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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16. 2023

죄, 흠, 허물이 만들어 내는 악의 상징

폴 리쾨르_악의 상징

벌써 8년전 친구들과 함께 폴 뢰쾨르의 '악의 상징'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는 막연하고 희미하게나마 죄의 개념을 알게 되고, 또 흠이나 허물의 개념도 상상해보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서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을 읽고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을 공부하면서 조금이나마 리쾨르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상징과 해석의 갈등 속에서 신화와 신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몇 백개는 던지고 있는 리쾨르의 글들이 생각난다. 삶을 살아가면서 다시 '악'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상징'을 통해서 재현되는 악의 모습들을 돌이켜본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는 악의 상징. 다시 한번 돌아보자.


https://brunch.co.kr/@artlecture/115



들어가기_고백의 현상학 들어가기   

합리적인 사회규범을 의식하는 책임적 허물 의식이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래디컬한 개혁성을 잃지 않기 위해 종교적인 죄의식이 필요하다.

전자는 도덕의 문제이고 후자는 신앙의 문제이다.

신앙은 도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한다.


사유, 신화 그리고 상징

종교적 심성에서 나오는 악의 고백, 그것을 되풀이하는 작업이 철학을 배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고백이라는 것이 이미 철학의 관심영역 속에 있다. 왜냐하면 고백은 말이기 때문이다.

모든 말은 철학차원의 언어로 재생되 수 있다.

원죄론'이 신학의 개념과 연결되면서 바로 학문적인 영역에서 철학과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바로 연결시키기 어려운 면이 있다.

사변에서 나온 표현으로 부터 저절로 나온 표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죄론   

원죄 개념은 기독교의 죄교험 주기의 처음에 있지 않고 맨 끝에 있다.

원죄론이 제공하는 해석은 그리스도교의 죄 체험을 합리성에 맞게 설명하는 여러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원죄론은 반영지주의적인 방식이지만 원죄론도 영지주의자들과 똑같이 합리성의 방식으로 설명을 시대했기 떄문에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원죄론이란 영지주의자들이 시대했던 원초적 이원론, 지혜의 타락 또는 인간 이전의 어떤 실체에 대한 타락에 관해 생각하는 앎을 도식으로 체계화하는방식으로-기독교의 뿌리깊은 죄 체험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 책이 가장 잘 합리화된 고백형태에서 출발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영지주의와 같은 합리성에서 출발한 인간의 이해 영역에 갖히지 않기 위해서이다.

민네이션 : 그래서 결국 리쾨르가 시도하는것은 말의 뿌리에, 인간의 뿌리가 있다는 것이고, 그 뿌리의 대부분은 죄체험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죄가 합리성의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신학으로 한정되어 버려 신앙의 영역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일상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죄체험의 근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해석학을 서서히 꺼내든느 것이다.


사변, 신화   

사변에서 바로 철학으로 가면 안된다.

영지주의와 반영지주의 뒤에는 신화가 있다.

우화성 떄문에 신화를 그냥 거짓으로 넘겨 짚으면 안된다.

신화란 태초 사건에 대한 전승된 이야기로서 오늘날 예배 행위의 바탕을 이룬다.

신화는 인간의 자기이해를 가능케 하는 모든 사고와 행위의 틀을 결정한다.

신화는 비신화화의 입장에서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철학의 중요한 두 요소인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게 도와준다.

신화에는 사람과 성스런 무엇과의 관계를 발견하고 밝히는 능력이 들어 있다. 이것을 신화의 상징기능이라고 부른다.

악이란 성스런 것과 위기 체험이며, 사람과 성스런 무엇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위기 신화는 통합의 신화이다. 이러한 신화는 인간이 성스러운 어떤 것과 만나는 관계를 통해서 전체를 보게 만드는 기준을 제시해 준다.

결국 신화는 회상과 예측을 통해 인간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가져다준다.


악의 기원, 신화 사이   

사변에서 신화로 내려갔지만 그것 역시도 바로 내려가지 않는다. 신화로 바로 가 수 없고 생각 가운데 체험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민네이션 : 그렇기 떄문에 이것은 칸트의 차원으로 간다. 우리는 상징을 상징그대로 놓아둘 수없다. 상징은 성육신처럼 현실에서 몸을 입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체험이다. 그래서 체험을통해서 우리는 신화가 가진 상징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화는 다시 통합의 이야기가 된다. 체험에서 나오는 상징의 통합은 상징의 연결인 신화를 통해서 완전한 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인간은 사변을 통해서 이제 신화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가 예수님의 인격성을이야기한 것과 본회퍼가 계시의 구체성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가치의 세계에서 머무르는 몸통 없는영지주의가 아니라 실제의 차원에서 역사하는 성육신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결국 삶의 통합을 이루는 삼위의 활동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고백, 체험   

고백은 체험의 표현인데, 그 체험은 세가지 특성을 지닌다.

