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연애와 결혼에 관한 생각_차원을 통해서 바라본 인간관계
정신의 깊이가 유별난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그들은 처음에는 괴짜 같이 보이고, 어딘가 세상에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던지는 이야기가 냉소적으로 보이고, 회의적인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주변 사람들이 떠나게 된다. 내가 만났던 그녀의 정신의 깊이는 아직도 가늠이 안되는 것을 보니, 그녀의 차원은 얼마나 깊은걸까? 이런생각을 해본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이야기이지만 그녀를 만날 때를 생각해보면 그녀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다. 그리고 말미에 이야기하겠지만 사랑을 하는 법도 배웠던 것 같다. 그때는 배우기만 했지만 10년의 사이동안에 그 배움을 실천하면서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글로 쓰기까지 그녀가 나의 머릿속에 남겨놓은 정신과 생각이 차원을 가질 수 있다는 실마리는 잊을만 하면 알람을 주는 타이머와 같았다.
지난시간에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바운더리라는 개념을 빌려와서 인간사이의 바운더리를 확실히 하면서도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이 하는 '사랑'은 완전히 다른 방식의 관계를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했었다. 어떻게 보면 경계와 바운더리는 수평적인 인간들 상호 간의 관계라면 이번에 다루어볼 주제는 인간 내면의 깊이라서 수직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추후에는 수평적인 바운더리 개념과 수직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합쳐져서 온전하고 아름다운 형태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가져본다. 오늘은 그래서 차원에 대한 이야기와 그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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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차원은 점이라고 하면, 점들이 이어진 선은 1차원이 된다. 그리고 선들이 3개 이상 이어져서 면이 되면 2차원이 된다. 그리고 면이 4개이상 합쳐지면 3차원인 입체구조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모든 것이 3차원이다. 그리고 3차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4차원으로 가는 길인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의 변화를 축적하면 적분이 되고, 시간의 변화를 잘게 쪼개면 미적분이 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4차원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시간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고, 시간의 무상함을 느끼는 시기가 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차원과 차원에서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한다. 3차원에 있는 있는 인간은 비록 4차원을 살지만 3차원 이상을 볼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을 한번에 볼 수 없어서 인간은 기억에 의존한다. 3차원인 사람의 얼굴을 우리는 2차원인 면으로 이해한다. 피카소같은 천재가아닌 이상 3차원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깐 더 높은 차원에서만 현재 차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차원과 차원차이에는 조그마한 차이가 있는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레벨'과 같이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보는 계기나 다른 방법으로 보는 사람을 만나거나 그 사람들이 쓴 책을 읽거나 해서 옅볼 수는 있지만 스스로 그것을 체득하지 않으면 다음 차원으로 갈 수가 없다. 어쩌면 이지점일 것이다. 정신의 깊이가 일어나는 지점 말이다.
차원과 차원을 넘어서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축구선수가 패스를 안하고 자기가 몰다가 볼을 빼앗기던 과거를 잊고 패스를 하면서 운동장을 전체로 보면서 자유롭게 센터링을 날릴 수 있는 시점같은 것 말이다. 테니스를 치다가 어느순간 빈 곳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도 같다. 풀지 못했던 수학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이전 차원에서 풀 수 없었던 문제들이 너무 쉬워지기도 한다. 인간사가 이와 비슷하다. 어느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있고 그에 맞는 계기가 있으면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이전에 보았떤 차원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느낌, 생각, 관계가 펼쳐진다.
당신을 사랑하는 순간 나는 당신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어요.
_파울로 코엘료
사랑을 한다는 것은 바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전까지는 인간관계가 모두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관점이었다면, 사랑을 하는 순간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파울로코엘료가 말했듯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에 발을 내딛는 것과 같다. 그러니깐 다른 사람, 타자의 삶에 내가 엮여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 자체로도 완전히 다른 차원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을 하면서 느끼는 경험은 '인간이 이것때문에 사는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황홀함과 함께 자신을 초월하는 계기가 된다. 타자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 타자를 신비로 놓고 그 신비함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애무가 시작된다고 한다. 매번 만지고 스킨십을 했는데도 그 감각을 까먹어서 계속 만지고 싶고 붙어 있고 싶은 것 말이다.
