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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23. 2023

우리는 잊혀진 자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매번 느끼는 감정들

가난을 과거로 만들고 싶다라는 멋들어진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가난을 경험해 본 사람은 나름대로 가난에 대해서 정의내릴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대부분의 가난의 시작은 한 가장의 직업의 수준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든 어머니든 가장이 가진 직업에 따라서 가난은 시작되기도 하고 끝나기도 한다. 요즘들어 나의 개인사를 많이 공유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나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예전에 비하면 조금은 성숙해진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왜 이런 생각과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은 쓰리고 아프면서도 기록해 두고 나면 금새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마술로 변한다. 날마다 밀폐된 좁은 방에서 열대야를 이겨내면서 드는 생각들을 써본다. 


지금은 5호선 방화역, 종점으로 유명한 방화역은 그 주변을 둘러서 1단지에서 12단지까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지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근 마곡지구의 개발로 인해서 엄청나게 핫해진 곳이기도 하고면서 서울식물원을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특히 최근 지하철 '서해선'이 등장하면서 김포공항에만 가도 공항철도, 9호선, 5호선, 서해선, 김포 골든라인까지 모두 갈아탈 수 있는 엄청난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5호선 방화역은 비교적 마곡지구에 비해서 개발이 덜 되긴했지만 방화5단지는 신혼부부들에게 조금은 좁지만 그래도 그가격에 역세권에 살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감을 전해주기도 한다. 방화역에는 농협하나로 마트를 비롯해서 각종 음식점과 상점들이 있어서 생활하기에 편하기도 하다. 


유독 방화 4단지와 7단지만 부유하다


그외의 단지들은 영세민들을 위한 영구임대 아파트이거나 혹은 20평대의 중저가 아파트이다. 물론 요즘 초등학생들이 '거지'라고 부르는 SH에서 시공한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이 녀석들은 그런말은 누구한테 들었을까? 아마도 부모님이겠지?) 그 중에서도 1,2단지와 6단지는 특히나 영구임대 아파트 중에서도 평수가 좁기로 유명하다. 나는 벌써 6단지 그 좁은 방에서 30년을 살고 있다. 나는 왜 영구임대 아파트에 살게 되었나? 이야기를 하자면 길지만, 연희동 산동네에 살다가 녹지로 조성이 되면서 그 동네 사람들에게 '하월곡동'이냐 아니면 '방화동'이냐라는 선택지가 있었다고 한다. 연희동 산동네 주민들은 하나같이 '김포공항'과 인접한 방화동을 선택했고 대부분 6단지 영구임대 아파트가 아니면 12단지 아파트로 배정을 받았다고 한다. 어릴 적 산동네에서 들었던 동네 사람들 이름이 지금도 부모님 입에서는 오르내린다. 



아무튼. 삐에르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 나오는 '상류층은 다른 계층과 다른 문화를 가짐으로서 가난한 사람과 구별지으려고 한다'라는 이론을 입증하듯이 4단지나 7단지(동성아파트, 개화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유난히 구별짓기를 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6단지랑 달라서 영구임대 아니고 자가이면서 48평이나 되는 안정적인 직업과 재산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입증하듯이 다른 문화를 보여준다. 그래서 6단지에 주차된 차량과 4단지 혹은 7단지에 주차한 차들의 종류가 다르다. 마치 시골자브조르종과 BMW의 비교갔다고나 할까? 다소 비꼬는 투로 이야기하는 건 '그런데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썼기 때문이다. 아무튼. 6단지에는 독거노인, 장애인, 한부모가정, 저소득층이 모여 산다. 나는 당연히 저소득층으로 그 가운데 살고 있다. 

사실 나의 미래는 장미빛이다. 


처음에 없던 사람들이 가지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드러내고 보이고 싶듯이 이런 환경에서 이제는 가지게 되었으니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부모님의 얼굴에서 스치듯 지나간다. 대학에, 대학원에, 박사과정도 하고 있으니 부모님은 그동안 영구임대 산다고 받았던 수모를 한번에 덮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나 역시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말을 연신 외치면서 '나는 이 동에 사는 사람들과 달라'라고 하는 '구별짓기'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면서, 무엇인가 뿌듯한 듯이 잠을 청하곤 한다. 그러다가...그러다가...같은 층에 사는 치매걸린 할머니를 만나고, 우리 옆 호에 사는 탈북자 동생을 만나고, 다른 동에 사는 장애인들 분들과 만난다. 퇴근하고 들어오는 길에는 내가 자랑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들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우쭐대는 것도 없지 않았다. 


