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의 위기_한병철
인간은 망각을 선물로 받았다
우리뇌는 다 알고 있지만
일부러 무의식으로 데이터를 밀어 넣어서
신비의 공간을 만든다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기쁨의 순간도 고통의 순간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뇌에서 망각되어
존재속으로 들어간다
간간이 그 감정이, 정서가, 기분이
나오기는 하지만 오랜시간동안 축적된다
빈공간은 항상 오지 않는 것들이 도래하는
새로움의 공간이자 희망의 공간이 된다
인간은 그래서 미래를 또 기다리고
또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데이터가 축적되는 시대에서 존재론이란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기록된다
기쁨도 고통도 모두 티끌하나없이 샅샅히
기록되어 버린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고통은 배가되고 최고의 기쁨은 도래하지 않기에
다시 희망이 아닌 고문이 되어버린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데이터의 무게에 깔려서 점점 잠재력을
상실해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서사의 위기는 이야기의 실종이다
데이터는 임의대로 붙여버린 삶의 축적이 만든
숫자들의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언제나 이야기에 있다
데이터가 추측하는 통계에서는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디지털의 이진법만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준다
위기의 시대에 개인의 기억까지 데이터로
치환되어 버리는 소멸의 시대가
오히려 현대문명에게는 더욱
발전의 시기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데이터로 축적되지 않은 기억을 가진자가
앞으로는 삶을 더욱 깊이있게 살아낼 것이다
신비함이 가득한 그는 언제나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로
미래를 열어놓지 않았던가
공유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빛이 바라는 시대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마음 속에
소중하게 담아두고서는
나도 신비함의 공간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