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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16. 2023

요즘, 나는

자기객관화를 위해 남겨 놓는 글

자기자신을 객곽화하기 위해서 남기는 글


자신을 잃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계속 글을 남긴다. 글을 남기는 시간 만큼은 최초로 그리고 최후로 남겨질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도 결국은 숫자로 기억되는 단어들만 남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단어들이 마지막까지 갈 것이다. 그러니 나는 부지런히 남기고 망각의 강을 건너지 않고 오늘 이 시간 이 기분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물살들을 헤치고 조요히 쉬러 나왔다. 생각보다 처음으로 나 자신이 온전히 혼자서만 시간을 보내는 시간은 처음인 것 같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했었고, 항상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생각하고 말을 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던 시간에서 벗어나니 조금은 낯설지만 곧 익숙해진다.


사람들과 자주 자기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들어서는 자기다움이라는 self-awareness와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나는 self-concept을 고민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타자로 놓고 볼 수 있는 것을 객관화라고 한다. 자기스스로를 볼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림을 그리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혹은 영상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다른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과거에 남겨놓은 자신의 흔적을 놓고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해석의 결과가 신기하게도 미래를 다시 규정하거나 열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항상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생각하지만 역사를 생각하는 것은 결국은 남겨진 것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서 남겨진 것이 있는 사람일수록 과거를 역사로 인식하면서 미래를 새롭게 열어갈 수 있게 된다.


언어로 할 수 있으면 기억된다



굳이 프랑스의 철학자들이나 프로이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내게 언어로 된 것들은 항상 언젠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언어의 의해서 구조화되거나 범주화되어서 들어 있는 생각이나 이미지, 감정들이 하나의 언어를 통해서 깊은 마음 속에서 끌어 올려진다. 어릴적 나를 가장 괴롭힌 단어는 '불쌍하다'라는 단어였다. 누군가 나에게 불쌍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더랬다. 그 때는 그게 부끄럽고 불편했는데, 어느순가 내가 누군가에 대해서 "불쌍하다"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을 보면서 흠짓 놀랐다. 어떨때 사람은 누군가에 대해서 '불쌍하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들이 나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불쑥 '불쌍하다'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게 만들었다. 삶의 숨어 있는 사건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고 자신을 불러줄 것을 기대하면서도 불쌍하다라는 단어만 꺼내면 그 모든 사건들이 곧바로 숨을 거둔다.



불쌍하다는 단어를 입밖으로 꺼내는 사람들


태어난 순간 나는 내가 몇킬로그램인지 모른다. 병원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어머니를 놓고 할머니는 밭에 김매러 가셨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반쯤 알콜중독으로 비틀거리면서 작은 방에 들어와 며느리와 자신의 손자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막거리를 끊여서 가져다 주었다는 이야기는 무슨 박혁거새가 알에서 나왔는데 탯줄도 없었다더라라는 말과 같이 느껴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그렇게 보면 불쌍하다라는 말을 하겠지만, 그게 나의 인생이라면 내가 나를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기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나? 나는 이러한 관점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 알게 되었는데 '인권감수성'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 말이다. 인간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을 인간답게 여기디 않아도 되는가?라는 질문도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런 감정을 느껴지보지 못한 사람에게 과연 언어는 얼마나 그의 마음 속에 침투할 수 있을까?


마음 속이 암덩어리처럼 더 이상은 외부의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본다.



필리핀 개발 사업을 담당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는 필리핀만 적어도 30여번은 넘게 갔는데, 갈 때마다 항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를 가난과 빈곤이 사람들의 몸을 휩감고 놓아주지 않는 아나콘다처럼 온 여름을 가져간 느낌. 훅훅 찌는 더위에 하천가 위에 몇개 판자로 겨우 지은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일을 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는 건지 알수 없지만. 그 장면을 보고서 아득한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귓가에서 나의 울음소리도 저렇게 들렸을까? 강물보다 더 큰 소리를 발산하며 흐르는 배설물 가득한 하천의 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와 경쟁하듯 했다. 나는 그때 나의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살면 안되지 않나?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중에 알았는데 이런 장면을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하더라.


