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와 결혼에 관한 낭만적인 생각 #8_배우자의 조건
풀리지 않은 실타래를 가장 빨리 푸는 방법은 실타래를 자르는 방법이다. 결혼이라는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해결하는 방법은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다. 과거의 관습이면서도 청년들을 좀 먹는 이 못된 결혼이라는 제도를 해결하는 것은 스스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보면 가슴이 뛰고, 어떤 사람의 옆에만 지나가도 두근두근 거린다는 것을 숨길 수 없다. 평생 이것을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놓고 살기에는 포기에 따른 편안함보다 추구하지 않음에 대한 실망감이 더 커질 것 같다. 그래서 놓치지 않으려고, 동아줄이라도 붙잡아 보려고 이렇게 글을 남긴다.
신앙이 좋은 분들 중에서는 소위 '기도제목'을 적어 놓고 기도하면서 결혼할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데이팅앱을 통해서 여러 번 소개팅을 한 결과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우연의 우연의 우연으로 지나치다가 조그마한 사건이 생기면서 현재의 아내와 남편의 되기도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그들의 인생도 1번이고, 나의 인생도 처음이자 마지막이기에 알 수 없다. 그러나 스스로 더욱 인격적이 되어 가지고 개방성이 높아지며,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겼다고 자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도제목까지는 아니어도 나름의 조건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조건들을 보고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 기분이 좋아지기는 한다. 자신의 속물근성도 확인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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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자랑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가난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극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다. 배우자를 고를 때 가난을 경험하지 않고 혹은 지금 가난 속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자. 물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목적까지 모두 쏟아 내어 버린 과거의 대통령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가난을 통해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뒤에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좋은 부모, 좋은 집,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눈에는 많이 뛴다. 그리고 배우자감으로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야 성품이 올곧고 부모한테도 잘하고 자식한테도 잘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까지나 '자본주의'가 절대로 옳다고 믿을 때만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가 자긴 맹점과 한계를 오롯이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가진 조건이 누군가보다 상위에 있거나 그 사회의 중간정도 보다 높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안정적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포기해야 했던 것은 얼마나 많을까? 주위에 넘쳐나는 빈곤과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의 삶을 얼마나 외면했을까? 분명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저 사람은 삐뚤어졌어! 아니 잘 사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행복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데, 자기가 뭐라고 그냥 잘 사는 사람들을 욕해?'라고 할 수 있다. 십분 이해하고 인정한다. 나도 그런 환경에 태어났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면 안 된다. 자유를 추구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유를 말하는 순간 '다른 사람의 부자유를 이용해서 자신의 자유를 이어나가기를 원하는 이기주의자'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누군가 누리지 못할 때 자신의 자유를 부자유로 만들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몇백 번씩 쓴다고 자신이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나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면 난리가 난다. 자신의 특권이 자신의 자유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다음부터 그 사람이 말하는 자유는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한 모든 수단을 허용하는 요술 지팡이가 된다. 더군다나 그 지팡이를 자신의 배우자에게 넘겼고 자신은 여전히 리더라면 어떻게 될까? 역사상 수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타락시키고 허영심과 욕심으로 가득 차고 배우자에 의해서 몰락해 갔다.
다시 돌아와서, 가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이 왜 생기지 알지 못한다. 주변에 혹시 미래를 어느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면 그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살면서 가난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이 존재하려면 자신이 스스로는 안되고, 누군가의 도움이나 협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물론 가끔 이런 상황에서 '경쟁'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가난할수록 경쟁은 더욱 도태되는 무기가 된다. 반대로 가난을 경험한 이들이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대를 가지고 '누구 집 자식도 소중하지 않은 자식이 없다'라고 느끼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물며 이 사람이 배우자라면 어떻게 될까? 나의 잘못이나 허물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을 넘어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일까를 고민해주지 않을까?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자신이 배우자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간단하게 쓰려고 했던 첫 번째 주제인데 길어진다. 그래도 이 부분은 명확히 해 놓아야 한다. 가난을 경험하지 않고, 경험할 기회도 없는 사람이 배우자가 되면 세상은 온통 '소비와 낭비의 중간 어디쯤'일 수도 있으며, '안정과 행복 사이에 어디쯤'에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좁은 세상에 아이들이 태어나면 아이들은 부모가 마련한 안락한 둥지에서 자라나서 안락한 둥지를 부모에게 다시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안락함을 위한 보험으로 무럭무럭 자라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어느 정도 이기적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결과이며 나의 '이 정도'가 부모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께 효도는 부모님의 안락함과 행복이며 나 역시 자신을 낳아서 똑같이 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난을 경험하고 경험했던 적이 있는 사람들이 잘 자라면, 가난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주변에 후배지만 정말 훌륭한 친구가 있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자신이 진짜 가난했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며, 가난을 경험한 이상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가난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 친구는 그래서 가난의 한 중앙에서도 자신이 정말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갈구하는지를 계속 고민하고 질문을 던진다. 때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그 고민 속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소중한 것을 선택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런 사람이 배우자라면 어떻게 될까? 자신이 가진 환경이 주는 안정감이 아니라 이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누구라도 실패하거나 가장자리로 밀려날 수 있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욕망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주변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직도 배우자를 못 만났다면 이전에 가난을 경험했거나 지금도 가난을 경험한 사람을 만나라.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은 한계를 초월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첫 번째 조건으로 안 끝난다. 다음 조건들과 연결되어야만 시너지를 내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은 무엇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배움을 다시 정의한다. 배움이란 상대방이 '기억'한 것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기억은 반드시 2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다. 그러니깐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지와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복했던 때를 떠올려 보면 '어떤 행복함을 주는 이미지'가 사진처럼 떠오르고 그때 느꼈던 1차 감정(기쁨, 우울, 행복, 불안)과 2차 감정(수치심, 낭만적인, 치유되는, 죄책감, 미묘한 두근거림 등등)이 뒤 따라올 것이다. 어느 비슷한 이미지를 지금 보고 있다면 그때의 감정이 다시 떠오르면서 그 기억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학습이란 기억을 배우는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을 배우는 것이다.
