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연애와 결혼에 관한 생각_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진 사람들
사람은 살면서 몇가지 문장을 간직하고 산다. 때로는 그 몇가지 문장이 중요한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자신이 한 없이 무너져 내릴 때 잡아주기도 한다. 나의 뇌리 속에도 사라지지 않은 문장이 있다. 인간의 정신이 성숙할 수록 기억은 언제나 문장과 문장을 이어지게 만들고, 하나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문장들의 연결이 결국 추억으로 변화한다. 나의 경우도 그런 문장들이 있다. 예전에 정신의 깊이를 알 수 없었던 그와 대화하면서 느꼈던 강렬한 인상이다. 물론 그 사이에 그가 기억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계속 남아 있는 문장이다. 그는 나에게 칼린지브란의 예언자를 소개해주었다. 예언자의 한 구절이었는데, 언제나 그를 생각하면 이 문장이 떠오른다. 칼린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두 사람 사이를 바람이 흘러나게 하라!
서로의 마음을 나누되 절대로 하나의 포크로 사용하지 말아라!
이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는 '꼭 붙어 있어야 하고', '좋아하면 서로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쉽게 흘려보냈다. 그런데 그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 해지더라도 이 문장은 나를 계속 따라 다녔다. 단순히 이성을 만날 때만이 아니라 친한 사람들을 만날 때도 문장은 가슴 속에서 빛이 났다. 그래서 어느정도의 거리를 두면서도 서로의 관계에 바람이 흘러가게 하고, 다른 이의 물건을 나의 것처럼 여기지 않게 되었다. 하나의 문장이 나의 경계를 잘 지켜주도록 만든 것이다. 오늘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알게된 지는 꽤 된 책이지만 '관계를 읽는 시간'에 나오는 '바운더리'라는 개념으로 연애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신기한게 이런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래서 레퍼런스를 남긴다!)
https://brunch.co.kr/@minnation/3407
조금 지난 드라마이지만 '타인은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이 있는 고시원 건물 전체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결국 주인공은 모든 사람이 적이라는 가정하에 자신이 가장 큰 괴물이 되어 있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은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자였던 샤르트르가 있다.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라는 실존주의의 철학에서 심오한 영향을 미친 샤르트르는 그의 저서 '존재와 무'에서 타인의 등장에 대한 불쾌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샤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실존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는데 타인의 등장으로 처음에는 주의를 뺏기고 나중에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이다. 샤르트르에게 타인의 등장은 자신의 뇌에 구멍이 나면서 자신의 존재가 '무'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는 타인은 고통이자 지옥이다.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한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은 신비'라는 낭만적이면서도 알듯모를듯한 이야기를 한다. 유대인인 레비나스에게는 자신의 스승인 하이데거가 만들어 놓은 '인식의 감옥'에서 나오게 만드는 방법이 필요했다. 나치의 전위 철학을 만든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라는 가정하에 인간은 모두 존재자로써 역사의 거대한 존재로 귀속되는 과정에 있으며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진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알고 있는 민족은 게르만 민족이었으며, 이것을 역행하는 민족이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나치의 학살은 존재에게 다가가는 위대한 일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스승에게 등을 돌리며 레비나스는 유대교 전통에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개념을 타인의 얼굴로 치환한다.
레비나스에게는 타인이 신비이다. 자신만의 독단성에서, 자기기만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중세시대를 떠올려 보면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문을 높게 만들고, 주변을 호수로 두르는 성에 사는 왕은 과연 자신이 갖힌 것인가 아니면 적들을 가둔 것인가? 레비나스가 보기에 현대사회에는 타인이 자신의 삶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처놓은 장벽들에 오히려 스스로 갖히는 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love youself'라는 단어도 사실 그 자체로 자기자신에 갖히는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레비나스에게는 말이다. 레비나스는 타인과 만나는 지점에서 '애무'는 항상 타인을 알듯 말듯 닿는 순간에는 인식이 되고 감각하지만 떨어지고 나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신비라고 말했다. 타인과 함께 살 수 밖에 없으며 타인이 있어야 우리의 자유가 확장된다는 레비나스의 논리는 '타자의 철학'으로 발전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비슷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끼여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은 샤르트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순간 불행이 시작되고, 결국 혼자사는 것이 행복이었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항상 그 사람이 곁에 있어서 아무것도 못한다!거나, 역시 그 사람이 없으면 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타인을 보는 나를 인식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지금 어떻게 느끼는지에 집중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반응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타인을 보는 방식으로 내가 나를 보고, 내가 나를 보는 방식으로 타인을 본다. 그러니깐 타인이 지옥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신을 지옥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폐를 끼치거나 깊숙히 관여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른바 피행망상으로 상대방을 만나면서도 거리를 두거나 아예 만남을 추구하지도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대로 타인이 신비인 사람이 있다.