나는 스스로 '불쌍하다'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던 때부터, 누군가에게 불쌍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혀를 끌끌차면서 '에효!'라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에게, 그 아이에게, 그 친구에게 다른 미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또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한다. 완전히 기대할 수 없는 현재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누구나 좋은 환경에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인식할수록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겠지만. 처음부터 좋은 환경도 아니고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도 새로운 미래를, 희망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지만 우리는 현실을 열어서 멈춰 있는 것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찾아나서고 정말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은 누구지?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그 상황을 바꾸었지? 이렇게 역사를 바라보는 내내 밤하늘의 수 많은 별처럼 자신의 환경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낸 사람들을 반짝거렸다.



소중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소중한 친구들이 이야기 해 준 것들을 기억하고 싶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힘들었던 이야기, 소소하지만 자신에게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내게 털어 놓을 때 너무 기쁜 나머지 듣는내내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린다. 이야기하는 내내 나는 그들과 함께 걷고 경험하면서 울고, 웃고, 또 즐기고 아파한다. 이런 상황을 처음에는 나 자신도 모르고 있다가, 이야기하고 있던 친구들이 문득, "너 뭐해? 내 말 듣고 있는거야?"라고 묻는다. 나는 이 상황을 표현할 자신이 없어서 듣고 있다고 얼버무리지만 정말로 나는 그 당시에 그들과 같이 있었다. 그래서 소중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아직도 울음도 나기도 하고 가슴이 철렁거리기도 하고 감정적으로 휘둘리기도 한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 사람이 겪은 사건과 그 사람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다. 이것들이 어우러져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사실 이 우주가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더욱이 자신이 그것을 해석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데 까지 나아가면 이 이야기는 더이상 누군가와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이야기가 된다. 나는 언제나 위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고, 또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친구들이 일상의 시간을 일일이 들여가면서 수 놓았던 자신의 궤적을 보여주는 날이면 나는 나의 마음과 생각을 펼쳐 놓고 지도를 이어 붙이듯이 계속해서 써내려가는 책과 같이 이야기를 보탠다. 언어로 기억된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나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나면 내가 행동할 때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들이 기반이 되어서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또 무엇인가를 하지 않게 만든다.



알베르 까뮈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남긴 책은 좋아한다. '이방인'은 그 차제로 항상 삶을 낯설어 하는 나에게 위안과 관심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이방인이었던 사람이 어딘가에 정착하고 동네사람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방인처럼 이 삶에 아직도 정착하지 못한 것 같다. 나는 매번 남들보다 예민한 피부와 촉감으로 어딘가 새로운 곳에 가면 누구보다 늦게 잠들고, 어느순간이 되면 깨어나서 작은 숨소리에도 온갖 신경이 집중된다. 어느날 일어났는데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까봐도 겁이 난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지는 이유는 이런 센서를 많이 켜두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생각


인생은 언제나 현상학적으로 살고 추억은 언제나 해석학적으로 다가온다. 지금을 살아가면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살아가면서 해석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해석을 안하고 현재만 살아가는 사람은 많이 있다. 내가 해석할 수 없는 일들이 마구 몰아닥치는 일상을 겪고 나면 에너지를 거의 다 소진해 버린다. 그리고 나면 해석도 없이 도피해버리고, 다시 현재를 살면서 또 소진되고.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사람은 번아웃증후군을 겪게 된다. 다 타버려서 더 이상 태울 수 있는 에너지가 없는 상태. 나는 사실 외향적이라고 처음보는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나는 내향적이다. 다시 말하면 외향적인 사람들은 현상 속에서 사람들로 부터 에너지를 얻는다. 사람들이 주는 박수, 인정, 호응, 웃음과 반응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이다. 반면에 혼자 있으면서 스스로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무엇인가를 조용히 연결하는 사람은 자기자신만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다. 


나는 사실 내향적이라서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에 엄청난 에너지가 쌓이고 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감정들도 회복된다. 책을 읽는 것도 항상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면서 읽기 때문에 깊은 침잠으로 가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나 혼자 책을 읽으면 우주와 우주가 연결되고, 역사와 역사가 손을 내밀고 서로 인사하며, 예전에 사라진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만나는 것을 느낀다. 무한한 상상의 영역에서 시간도 빛도 없는 암흑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남들보다 예민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는 더 예민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향적인 사람은 과정에 집중하고 외향적인 사람은 결과에 집중한다고 한다. 나는 항상 결과에 집중당할까봐 과정을 열심히 했던 사람 같다. 이것도 한량인 기질을 벗어나면서 부터 가능해졌지만 말이다. 