나는 비록 '거지'같은 영구임대 아파트에 살지만 언젠자는 여기를 떠날꺼고, '할 수는 있는데 안하는 거야!'라는 위선적인 단어들을 끌어 안고 살았다. 그러니 같은 동에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했을까? 다른 글에서 썼지만 '불쌍하다'라는 말은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될 말이다. 자신이 그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그 인식에서 '불쌍하다'라는 단어를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인가 의미있고 아름다운 일을 하루종일 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우리동네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점점 1.5평의 내 방이 가까워올 수록 죽음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모두에게 무시당해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참나... 이건 감정을 매일 느끼다니! 그냥 함께 산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우리 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점을 대변할 수 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싸고 효용이 높은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사치나 낭비는 아예 배제되고 가장 오래가고 가장 튼튼한 것을 합리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가난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합리적'으로 더 싸고 좋은 것을 선택하고 흥정하고 발품을 팔아서 시장에서 사온다. 우리 어머니는 항상 시장으로 향해서 다리가 아프더라도 싸고 질 좋은 과일이며 채소, 고기류를 사오신다. 어머니는 내가 보기에는 고등학교만 나오셨더라도 국회의원이나 글로벌 리더가 되셔야할 분인데,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셔서 자신의 두뇌를 퍼즐과 책읽기로 풀어내신다. 생각해보면 1954년에 태어났는데 전쟁이 끝나고 이제 1년 후다.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재산이 있고 학교를 다닌다는게 더 이상하지 않는가?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 옆동네에 동갑이었으니 말 다했다. 부모님의 검소함과 합리성은 가난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 우리 아버지. 아무런 연고없이 서울로 무작정 '비숙련노동자'로 편입된 아버지는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하다가, 1970년대 이후에 수출이 활성화되고 기성복이 나오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그 양복점은 없어졌다. 돈암동에서 조금만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명품 자켓 몇개 도둑맡고 그것을 갚느라 결국 가게를 접게 되었다. 막노동에 1호선 청소에 전전긍긍하다가 그래도 거기서 배운 '돌돌이'기술을 가지고 지금 큰 건물 청소반장이 되었다. 정말이지 인생 최초의 따박따박나오는 월급이라니. 어머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방화역 근처의 오피스텔의 청소를 도맡아하는 용역회사에 취직해서 지금까지 거의 10년을 일하고 계신다.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없는 살림에도 책은 항상 끊이지 않고 지원해주시고, 보상심리든 혹은 정말 아들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든지 나의 학업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말은 뻔지르하다. "전세계에서 빈곤에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합니다!"라고 하면서 집으로 들어오는 내내 내가 전세계의 가난에 허덕이는 그 친구들보다 더 가난하다라는 것을 느낀다. 중학교때부터 가슴속에 응어리가 된 영구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과 무엇인가 배우고 또 얻을 것보다는 더욱 배려해야하는 사람들 곁에 살고 있다라는 것이 스트레스가 된다. 방화동 6단지 모두가 그렇다. 서로에 대해서 연민의 감정을 느끼기 보다는 서로에 대해서 수치심을 가지고 빠르게 현관문을 닫는 모습. 가난은 '불편한 뿐'이라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의 의도는 이해하나 그 표현은 매우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든다. 



죽음으로 들어간 것 같은 방에 도착하면서 푹푹 찌는 날씨에 에어컨과 멀어져 있는 축축한 방안의 공기를 느낀다. 열대야가 심해지는 날이면, 어찌할바를 몰라 그냥 누어서 숨을 '훅훅'쉬면서 빨리 잠이라도 들기를 바랄 뿐이다. NGO단체라도 안 다녔으면 빨리 돈벌어서 좋은 집에 괜찮은 차를 타고 여유있어 보이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남들에게 보일수도 있겠지만 음~나는 글렀다. 이미 가치관이 이렇게 자리잡아서 돈을 버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그래도 스스로는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 생각이 강해지는 것 같다. 6단지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나의 위치와 감정, 내 방의 습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에.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같이 살아본다는 것과 같다


이런생활이 지치기도 하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나는 그래도 이 생활을 꿈만 포기하면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1800년대 영국 노동자들의 삶이 그랬듯, 196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들의 삶이 그랫듯이, 지금도 하천가 흐르는 물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필리핀 빈민가의 아이들의 고달품이 그렇듯이.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함께 벗어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나혼자 벗어날 수 없으니 함께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나만 행복할수 없으니깐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인가를 바꾸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래서 때론 좌절이 된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다른 사람이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나는 자유주의자라고 하고 싶다. 내일을 희망할 수 없는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나 역시 여기서 함께 무엇인가를 바꿔볼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내 안에서 '구별짓기'라는 애매한 욕망과 마주한다. 나는 달르기 때문에 할 수 있다라던가, 나는 그래도 같이 있어주는거야와 같은 아주 미묘하지만 가난과 구별짓기를 통해서 그래도 그 중에서 '군계일학'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보다. 알량한 자존심이다. 사실 글을 쓰면서 마음을 다져가는 중이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자존심을 걷어내고 진짜로 바꿀 수 있는 길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니깐 말이다. 



잊혀진 자들의 이야기를 부활시켜야 한다. 잊혀진 자들의 마음을 읽고 누구라도 소중한 자신의 인생을 찾을 수 있게 길을 만들어야 한다. 6단지에서 자신의 청춘과 꿈과 하루의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름다움과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되기 위해서라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뀌어야 한다. 물론 가난하다가 행복을 모르지 않고, 가난하다고 사랑을 할 수 없지 않고, 가난하다고 미래를 꿈꿀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구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OECD최저의 기록들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가난을 미화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한다. 그냥 가난해도 괜찮아가 아니라 함께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러니 여기를 더 좋게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나가는게 아니라, 운동장을 다시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잠시 멈춘 사이에 신림동 살인사건이 났다. 길가던 행인을 무차별적으로 무자비하게 살해한 전과 3범이 청년이 "나만 불행한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도 불행하라고 그랬어요"라는 말을 늘어 놓는다. 이유없는 죽음을 당한 분들의 명복을 빈다. 또한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빛이 비추길 원한다. 그러나 너무 슬픈일이다. 다 같이 행복을 누릴 수 없으면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지금도 내일을 희망할 수 없이 죽음으로 끌려가는 이들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더 늦기전에 한발짝이라도 걸어가야 한다. 30도를 넘나드는 방안의 공기를 참으면서 어떻게 바꿀까를 고민하면서 연구한다. 잊혀진 이들의 이야기를 꺼내서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는 일을 하러. 




https://www.youtube.com/watch?v=SCt-Fz2-rGo&list=RDSCt-Fz2-rGo&start_radio=1


https://brunch.co.kr/@minnation/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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