그런데 사랑에도 차원이 있을까? 어떤 사람은 사랑을 3차원으로 인식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4차원으로 인식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고민을 해본다. 이미 고차원의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최소한 3차원 이상으로 보게 될 것이니깐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 현재의 기분에만 그 사람을 가두지 않고 자신의 차원만큼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을까? 그런때가 있다. 사랑했고 또 계속 그리워하지만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 그 사람이 너무 나보다는 대단해보여서도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반대로 너무 시시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깐 정신의 깊이라는 것이 사랑의 차원으로도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하면 그 차원을 넘어설 수 있을까?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고차원적인 정신의 깊이를 가질 수 있다면 사랑도 역시 높은 차원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에로스자체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살아을 말이다. 필로스와 아가페를 넘어서는 사랑 말이다.
데이터와 정보에 갖쳐서 성찰할 수 없고 타자로서 자기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는 과정에서 사랑을 가두어 버리는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낮은 차원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로사회를 썼던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사랑의 발명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방을 물건처럼 여기는 사람이 '나는 너를 사랑했어'라고 하면서 데이트폭력을 행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낮은 차원인지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마 그렇게 볼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낮은 차원으로 있을 때 높은 차원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낮은 차원의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통제하고 이용한다. 심리학으로 소비를 강화시킬수도 있고, 정치학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이념을 정쟁화시킬 수도 있다. '넛지'라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유인하는 '행동경제학'을 시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중에 이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책들이 나온다. 최근에는 '도둑맞은 집중력'과 같은 책들까지 나오니까 말이다.
초공간을 쓴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는 뇌의 발달에 있어서 차원의 진화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두뇌가 가장 처음 만들어지면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파충류의 뇌는 두뇌의 가장 뒷쪽에 있으면서 보이는 것에 반응하는 뇌이다. 그리고 포유류의 뇌는 일정한 의식을 가지고 상황을 파악하는데 이러한 뇌는 중간에 위치한다. 그리고 인간의 뇌라고 할 수 있는 전두엽을 포함한 신피질은 인간의 두뇌 가장 표면에 있는데 다른 뇌와 인간의 뇌가 다른 이유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고 예측해서 준비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예측하고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게 된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얼마나 미래를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차원의 논의로 돌아오면 가장 최선의 차원은 '미래'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에 귀결된다. 자기 인생의 미래, 자신의 가족의 미래, 자신이 속한 사회의 미래, 자신을 정체성 지우는 국가의 미래 그리고 인류와 우주의 미래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미래의 관점에서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가 결국 차원의 미래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테슬라와 스페이스X로 유명한 일론머스크는 자신이 만드는 전기자동차, 재활용 가능한 우주선, 1500km 진공관을 달리는 하이퍼루프, 태양열로만 돌아가는 솔라시티, 인간이 없어도 돌아가는 공장에서 일하는 AI로봇은 모두 '화성'에서 사용할 것들이다. 그러니깐 화성에서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공기나 먹을 것, 에너지가 없는 환경에서 화성을 개발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고민한 것이다. 그 결과 테슬라의 자율주행은 이미 동급의 전기자동차의 성능을 넘었지만 아직도 다른 차원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미래를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다면, 인간이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과연 미래를 생각하는가? 여기서 서로가 어디까지 서로의 미래와 가정의 미래, 관계의 미래를 보느냐에 따라서 관계의 질, 차원의 간격은 달라진다. 결혼이나 약혼과 같은 '서약'시스템은 그 자체로 '미래를 담보로 하는 약속'인 것이다. 그 미래에 내가 다른 누군가를 만나지 않기로 생각했을 때 정말 이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결혼식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혼율이 높은 이유는 결국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하지 않고 현재의 관점에서 그 사람의 상황이나 몸매, 재산을 보고서 했다가 관계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시기가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신중하게 미래를 그려보는 사람과 만나고 있다면 나 역시 그런 사람인지를 보아야 하지만 대차게 차였다면 아마 바로 이런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다. 남일 같지 않다. 왜 그렇게 정신의 깊이가 깊은 그사람이 나를 이성으로도 보지 않았는지는 당연해지는 시간이 된다. 글을 쓰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그 차원을 넘어서게 될까? 어떤 상황이 되면 차원을 넘어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단순히 호르몬의 영향이나 욕망의 해방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이 가진 최고의 인지능력을 모두 사용하여 전적으로 그 사람을 향한 의식을 집중할 때 일어나는 온전한 몰입이라고 정의해보자. 