갈피를 모르고, 복잡하고, 물음투성이인 그런 체험이다.

갈피를 모르는 체험 : 아직 무슨 느낌에 사로잡혀 두려움과 걱정에 싸여 있다. 고백이라는 것은 느낌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없다면 느낌은 느낌에서 그치게 된다. 고백의 언어는 무슨 잘못에 대한 의식을 비추어 말이라고 하는 밝은 세계로 이끌어 낸다.

민네이션 : 고백은 우리의 느낌을 세계 속에 말이라는 몸체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말은 행하는순간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체험의 복잡성 : 잘못을 느끼는 의식 밑에 흐르는 갈등을 밝혀 드러내는 일을 언어가한다. 체험은 허물과 죄, 흠의 차원으로 복잡하게 세분화 되면서 고백의 차원은 이제 심각한 차원으로 흩어진다.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자기로 부터 소외되는 체험은 곧바로 물음 형태의 언어 차원이 되다.

민네이션 : 고백이라는 것, 죄의 고백이라는것은 마음의 느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중심이 드러난다.

죄는 나로 하여금 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무의미의 위협에서 맞서기 위해서 신화는 '어떻게 악이 시작되었나'를 이야기 한다.

사람이 물음을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는 바로 죄'이다.


제1장   

흠이 있다고 할 때 보통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지게 되는가. 그것은 보통 부정'하다라는 생각을 주지 않는가?

그 흠'은 주관적인 부분과 객관적인 부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부정, 더러움   

부정탄 데서 오는 두려움 그리고 그걸 씻는 제의는 잘못과 관련된 우리의 모든 감정과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흠은 아주 미미한 표상이요 그마저 어떤 두려움에 잠겨 있어 반성을 방해한다.

흠과 함께 우린느 공포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우리가 상상과 공감 속에서 되풀이 할 수 없는 사고의혀애가 바로 흠이 가지고 있는 표상이다.

흠은 객관적으로는 물질과 같은 것으로 연상이 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아직도 흠이란 말을 쓰는 것은 그 무한한 상징력 때문이다.

흠이 이미 지나쳐버린 의식으로 보이는 것은 두가지 관점에서다. 객관성과 주관성.


객관적 흠   

흠인 것과 우리에게 악인 것은 더이상 일치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흠의 목록의 변화는 동기 그 자체의 변화를 가리킨다.

부정이라는 것은 책임적인 주체가 더러워지는 것과는 관계 없이 금기를 객관적으로 훼손하는 것을 가리킨다.

금기 규율이 우리가 볼 때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영역을 규제한다.

흠이 있는 행위는 신을 고백하는 문제나 인간관계를 존중하는 문제나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흠의 차원에서만 볼 떄 잘못의 목록은 인격 주체의 의도와 관련된 것은 매우 적고 세상 사건과 관련된 것은 아주 폭넓다.

우리는 악과 불행이 나누어지지 않은 단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

악을 행한 윤리영역과 불행하게 된 우주적 생물학적 영역이 구분되지 않은 단계이다.

불행은 벌이다. 모든 고통 곧 병이나 죽음 또는 실패 따위는 모두 흠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해서 부정한 행위나 사건의 결과도 곧 부정한 것으로 되어 흠의 세계 속으로 포함된다.

흠의 영역에서 특히 엄하게 다룬 것이 성과 관련된 금기의 훼손이다. 성교금지같은 것들이 가장기본적인 금기로 되어 있다.

성과 관련된 흠은 신의 거룩함에 대한고백에서 나오는 윤리와는 무관하며 또 정의나 도덕적 인격성과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성의 흠은 윤리 이전의 어떤 신앙형태다.

살인도 원래 흘린 피의 저주에 대한믿음때문에 부정한 행위였지만, 인간 관계 상호성에 대한 침해로 이해되었을 떄 윤리문제가 되었듯이 말이다.

오늘날 성의 접촉을 윤리적으로 이해하면서도, 곧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얼 주고 받는 인격 상호간의 사건으로 이해하면서도 흠의 용어를 쓰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깨끗하게 하는 제의 행위를 볼 떄, 이처럼 성과 관련된 흠을 물질저긍로 부정하고 보는것이 근거 있는 해석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

그 제의들은 흠을 씻는 것치고는 좀 소극적이다.

