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중심의 리더십을 향하여
어느순간 창문에 비친 나를 본다. 앉아서 3시간내내 꼼짝도 안하고 있는 엉덩이의 쥐가나는 현상을 경험한다. 어릴적부터 항상 '실력'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나도 좋은 집에 태어났으면, 유학다녀왔으면, 학원만 갔었어도'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스스로 열등감을 잠재우곤 했다. 그런데 불쑥불쑥 누군가가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잠들어 있던 괴물이 깨어나듯이 열등감이 고개를 들고 활화산을 뿜으면서 '나도 잘할 수 있어! 나도 똑똑해!'라며 마음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이것저것 뒤지다가 다시 일상의 무료함으로 돌아오곤 했다. 자리에 앉으면 10분이 멀다하고 들락달락 거리기가 일수였고, 집중력이라는 1도 없는 집중력장애가 있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무엇을 하면 하나 진득하게 하지 못하고 매번 두리번 두리번 거렸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 창문에 비친 나를 봤는데 벌써 2시간이 지났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앉아서 계속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수가 있나? 나도 모르고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해보면 대학원을 2번 다니고 방통대까지 다니면서 밤을 새기를 밥먹듯이 했떤 때가 생각난다. 형질전환이라고 하는 무형의 변화가 유형의 변화를 만들어내기까지 한계를 넘어서기를 반복한 것 같다. 그런데 그 한계는 항상 내가 거기까지만 할 수 있다는 '지점'이었다. 그래서 그 지점에 가면 항상 넘어지거나 되돌아서거나 회피해 갔더랬다. 어렸을 적에는 집중력이 없었던게 아니고 내가 그만한 역량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깐 계속 회피해서 돌아갔다 왔다 하면서 사람들에게는 변명을하고 있었다.
변명하고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사람의 슬픔을 아는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고 있으면서, 자기 스스로도 알고 있을 때 아무도 모르지만 내 영혼은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비굴하고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는 내 그림자가 영혼의 울림이 없어질 때다. 나는 그래 원래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나는 원래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고 변명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언제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래도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게, 인간은 원래는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를 속이지 않는 용기가 생기기 전까지 나는 계속 넘지 못하는 지점에서 애매한 이유를 만들어서 안하는 것처럼 말했다. 못하는 거면서 말이다. 과거의 내가 이 글을 읽으면 얼마나 부끄러워할까?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알지 않는가? 나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스스로를 알아간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어떤 상태인지를 알고 또 알아간다는 것이 그래서 제일 중요하다. 사건은 언제나 인식하고 나면 과거가 되지만, 되새길수록 사건은 다양한 해석을 낳기 마련이다. 어릴적 내가 멈춰섰던 곳에서 나는 지금도 몇번을 맴돌고 있는 것 같다. 몇가지는 극복했지만 몇가지는 항상 거기에서 다시 되돌아가는 나를 만난다. 그래서 중간중간 이 지점을 넘어서기 위해서 몇가지 원칙을 정한 것 같다. 나 스스로 약속하지 않으면 결국 흐물흐물해져서 애매하게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꼭 붙잡아두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활을 유지해주고 그나마 역량을 만들어 준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몇가지의 원칙
1. 반드시 하루에 1개 이상 글을 쓴다. 짧은 '시' 혹은 중간정도 길이의 '수필'이라도 반드시 남긴다.
2. 수업이나 강의를 들으면 반드시 그날 그시간 안에 글로 남긴다. 2시간의 수업시간동안 마무리 해야 한다.
3. 출근할 때 책 1권을 읽는다. 책의 모든 부분을 읽지 않아도 되지만, 중요한 부분을 캐치해서 인스타에 남긴다.
4. 새로운 것을 배우면 그 전에 있던 것들과 연결시켜 본다. 오늘 새로운 개념을 배웠으면 머릿속에 존재하는 개념들과 서로 연결시켜 본다.
5. 내가 너무 지나쳤던 것은 아닌지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함브로 말하거나, 너무 교만했거나, 생각이 없이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6. 출근하면 30분! 반드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글을 남긴다.
7. 하루에 20분달리기 20분 유산소 운동을 한다.
8. 한주에 한명씩 철학자를 공부한다. 요새는 중세철학을 공부한다.
9. 일주일에 2개 이상 스터디에 참석한다.
10. 멘토링을 하는 친구들이 부르면 언제든 시간을 만들어서 만난다.
이런 원칙들을 가지고 살면서 어설푸고 부족하지만 조금씩 어제보다는 좋아지는 오늘을 만난다. 좋은 원칙을 가진 삶은 좋은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러한 루틴한 삶을 넘어서 이제 무엇인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이렇게 공부하고 준비했으면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되고, 이 시대가 가진 문제에 대해서 어떤 대안이나 해결책을 조금이라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이제 막 시작했지만 예전에는 그래도 하는척만 하고 아무것도 안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활동과 참여를 하면서 인생을 갈아넣어야 하는 시간이 온 것 같다. 이렇게 대충대충하면 안된다. 정말로 진지하게 안아서 집요하게 대안을 찾고 집중해야 한다. 요즘에 고민하는 것들은 이런 것이다.