그러면 사랑한다는 것은 3차원으로 살면서 2차원을 인식하는 사람들을 단숨에 4차원의 '시간'의 관계로 끌어 올린다.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게 되고,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그림들이 한번에 그려지게 된다. 사랑하면 사람은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사랑하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라면 그렇게 판단해야함을 깨닫게 해준다. 사랑하면 기다리고, 사랑하면 머뭇거리고, 사랑하면 함브로 말하기가 힘들어서 소중하게 아껴두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4차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집중한 결과 스스로를 3차원으로 보는 것 정도에 그쳤던 인간이 상대방이 살아온 시간을 회상하면서 그 사람이 했던 선택과 마음의 결을 이해하고 보듬어주고 혹은 기다린다는 것이 이미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오직 사람에게만 보이는 사랑의 상태는 그래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오히려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되게 해준다. 정신의 깊이는 오직 만물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언제나 자녀들을 위한 희생과 겸손, 절제와 보살핌의 미덕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모라는 정체성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녀들의 모습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민하고 걱정하고 또 축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사람은 성인이 되면 받은 사랑만큼 상대방을 더 깊이 있는 사랑으로 대한다.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 사랑의 결과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만큼 놀랍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면 하나의 순간에서 영원의 미래를 보게 된다. 상대방이 엄청난 정신의 깊이를 가져서, 다시 말하면 차원을 넘나드는 사고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만드시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차원을 넘너드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이 사랑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정신의 깊이가 유난히 깊었던 그 사람은 지금 생각해보면 신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또 북돋아 주었던 것 같다. 때론 연민처럼 보이고 때론 무모한 것처럼 보이고, 모든 이들이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가 함께 걸어주는 모습에서 어쩌면 나는 사랑의 진짜 모습을 본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보여준 사랑의 모습이 나에게도 그러리라는 예상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게 나의 한계, 나의 차원에 갇힌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도 같다. 그녀가 보여준 사랑의 깊이가 얼핏 내가 보았던 정신의 깊이였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차원을 넘어선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미래를 예측하고 멀리보고, 현실은 더더욱 모든 것들을 고려하기 때문에 느리고 애매하고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프로이트에게서 시작된 욕망의 굴레를 벗어내려고 노력한 프랑스의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은 오직 전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전이가 되고 그렇게 쌓여진 자신안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사랑이 풍부한 사람은 그 전에 사랑을 많이 받아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만큼 더 깊은 것을, 더 다양한 것들을 보고 고민하고 또 헌신하게 된다. 사랑만이 차원을 넘어서게 만든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몇 달이 걸렸다. 의식에 관한 생각을 찾아보다가 미치오 가쿠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예전에 만난 그 사람이 생각나서 서로 연결해보기도 했다. 굳이 이성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진정으로 차원이 다른 사람을 여럿 만나기도 했었다. 결론적으로 차원을 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차원을 넘나들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그 사랑이 4차원을 넘어서 더 깊고 넓은 세계로 들어가게 만들었다는 것이고, 반대로 2차원 혹은 1차원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진실의 타임. 이 시간만 되면, 나오려고만 하면 내가 썼던 글들이 나에게 물어본다. '너는 그럼 정말로 사랑했었어?'라고 말이다. 나는 대답을 잘 못하겠다. 생각해보면 어떤 때는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떤 날은 그 사람의 성격이 좋았던 것 같지만 생각이 잘 안난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내 모든을 바쳐서라도 사랑했던 사람의 뒷모습이 나의 영혼에 비추일 때면 그 사람이 바라본 영원을 끝자락에 한 걸음 도착한 것도 같다.
차원을 넘나드는 사람은 경계에 갖히지 않고 언제나 자유롭게 사랑한다.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마다 그 사랑을 갈망하게 되고 이것을 경험해본 사람과 아닌 사람은 확연하게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신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지만 앞으로 적어도 50년은 함께 살게 된 배우자가 차원을 넘나드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더욱이 '사랑은 전이'된다고 하면 그 사람이 비록 그렇지 않을지라도 충만한 사랑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내가 그 충만한 사랑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 파충류에 머무르지 않고 의식을 가지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으로 돌보이는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가슴 뛰는 일일까? 이제는 나도 갈망만 하지 않고 정신의 깊이가 다른 그 사람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다른 이를 사랑하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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