원래 흠이란 성과 연관된 것임을 볼 때, 순결과 처녀성이 일치됨을 알게 된다.

남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윤리 곧 사랑정의 따위의 윤리 의식이 생기는 곳도 거기다. 그러나 그런것도 알고 보면 성문제로 되돌아가 성을 재평가하거나 성의 가치전환을 이루고 있다.


윤리적인 두려움   

흠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접촉을 통해 오염시키는 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 더럽히는 접촉은 두려움이라고 하는 특별한 감정을 통해 주관적인 사건이 된다.

어떻게 두려움이 스스로 자기초월하게 되었는지 그 비밀이 그 두려움 속에있다.

두려움은 처음부터 단지 물리적인 무서움이 아니라 윤리적 두려움 곧 윤리적 위기 의식이었다.

그것은 더이상 사랑할 수 업게 된다는 위기 의식, 목적의 왕국에서 죽은 자가 되고 말리라는 위기 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두려움의 원인은 흠에 대한 응보에 있다.

보복은 어떤 의인의 수난을 거친 구원과 질서 회복이라는 관념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흠의 의식과 관련된 최초 직관은 남아 있다.

수난은 질서를 침해한 데 대한 대가요 그래서 순결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흠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생각은 모든 제도, 모든 노력, 모든법령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응보의 하나님이라는 관념보다 앞선 관념이다.

자연의 규칙을 알아내기에 앞서 사람은 흠 있는 행위에 대한 복수의 필연성을 고백해 왔다.

고난이라는 악이 결국 잘못이라는 악과 결부된다.

보복행위 때문에 오늘날까지 악이라는 말이 두 겹의 뜻을 지닌다.

고난도 악이다.

그것은저지른 악의 결과다. 고난을 마치 흠 있는 행위 때문에 벌로 생각한다.

흠의 세계는 윤리와 물리가 나누어지기 이전의 세계다.

고난이 윤리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윤리가 육체적 고통과 혼동되고 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은 누군가 금기를 어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고난, 벌   

고난을 벌로 보는 관점에서 소급해 올라가면 금기의 특징을 몇가지 가려낼 수 있다.

금기에는 이미 그것을 어겼을 때 치러질 응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단순이 이렇게 하면 안된다가 아니다.

원초적 순결 안에도 죽음이 새겨져 있다.

죽음은 흠에 대해서 죽은 것,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흠이 없는 날것이 된다는 말이고, 그것은 두려움을 더이상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나눔   

레위기의 제사의 방식, 제의의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원죄와 흠을 연결해야 한다.

악의 상징은 흠, 죄, 허물이 있다.

흠이 충분조건이라는 1차 필요조건은 죄이고, 2차 필요조건은 허물이라고 생각한다.

들어있는 악인 죄의식에서, 드러나는 악인 허물로 발전하게 된다.


민네이션   

흠은 원초적인 것이다.

흠은 응보를 예비한 순결의 파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흠'을 가지고 있으면 보복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것은 죄를 짓기 전에 혹은 죄를 죄로 인식하기 전에 가지게 되는 개념의 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주로 성적인 흠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점점 죄로 발전하게 되는 단계를 거치고, 반대로 해결은 죄를 사함받고 그것이 다시 육체적인 성결로 돌아오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생각해 볼 때, 흠이 없는 어린양의 피로 우리는 흠, 부정으로 부터 일정한 제의'십자가를 통해서 변화되었고 새롭게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흠의 정도는 어릴적부터 어떤 응보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응답으로서의 처벌은 그 사람이 다시 죄로 발전하기까지 어떤 바운더리, 금기를 가지게 되는지를 결정한다.

이렇게 한 사회가 흠에 대해서 응보의 개념이 사라질 경우에 그 사회에서 죄는 쉽게 용납되고 그러한 시간이 축적되면 사회적인 구조로서 허물이 자리잡게 된다.

그렇게되면 민족의 죄는 허물이 되고 국가의 죄는 전쟁이나 침략이나 대량학살로 발전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허물을 죄의 단순한 회개나 흠을 순결케 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의같은것이다.

윤흥준의 장마'에서 마지막에 할머니가 구렁이를 쫓을 때 머리를 테우고 제의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제의'가 가지고 있는 어떤 화해의 기능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은 허물'로 인한 전쟁의 상흔을 씻어주지는 못하고, 화해를 위한 상호순결만을 추구하는 꼴이 된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벌을 받은 것이라는 것은, 고난의 이전에 흠이 있다는 말이고, 깨끗하지 않다는 말이다.