책은 누군가의 기억의 연속이다. 누군가 자신이 본 것들을 감정에 실어서 보내는 책을 읽는 사람이 배우자라고 생각해 보라. 계속해서 누군가의 감정과 이미지에 집중해서 그것을 상상해 보고 더듬어보고 그려보고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배우자라고 생각해 보라. 그럼 그 사람이 그러한 헤아림으로 나를 헤어리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기억을 계속해서 배우려고 하기에 계속 대화를 하고 서로의 공감대 속에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지 않을까? 내가 화난 일에는 같이 화를 내면서 나의 기억을 공감해 주고, 내가 그 당시의 기억 속에서 이해한 지평을 같은 지평으로 연결된 배우자를 생각해 보라.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대부분은 이러한 배우자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생 '지평융합'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다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일 것이고,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활발한 뇌 작용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이해한 것들을 넘어서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이해해 주기 바란다면 그 사람이 이해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래로 열려 있고, 과거의 새로운 해석에 대해서 열려 있으며 누군가의 말에 열려 있는 배우자라면 반드시 배우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럼 이렇게 배우는 사람 곁에서 나는 어떻게 될까? 미래의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 당연히 미래로 열린 부모의 창문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그런 배우자라면 어떻게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때, '연금술사'로 유명했던 파울로 코엘료는 그 책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예술 같은 문장 속에서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세계가 얼마나 좁을지 혹은 넓을지 혹은 축축 하고 더려 울 지 혹은 반듯하고 청량감을 가지고 있을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한계를 정해놓은 사람은 자신이 전해받은 변동하지 않은 집을 지키느라 온 힘을 쏟는다. 자신의 미래도 밀어내고 배우자의 미래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싫어한다.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이 건축한 혹은 양도받은 마음의 집을 지킨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신이 지은 성 안에서 자신만 살고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가난한 속에서 배우는 사람이라면 부유함 속에서도 배울 것이고, 역경 속에서 배우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속에서도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쉽다. 지금도 당신을 만나는 데 있어서 세상을 학습하고, 인간을 학습하고, 누군가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다. 계속 만나면서 그 사람의 세상 속에 발을 담그고 조금씩 그 안으로 들어가 보라. 보드라운 바람이 불고, 아름다운 수풀이 우거지고 그 세계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순수한 나무가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술렁대는 바람의 노래를 듣고 있는 당신이 얼마나 행복할까? 양치는 언덕에서 그가 살아온 삶의 무게가 그의 인생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이 화음이 되어서 울려 퍼지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쁨을 느낄까? 그 세계를 같이 누리고 자신의 세계도 열어 놓고 서로의 노래를 들려준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이 될까?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또 배우고 있어서 당신에게 배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더 점점 더 넓어지는 세계라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낭만이 흐르지 않는가?
삶을 허무함에 놓아두는 사람들을 여럿이 만난다. 그렇게 된 이유는 삶이 너무 고달퍼서도 있지만, 너무 무료해서도 있다. 어릴적에 별로 고난이 없던 삶은 어느순간이 되면 고난이 없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삶의 비전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철학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계속 경험할수록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과 비전을 찾게 되어 있으니깐 말이다. 지난번 글에서 20대에서는 '매력'을 찾고, 30대에서는 '신뢰감과 안정감'을 찾고, 40대가 지나면 '독특한 가치'를 가진 사람을 찾는다고 정리했다. 어떻게 보면 삶의 비전을 계속 그리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독특한 가치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이 그리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도전을 할 수 밖에 없고, 당연히 실패는 상수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그 사람만의 가치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가치는 무엇인가에 무게를 더 두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것들이 많고, 그에 대한 스토리들이 쌓일수록 가치의 종류와 그 깊이는 깊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누군가와 만나려거든 신뢰감도 좋지만 삶의 비전을 계속 그리면서 자신의 가치를 깊이 끌어올리는 사람을 만나는 건 어떨까? 물론 지금 이 사람은 보잘것 없고 '이상주의자' 같지만, 누군가 함께 이 길을 걸어간다면, 또 응원도 하고 때론 힘들 때 위로도 하면서 함께 만들어 간다면 그가 꾼 비전과 나의 비전이 만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자본주의는 항상 교환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값어치와 자본'으로 매개시켜 버리지만, 비전을 계속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값어치가 사라진 지점에서 또 새로운 비전을 그리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
나이가 들 수록 그 사람이 끝이 너무 보여서 더 이상은 기대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딱 10분만 이야기해도 더 이상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 자신의 생각의 한계에서 넘어갈 마음이 없고, 굳어진 마음을 새롭게 돌려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는 사람들. 그들은 절대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없다. 그러니 새로운 비전을 품고 계속 그것을 그려가는 사람을 만나면, 아마 인생은 매우 많은 실험과 도전으로 가득찰 테지만 매번 '다음은 또 무엇이 시작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점점 즐거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마냥 이상적인 비전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에 기반한' 대안으로서의 비전을 품는 사람이 '매일 매일 쌓이는 성실함'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 무엇가 '멋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단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