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를 만드신 경우에는 다르지만 말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과 눈물을 누구하고 나눌 수 있을까 한다만은, 인간인지라, 인간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가능하게 만들려고 문학을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를 애당초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한 사람의 생각은 오직 자신의 생각이다. 오직 자신만이 그것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소유할 수 있다.


다른 이가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느낌을 듣는다고 해서,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것들을 모조리 공감할 수는 없다.


이미 다름은 다름으로 영원까지 갈 것이다.

물론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많은 이들은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가지고 그 트라우마를 전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귄위를 그대로 배워서 자녀들에게 전수하거나

(지금 아버지에 대한 관점이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관점의 다름아닌 것이 된 이유이다)


분단트라우마 같은 집단의 고통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구조적으로 전수해주거나(지금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분단비용과 북한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이상하게 안보에 대해서 혹은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는 젊은세대의 등장처럼)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을 모든 이와 나누기 위해서 지하철에 신나를 뿌리거나 테러를 하거나 하는 등의 전수와 전달이 일어난다.


어떤 의미에서보면 연대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홀로 있음의 외로움과 해결책 없음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상담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말상대가 되어주기만해도 내담자의 상태가 호전되고, 어린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때, 단지 쳐다보고만 있어서 안심을 하고 혼자 잘 노는것처럼.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 트라우마에 대해서 누군가의 시선이 필요하고 누군가의 동참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람은 철저히 혼자다. 자신의 고통이 남에게 전수되지 않는다. 남에게 전달되지 않고,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다만,

초월적 존재가 제한적 존재 속으로, 생명의 현현이 죽음의 중심으로, 창조의 영광이 십자가의 저주, 죽음의 흙냄새가 생명의 하늘소리로 부활을 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신다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삼위의 현현이 가득할 때,

우리는 다른이들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공유하여

그 고통에 뛰어들고,

다른 이들의 감정의 메마름과 상함 속으로 한 성령을 통해서 바람과 같이 드나들어서 우는자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이웃의 경험과 깊이를 공유하고 이제는 함께 공동체라는 동일한 경험안에서 서로를 인식해 간다.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미가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처럼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인생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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