흠은 객곽적으로 더럽히는물질이고, 주관적으로는 두려움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깨끗케 하시는가?

객관성의 주관성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혹은 육제척인 오감의 직관을 통과하고 나서 그것이 마음에 새겨질 때 일어난다. 마음에 새겨진다는것은 어떤 일정한 감정을 가지게 한다는 말이다.


2장_죄

흠과 죄는 의미가 다르다.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현상학적이다. 현상학적이라는 말은, 현실에서 드러나는 양태와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다.

오시오스'라는 그리스어는 신에게 합당한 또는 경건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격적인 신이 등장하게 될 때까지 우리 가운데 흠의 영역으로 있다가 죄의 영역으로 드러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흠과 죄의 구분의식을 갖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관'이 변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흠은 내가 무엇을 어겼다는 결과로 발생한다면, 죄는 내가 신께 무슨 잘못을 했는가에 대한 결과로 나오는 죄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의 신학, 그것은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과의 단절로 부터 오는 고백이었다. 고백은 우리를 정결케 한다기보다는 신에게 다가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흠의 표상과 죄의 표상은 공존하며 발전과정에서 서로 엉키게 됨이 사실이다.

리쾨르는 역사적으로 죄를 추적하기보다는 현상학적인 것으로써 여러 유형들을 가려내는 것으로 죄를 파악할 것이다.


하나님 앞, 계약

죄'의 관념이 생기는 범주는 하나님 앞'이라는 범주다.

하나님 앞이라는 말은 전적 타자' 앞이라는 말은 아니다.

헤결은 부행 의식을 분석하면서 하나님을 전적 타자로 보았지만 그런 분석은 상당히 위험하다.

하나님 존재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은 다고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최초 계기는 불행의식이 아니라, 계약' 곧 히브리어로 베리트berit다.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 또는 그와 상응한 인간 실존의 위기와 공허 같은 거이 나타나는 것은 그 이전에 만남과 대화의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의식에 결정적인 것은 죄짓기 이전에 계약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 계약의 관계의 침해가 곧 죄다.

죄는 유신론과 같이 가지만 두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한가지는 다신론이 아니라 유일신이라는 신관이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존재적 아프리오리는 인간이 피관음적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존재는 사람에 관심을 두고,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의 모습이다.

흠의 특성을 알아볼 때 말, 고백, 제의의 말이라는 특성으로 살펴보았듯이 죄의 문제도 역시 말의 문제로 계약을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루하르ruah는 계약의 비합리적 특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루하르는 다바르davar 곧 말이다. 히브리어에 다바르에 맞는 어휘가 로고스밖에 없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모든 문화가 하나의 같은 인간성에 속에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바로 말'이라는 문화이다.

히브리어 다바르를 그리스어 로고스로 풀어낸 것은 하나님에게 붙잡힌 최초 상황은 언어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이다. 서로 부르고 찾고하는가운데 하나님이 하는 말과 사람이 하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죄의 경험은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이 부르고 찾는 관계 속에서 이룩된다.


대화   

하나님 앞이라는 범주를 성급하게 축소하게 되면 하나님을 입법자나 재판관으로 설정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은 율법이나 도덕적 계율정도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입법자나 재판관이 내리는 율법은 계약을 이루는 말에 훨씬 못 미친다. 윤리적인 명령을 내리는 말은 훨씬 나중에 추상화된 이후의 얘기다.

서로 부르는 상황에서 멀어졌을 때 곧 대화 관계에서 멀어지는 순간 비로소 법의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아무것도 거부할 수 없는 명령, 곧 당위'가 생긴다.

죄란 어떤 규범이나 가치를 어긴 것이 아니라 인격 관계의 훼손이다

인간의 최초 상황에서 큰 영' 루아흐의 권능으로 어둠에 싸여 있는 인간의 존재가 빛으로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율정도로 축소시켜 버리면 루하르가 우리를 빛으로 부르는게 아니라 어둠에서 불러내어 주기는 하지만, 다시 말하면 흠'의 영역을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지만 죄의 단절인 하나님과의 대화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변화, 말   

히브리인들의 죄체험을 알아볼려면 그들의 변화의 양상을 알아봐야 한다.

법문서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현존하는 삶 속에서 사람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보면 변화의 양상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알게 된다.

무한한 요청과 유한한 계명

예언자는 죄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죄를 거슬러 예언한다.

하나님의 노여움4. 죄의 상징, 무'로서의 죄

우리는 잘못에 대한새로운 경험을 가능한 가까이 포착하고자 한다.

게약의 드라마 속에서 펼쳐지는 경험은 벙어리가 아니다.