낯설고 낯설고 낯설다


한량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서 즐기고 나뒹굴고 애매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오히려 한시도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는 열정의 캐릭터였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는 어머니는 무엇인가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지금도 못 마땅해 하신다. 그 사이에서 잠시의 가치의 혼란을 겪었지만 그래도 이제 나의 궤도를 찾은 것도 같다.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데, 안할 때 더 희열과 기쁨을 느낀다. 그러니 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기쁨으로 만날려면 일단 나 혼자서 고민하고 해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니 그 시간은 결국 이렇게 혼자 앉아서 글을 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글을 잘 쓰거나 설득력이 있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필요한 것들을 공유한다는 생각에 조금 더 쉽게 설명하려면 어떻게하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끔 사람들이 칭찬하는 소리를 듣는다.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런 칭찬이 낯설다. 생각해보니 나 혼자 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해주고 표현해주는 친구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 아직은 때묻지 않은 건가, 함께하는 것이 이렇게 좋고 또 제로베이스에서 마이너스에서도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언더독이라고 하지 않나? 완전히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서 이겨내는 것. 어쩌면 나는 그런 게임을 친구들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언더독이기는 하지만 만나면 해볼 수 있고, 해보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

- HRD를 맡아서 신입교육, 직무교육, 직급교육, 해외봉사단 교육, 전직원워크샵

- 초등교육 : 초등교육 변화를 위한 '초등과정 보완교육' 튜터십칼리지 진행하고 튜터들 양성하고 직접 튜터로 뛰기도 하는 다양한 업무에 사업제안서도 만드는 상황. 목표는 초등교육부터 차근차근 바꾸어 나가면서 교육제도 전반을 바꿔나가기. 물론 교육학은 방통대 교육학과를 어렵게 졸업해지만 배울 건 다 배웠다고 생각. 철학과 인문학을 국영수에 적용해서 아이들이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열심.

- 중고등학생 : 2주에 한번씩 멘토링을 진행한다. 여러명과 진행하기도 하고 한명하고 진행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토론도 하고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 및 인터뷰 준비도 함께 한다. 천재들의 생각법이나 시대의 개혁가들을 읽으면서 친구들이 이 사회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멘토링을 한다. 

- 청년을 위한 : 사회혁신 해봄 협동조합에서 친구들과 함께 청년들의 역량강화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혁신에 대해서 공부하고 교육한다. 철학해봄, 정치해봄, 사회학해봄, 조직해봄 등등과 같은 스터디를 진행한다. 

- 장년을 위한 : 읽는 사람들에서 행정을 맡아서 하고 있다. 앞으로 전국적인 행사 및 스터디그룹, 다음세대 정치인을 양성하기 위한 행사와 교육과정을 기획한다. 부업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앞으로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작업이다. 

- 노인들을 위한 : 질병노노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노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플랫폼과 변화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거의 주말은 여기에 시간을 다 보내는 듯하고 에디터들을 양성하는데 벌써 5기가 되었다. 

- 학교 공부 : 이러는 와중에 박사과정 1학기를 무사히 마쳤다. 과학과 사회학을 연결하는 협동과정에서 한국의 과학기술에 대해서 배우고 익히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과연 박사논문을 쓸 수 있을까??



요즘 나의 질문거리

- 악한 사람은 정말 악한 사람으로 인생을 마감하나? 아니면 그래도 돌이키는 시간이 있기는 한가?

- 선교적 교회의 관점에서 한국교회는 회생가능하지 않나? 

- 연애와 사랑 사이에서 정말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나? 외로움과 고독 사이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 과학사를 놓고 볼 때 계몽주의 이후에 과학의 발전이 결국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인문학이라는 것은 이것을 자유롭게 해주는 요소가 되는걸까?

- 리더가 허무주의를 가지고 있을 때 허무함을 깨는 기제는 무엇일까? 열정이 식어버린 리더들에게 새로운 도전이 가능한가? 어떻게 나이가 들어서도 열정적인 리더는 그렇게 열정을 유지하는 것일까?

- 나는 나의 한계를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언제 이 한계를 넘을 수 있을까? 

- 제도설계와 정책기획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시스템의 대안은 무엇일까? 가슴이 웅장해지는 그런 계획을 세우는 것은 가능한가? 한국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양적연구와 질적연구 사이에서 이것들을 서로 매개하면서 진짜 현실을 볼 수 있는 인사이트를 찾을 수 있을까? 

- 프레드릭 제임슨의 사상을 정책기획에도 가져올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정치적 무의식의 개념을 가지고 사람들이 가진 기회의 창을 열어내는 방법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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