요즘의 고민들
1. 청년실업과 경제레짐
청년실업이 작년에는 50만명이었는데 이번년도가 저물은 오늘은 126만명이라고 한다. 100만명을 넘어서는 청년실업은 그동안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과 경제적 불평등을 방관한 결과이면서 기업들이 '자유시장'에서 '시장실패'를 혁신으로 끌어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시점에서 이러한 청년실업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과연 '최저임금'만 올린다고 가능한 것인가? 구체적으로 케인즈학파의 재분배정책이 가져온 결과는 평등은 이루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은 힘든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슘페터주의의 '파괴적 혁신'과 같은 혁신을 위한 로드맵을 다시 짜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을 통해서 청년실업을 해결할 교육적 대안, 시장질서의 재편과 기업 비지니스모델의 재설계가 가능할까?
그렇다면 세계의 다양한 국가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대응했는가? 제도로 해결했는가? 기술로 해결했는가? 교육으로 해결했는가?
케인즈학파는 '개인에 이로운 것이 전체 경제에는 이롭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재분배 정책을 통한 형평을 이야기하고 국가가 나서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사용해야 함을 주장했다. 슘페터주의는 자본주의 하에서 기업의 관료화를 비판하면서 '혁신'을 강조하였다. 이는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자본주의의 '잉여생산력'을 '혁신'으로 교체하려는 슘페터의 전략이었다.
2.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
요즘 한창 물리학이 대세를 이룬다. 물리법칙으로만 보더라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확장하는 것은 없다. 어느시점이 지나면 멈추고 어느시점이 지나면 퇴화하고 어느시점이 지나면 파괴되어서 다시 새로운 것이 된다. 자본주의가 말하는 잉여생산은 어느순간은 멈추고 그것을 서양의 대부분의 나라들과 현재 우리나라가 경제성장률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체제의 전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지 않는 이상은 앞으로의 미래는 매우 암울하다. 칼폴라니가 말한 '거대한 전환'이 자본주의가 시장의 논리안으로 오면서 '정치'보다 우선하면서 현재의 가치를 모두 자본으로 바꾸어 버린 메두사가 가진 마이더스의 손이 된지 오래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은 생기면 방어하는 수준이지 미리 이것을 방지하고 또 아예 새로운 길을 만들기에는 '제한된 합리성'의 범위가 너무 좁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가는 것을 체념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노력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가장 고민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도 대안일 수 있지만 지금은 100년이 지난 시점이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고 우리의 생각과 삶에 맞는 방식이 필요하다.
어떤 대안을 만들고 어떤 방법으로 세계를 바꾸어 갈 것인가? 거기에 어떤 대안이 있는가? 어떤 제도적 설계와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어떤 것인가?
3. 조소앙선생님의 삼균주의 Tree Principles of the Equality, Triequism
대한민국헌법의 핵심이면서 '민주공화국'을 처음 만드신 조소앙선생님의 삼균주의를 오늘날에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치사상가로서의 면모를 키우면서 이러한 삼균주의의 오늘의 해석을 할 수 있는 관점과 수준이 필요하다.
이번정부 들어서 한창 건국절논란이 시끄럽다. 뉴라이트의 활동으로 건국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은 헌법의 기본정신을 훼손한 것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으로 시작하는 헌법전문에서도 3.1운동을 시작으로 해서 건립된 임시정부와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6차에 걸쳐서 1987년까지 개정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건국절 논란으로 일제시대의 친일부역자들의 역사지우기와 임시정부 법통을 지우고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세력들을 역사의 중심에 앉히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논쟁에 비하면 '삼균주의'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사상이다. 개인과 개인간의 평등은 기본적으로 보통선거를 통해 권력의 균등과 경제력의 균등 그리고 교육의 균등을 의미했다.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이야기한 삼균주의와 같은 사상이우리나라에 있었다는게 신기하고 놀랍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공화주의가 만나는 이 지점에서 다시 고민해보자. 과연 '미완의 기획'인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
4. 교회의 현재의 신앙의 미래
한국교회를 비롯한 북미교회는 이미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지 오래되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교회에서도 장로와 집사의 자리는 엄현한 구분이 생겼다. 대형교회와 개척교회는 왕과 노예의 신분과 같은 느낌으로 질서지워버리는 한국교회 안에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 갈 것인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고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교회가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또 포용하기 위해서 어떤 변화를 맞이해야 하는가?
고민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분석만으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으며,
해석만으로는 안주를 넘어 설수 없다.
고민은 끝도 없지만 이러한 고민들을 가지고 이제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고민들을 그대로 놓아 두거나 간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대안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만들어 내야 한다. 그사이에 매개하는 것들이 기술이 될지 공동체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그 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 주변의 칭찬보다는 너무 안일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지식의 저주'를 조금 피해간 느낌으로 한량처럼 살고 있었지 않았나? 자숙하면서 돌아본 추석연휴였다. 조금 더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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