예언자의 선포나 죄인의 고백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죄의 체험이 언어 행위에 새로운 충격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아모스가 말하는 불의, 호세아가 말하는 간음, 이사야가 말하는 교만, 예레미야가 말하는 믿음의 결여 등이 그것이다.

흠의 상징은 접촉을 통해 오염시키는 어떤 객관적인 힘이 며 무슨 사물이었다. 그러한 표상들이 문자적이지 않고 상징적인 것이지만, 때의 문자적 의미를 가로지르는 2차적 의도는 순결이 사라져 흠이라고 하는 무엇이 생긴다는 의미다.

바로 그 때문에 흠의 상징은 새로운 경험에 압력에 밀려 차차 새로운 상징의 자리를 내어 주게 된다.

죄란 무엇보다도 우선 관계의 단절이라면 흠의 구조로 그것을 표현하기기 어려워진다.

죄의 용어에서 우리는 뭔가 있는 것(때)에서 뭔가 없는 것(관계결여)로 변화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나눔   

우리는 너무 쉽게 죄의 문제를 간과하고 구원과 은혜로 덮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덮었다는 이야기는 고백과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계율과 법령에 의한 법칙을 이야기한다.

히브리어의 다바르는 인격적인 부분의 말'이 포함되어 있지만 로고스라는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지성'적인 부분으로 한정되는 감이 없지 않다.

죄'의 규정은 이미 회복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관계가 깨졌다는 것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민네이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비인격적인 구원의관계로 전락해버릴 경우 우리는 흠'의 차원에서 멈추게 된다. 흠은 금기에 대한 어기는 것을 뜻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율법을 어김으로써 죽음을 당하는 어린양의 관계로 밖에 자신들의 죄를 비추지 않는 거이다. 그렇게 되면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도 흠;의 제거가 일어난다. 흠의 제거는 헌금이나 회개기도, 그리고 십일조나 새벽기도로 나타난다.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비인격적인 방식으로써의 신과의 만남은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계속 구조를 만들어 나가고 결국은 허물'이라는 사회구조가 되어 버린다.

허물'이 되어버린 삶, 구조화되어 버린 죄의 삶, 그리그 밑 바닥에 이미 예전부터 흠을 깔고 살아왔던 삶에는 당연히 전제되는 인간관이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다 혹은 인간은 동물이다 혹은 인간은 악하다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가 아닐까? 그 부분이 아닐까? 회개가 단순히 부정한 것을 씻어주는 역할만을 한다는 것으로 축소되었을 경우에 죄의 인격적인 단절함이 해소되지 않는 상태,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흠을 정결케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볼 때, 모세가 들어 올렸던 놋뱀'의 사건과 요나의 물고기 뱃속,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이다. 고백은 상호 간에 일어난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듣고 그 고백에 대한 응답이 있다. 그러나 고백을 쌍방향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방향으로 인식하게 될 경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험은 비인격적인 신의 응답인 율법 밖에 없다. 어느정도는 이러한 관념으로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오래갈 수는 없다.


질문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교리 혹은 신조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성경을 율법으로만 보는 관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로써 루하르의 영역으로 가지고 오면 교리는 오히려 루하르의 권능을 가리는 계기가 아닌가?

유진피터슨의 책에서 나온 것과 같이 말의 3가지 층위인 케리그마, 디다케, 파라클레오'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떻게 이것들과 대화와 고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죄와 흠의 관계를 연결시킬 수 있을까?

관계결여라는 의미에서 죄의식을 이야기한다면, 누군가를 정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악의상징노예의지, 악의 상징노예의지   

지금까지 살펴본 일차적인 악의 상징들이 집약되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노예의지라고 부르자.

의지라는 것과 노예라는 것이 서로 배치되는 것은 사실이다. 의지는 자유의 속성을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하 노예의지는 허물에 가깝다. 허물이 내면의 구조화된 악이라면, 그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노예의지, 세가지   

뭔가 있는 것 : 흠의 상징에 비추어 볼 때 노예의지를 구성하는 첫번째 축은 뭔가 있는 것이다.

외부성 : 허물은 내면적이지만 외부성의 상징 속에서만 험루에 대한 생각이 가능하다. 악은 자유의 바깥 측면으로 사람에게 다가온다. 시험 또는 유혹의 구조이다.

오염 : 오염은 노예의지의 상징이며 스스로 속박되어 있는 그릇된 선택을 상징한다.


오염, 외부성   

밖에서 오는 시험은 결국 자기에 의한 자기 시험, 자기 오염됨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속박하는행위가 드러나지 않는 채 속박된 상태 속에 산다.

노에의지 체험에 흠의 상징이 재현되는 데는 그와 같은 포로됨의 상징을 거친다.

오염은 파괴가 아니며, 퇴색시키는 것이지 완전히 없애는 것은 아니다.


선함, 우선성   

우리는 악이란 선의 대칭물이 아니고, 악함이란 선함의 대체물이 아니다.

인간 안에 있는 순결과 빛과 아름다움이 퇴색되고 희미해지고 추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악이 아무리 뿌리깊다 해도 선만큼 근원적이지 않다.


흠, 상징의 긍극성   

오염의 구조에 함축되어 있는 상징의 궁극적인 의미인 흠이 드러나게 되면 흠의 주설적 차원이 무너진다.

죄의 경험이 노예 의지의 경험으로 내면화되어야 한다.

그 때에야 흠은 노예 의지의 언어가 되어 그 궁극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또 흠이 오염의 구조가 함축하고 있는 것을 모두 드러내려면 신화적 상징들과 사변적 상징들을 모두 거쳐야 한다.


허물   

가장 다양하고 세밀하고 내면화된 악의 경험은 허물의식이다.

이러한 허물의식이 노예의지에 가깝고 이러한 노예의지는 흠에 가까이에 있따.


민네이션   

허물과 흠 그리고 죄는 우리를 노예의 상태로 만들지 않는가?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 대해서 흠을 가지게 된다. 상대방의 시선에,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시선에 대해서 노예에 가까운 개념을 가지게 된다.

피관음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이제 관음적인 대상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서 모든 부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지 않으며 안되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자유라는 것은 타자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 이미 그것은 하나의 노예상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악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악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분법과 반지성주의

이분법'이라고 선언하는 그 사람이 이분법이 되지 않는가?

이분법은 흔히 흑백논리로 간다고 하는데, 사실 흑백논리가 구분되는 것들이 많이 있지 않는가? 흑백논리가 싫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부분 흑백논리가 아닌 하나'를 꿈꾸는 단편적인 하나의 답을 들이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안에 반지성주의가 얼마나 많은가? 책을 읽으면 머리가 너무 좋아져서 모든 것들을 너무 복작하게 생각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보다 대상인 상대방이 더 많이 읽는 것 같을 때 그런 표현을 많이 하지 않는가?

언제나 비교의 관점에서 만들어지는 정체성은 항상 상대방이 우위에 있거나 내가 우위에 있거나 한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주구장창 우리 가운데 왔던 것들이다.

어찌 되었든지 나는 이러한 부분을 다듬고 넘어서야 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을 조심하고, 좀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다른 사람의 지식을 나와 비교하려고 하지 말라. 그 나름대로 인정하고, 그것에 맞게 또 나의 생각들을 잘 정리해보자.

다름에서 시작하는 것, 그것을 잊지 말라.


악의 해석, 상징 그리고 의미

우리는 상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악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올바른 회개를 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악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상징   

상징이 중앙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있고 하나님은 상징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아닌가?

상징은 1차 상징인 흠, 죄, 허물이 있고, 이것들이 구조화되어서 서사가 되는 2차 상징인 신화가 있다.

누구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는 수 많은 상징들로 구조화되어 있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징들을 풀어내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예배, 죄, 인격   

우리는 예배'라는 거시적인 행위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우리 안에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예배의 구성요소들 찬양, 기도, 헌금, 교제 안에 있는 상징들의 연관성을 본다.


용서, 사랑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상징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상상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왜 사람들에게 상징, 은유를 사용하셨는가?

예수님은 왜 용서를 하셨는가?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하지 않는가?

보이는 하나님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시고 실천하시고 함께하셨다. 이것 자체가 엄청난 해석이 되는 상징이 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상징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풍부한 해석으로 풀어지지 않는가?


허물   

허물은 잘못과 동의어가 아니다.

허물은 다음과 같은 차원의 문제를 가진다.

책임과 벌의 관계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윤리적이고 법적인 방향이다. -형벌 문제를 그리스 방식으로 합리화한 것이다.

예민하고 세심한 의식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방향이다. -윤리의식을 유다의 방식으로 내면화하고 첨예화한 것이다.

저주받고 심판받았다는 의식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심리적이고 신학적인 방향이다.-율법하에 있는 인간의 고통을 바울 방식으로 내면화하고 첨예화한 것이다.


대립   

그리스합리성 vs. 유다, 그리스도교의 종교성

경건의 내면선 vs. 도시국가의 외면성과 은총으로 인한 구원의 외면성

바울의 반율법주의 vs. 법정의 법률, 모세의 율법


새로운 계기의 출현   

일반적으로 이야해서 허물이란 잘못의 주관적인 계기를 가리킨다.

반대로 죄는 잘못의 존재론적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죄란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의 실제적인 상황에 대한 어떤 의식을 가리킨다.

허물은 그런 의미에서 즉자(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들, 존재론적인 차원의 문제들)의 상황을 대자(대상을 정하고 그 대상과 대면하는, 여기서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여 자신이 느끼고 있는 상황에 대한 주관적인 표현들)로 의식화하는 것이다.

허물은 악을 만든자라는 흠의 중첩과 의미화로 부터 정의된 결론을 만들어낸다.

흠은 어떤 부담감 속에서 벌을 받으이라는 희미한 느낌이라면 허물은 흠과 동시에 조금씩 발아되기 시작하면서 주관적으로 자신이 그 벌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죄, 허물   

죄의 실재론과 허물의 현상론 사이에서 긴장이 생기는데 그것은 개인화의 문제이다.

죄의 구도에 따르면 악이란 인류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상황이다.

허물의 구도에 따르면 악이란 개개인이 일으키는 행위이다.

죄는 있고 없고의 존재론인데, 허물은 등급이 있다.

죄는 죄인과 죄인이 아닌 사람이 있다.

허물 의식에서는 잘못이 많고 적음이 있다. 여기서 바로 죄와 허물을 잘못 대응함으로써 우리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대자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허물 의식 안에서는 정의가 상대적 정의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지만 허물에 있어서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 있고 허물이 적은 사람도 있다. 허물은 소유의 개념이 된다.

허물은 도덕과 연결되어 있다. 죄인으로서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그러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개개인들 가운데 일어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민네이션 : 이렇게 되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풀어낼 수 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은 맞다. 우리는 남을 정죄할 수 없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두세사람이 가서도 듣지 않으면 교회가 가고 교회가 가도 듣지 않으면 내쫓으리라고 한 것은 허물의식의 차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노예 의지의 개념   

일차적인 악의 상징들이 집약되는 개념이 바로 노예 의지이다.

한 사람 안에서는 자유의지와 노예상태가 같이 들어 있다.

가장 다양하고 세밀하고 내면화된 악의 경험은 허물의식이다.

그 허물의식이 노예의지에 가깝다.


상징, 구조   

맨 뒤의 상징은(흠-죄-허물) 그 앞에 나온 상징들의 내용을 모두 취한다.

상징들 사이에 순환 관계가 있다.

나중에 생긴 상징들은 그 앞의 상징들로 부터 의미를 취하고 앞의 것들은 뒷것에 상징력을 전달한다.

실제로 허물은 흠과 죄 체험을 구성하는 상징 언더들을 자기식으로 다시 취한다.

허물은 그 앞의 두 계기에서 물려받은 언어인 '포로됨'이나 '오염' 같은 말을 빌어 간접적으로 말할 수 밖에 없다.

그 두 상징이 내면화되어 어떤 자유, 곧 자기 마음대로 하여 스스로 높이고 감동하고 오염되는 그런 자유를 표현한다.

죄를 표현하는 말인 포로됨과 흠을 표현하는 말인 오염이 자유의 차원을 가리킴으로써 그 말들이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상징임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비로소 이러한 상징들이 자기 대 자기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항상 구원은 무엇으로 부터 전제된 것들에게서 나오는 것, 전제되어 있는 것들로 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원이라는 상징이 옷을 입기 위해서는 구원을 만들어내는 이전의 상징의 체계들이 있어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징은 또 다른 상징을 만들어낸다.


민네이션   

성상우선주의, 성상파괴주의자들의 싸움이 생각난다. 상징은 우리에게 선물인가? 혹은 넘어야할 담인가?

자크라캉이 말한 욕망의 그래프를 생각해보자. 지젝이 말한 RSI(현실-상징-상상) 도 생각해볼 거리가 많다.

악의 일상화, 일상의 악덕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이 시스템은 오픈시스템이고 파지티브시스템이라서 우리가 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을 최소한으로 드러내지만, 그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서로 구조화되어 가는 가운데 새로운 악이 탄생한다. 이러한 악의 구조를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상징'을 의미의 차원으로 가지고 오는 해석학의 과정으로 끌어내야 한다.

생각은 나는 생각과 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안에 담긴 풍부한 상상이 우리에게 생각을 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상징을 만들 때, 상상계에서 상징을 꺼내어 현실로 꺼낸다.

우리가 죄'와 대면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악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와서 인간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죄의식의 내면화되면 허물이 된다. 그럼 죄가 있다라는 존재적인 차원에서 그 죄가 나의 것이다, 내가 죄인이다라는 허물의식이 되면서 내면화가 된다. 자기것이 된다. 죄가 나와 상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결국은 고백이 되는 것이다. 그런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 다는 것은 여러 다른 갈래가 있기는 하지만, 죄가 아직 내면화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것을 인식하게 되어야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죄'라는 상징 이전에 금기에 대한, 십계명에 대한 '흠'의 상징이 있어야 한다. 흠'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흠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에서 그 흠이 죄로 바뀌면서 그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대면하게 만든다. 대자적인 관계가 된다. 그리고 그 대면의 관계에서 이제 하나님은 용서의 주체가 되고, 인간은 허물을 용서받는 주체가 된다. 이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에 왔다'라고 하는 회개의 고백의 요청이다. 이러한 회개의 고백 가운데 드디어 흠으로 부터 시작된 죄의식(신과의 단절)과 허물(죄의 내면화)이 해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그리스도 자유를 주시는 방법이 아닐까?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은 흠'을 느낀다. 하지 말라는 것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의 책임 앞에 놓인다. 그리고 그분과 개인적으로 대면할 때, 베드로와 같이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허물의식에 사로잡힌다. 그분의 용서 가운데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되면서 드디어 고백이 완성된다. 죄고백이 사랑고백이 되는 순간이 된다.


https://brunch.co.kr/@minnation/1657





목차


1. 일차 상징 : 흠, 죄, 허물
'고백'의 현상학


허물

2. 처음과 끝의 신화
신화의 상징 기능
창조 드라마와 '제의적' 세계관
악한 신과 '비극적' 인간관
'아담' 신화와 '종말론적' 역사관
유배된 영혼의 신화와 앎을 통한 연구원
신화의 순환 운동



1994년에 나왔던 <악의 상징> 개정판.


폴 리쾨르는 해석학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보이고 있는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로, 그의 해석학은 모더니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닌 현대를 극복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지성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서구의 존재론이 윤리성과 책임성을 비껴가는 경향을 지닌다는 것을 비판하면서 윤리적 역동성을 중요하게 내세우는데, 이러한 리쾨르의 윤리성 강조는 그의 모든 사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악의 상징>은 리쾨르가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사유를 보여주는 저작으로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원조적 체험인 악을 깊이 있게 해석한다. 그는 악의 해석을 종교 차원의 고백에서 시작하는데, 제1부에서는 고백의 현상학적 되풀이를 통해 1차 상징인 흠.죄.허물 등을 해석하여 악의 가능성이 어떻게 악의 현실성으로 되는지를 밝혀낸다.


그리고 2부에서는 1차 상징을 매개하는 2차 상징들, 신화 즉 이야기의 상징 기능을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윤리.도덕.신앙의 문제들을 천착한다. 이러한 추적과정 중에 그는 존재와 언어, 도덕과 신앙, 자아와 세계의 문제에 대한 폭 넓고도 근본적인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폴 리쾨르 (Paul Ricoeur)


1913년 프랑스 남동부 발랑 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이었다. 2세 때 부모가 사망하여 브르타뉴 렌느 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고 대학을 졸업하였다. 1935년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고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마르셀에게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독일군에 잡혀 스위스에서 5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당시 후설의 저서들을 탐독한 것이 계기가 되어 후설 연구가로도 알려졌다. 1950년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현상학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밝히고 그러한 유한성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1948∼1956년 스트라스부르대학, 1956년부터는 파리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1949)에서 의지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을, 《유한성과 죄악 가능성 Finitude et culpabilit?》(1960)에서 종교적인 상징에 대한 해석학을, 《해석에 대하여 De l’interpr?tation》(1965)에서 프로이트를 재해석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였다. 1966년 그리스도교 좌파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낭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68년 학생혁명이 좌절되자 급진적인 학생들과 지식인들로부터 외면당하여 1970년 해임되었다. 그 뒤 시카고대학과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였다. 이후 그 동안 몰두했던 해석학의 주제도 상징에서 텍스트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상징언어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너무 좁다고 여겨, 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1975년에 《살아 있는 메타포 La m?taphore vive》를, 1983·1984·1985년에 연속으로 《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cit 1, 2, 3》를 펴냈다. 1990년에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Soi-m?me comme un autre》을, 1992년에는 대표 논문을 모은 《강좌 Lecture》를 출간하였다. 2005년 별세하였다. 최근작 : <해석에 대하여>,<악, 철학과 신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폴 리쾨르, 비판과 확신> … 총 19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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