다른 것에서 같은 것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찾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타인을 신비로 보는 사람은 다른 것에서 같은 것들을 찾아가면서 마치 '선물'을 발견한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른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삶이 온통 만개하는 것 같은 다양성을 타인에게서 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타인으로 열려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더 나아가서 세계에 대해서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열려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생각과 마음, 경험과 관까지도 무한으로, 신비로 열어 놓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서로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만날 수 있는 '자유'의 근원이다. 열러진 세계에서 열려진 타인에 대한 감정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언제나 그렇지만 이렇게 쓰다 보면 나는 잘 하고 있나?이런 생각을 한다. 이글은 나중에 내가 보려고 쓰는 글이니깐 언젠가 내가 이 글을 낯설게 봤을 때 과연 객관적으로 타는 타인의 지옥에서 살지 아니면 타인의 신비에서 살지가 드러나겠지.
다름에서 같음을 찾을 때, 타인은 우리에게 선물이 된다
위에서 설명했던 샤르트르도, 레비나스도 사실 1970년대 프랑스의 철학계를 풍미했지만 이들의 경험은 세계대전에서부터 온다. 인간이 타락하고, 타자의 생명을 갈취하는 세상에서 샤르트르는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타자의 그림자에 갖혔고, 레비나스는 타인의 종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생각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고민했다. 실존주의의 관점에서도 '존재와 무'라는 책에서 샤르트르는 자신의 시선과 존재를 빼앗아 가는 타인을 '무'의 원인이자 '무'로 돌아가야할 존재라고 여겼다. 반면 레비나스는 '윤리와 무한'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이 발견되는 신비를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바로 '구원'이 아니겠냐고 묻는다.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윤리가 그의 얼굴로 부터 흘러나오고, 그것에 복종해서 타인을 끊임없이 신비로 놓고 애무하고 만져보고 이야기해보고 또 생각하는 사이에서 자신에게는 자유가 가져온 구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심리적으로도 그렇고, 생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 육체로도 그렇고 경계는 일종의 '바운더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수 있을 만큼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범위를 만들 수 있다. 경계는 물리적으로는 나의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이면서, 정신적으로는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경계이다. 정서적으로는 당연히 나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다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경계에 갖힌 사람은 경직된 바운더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숨기고 자신의 이기심을 고집이나 신념'으로 위장하는 일을 다반사로 한다. 스스로에게는 '자기기만'이면서도 다른 이에게는 이것이 나의 '개성'이자 '나의 고유함'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대부분은 그 사람의 지위에 가려지거나 문화에 가려지거나 그 사람의 배경에 가려지지만 시간이 지나가는 관계에서는 알 수 밖에 없다. 경계를 자유롭게 넘어서는 사람, 다시 말하면 바운더리가 언제나 열려 있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컨트롤해서 자기기만과 자기망상에 빠지기전에 적당히 닫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자신의 경계가 무너지지 않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기복을 컨트롤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건강한 경계를 가지고 바운더리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자유롭게 경계를 열고 닫을 수 있고, 자신을 제대로 알기 때문에 언제 경계를 짓고 언제 경계를 세우고, 어떤 때 경계를 열고 어떤 때 경계를 닫아야 할 지를 알게 된다.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은 '자신의 경계를 잘 세우고 그것을 타인으로 하여금 불편하지 않게 공유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나와 같이 살아갈 혹은 살고 있는 사람이 이런 성숙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 상대방이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게 '자유로움'이다. 나의 실수나 나의 문제나 혹은 내가 기대고 싶은 어떤 것이나, 혹은 내가 요구하는 것이나 성숙한 경계로 맞이하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내가 만약 성숙한 경계를 가지고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라면 나와 만나는 상대방은 얼마나 자유로움을 느낄까?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부부에서 다시 도라볼 수 있다. 경계를 자유롭게 넘어설 수 있고 또 자신의 경계를 지킬수도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에 쌓아온 관계의 질량이 일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태아나자마다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서 자신의 바운더리를 정한다. 처음 태어난 아기는 자신에게 눈을 맞추고 웃어주는 어머니와 하나라고 느낀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어머니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때부터 자신의 바운더리와 다른 사람의 바운더리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고 청소년기를 지나치면서 자연스럽게 '개성'에 맞게 자신의 경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아예 대상과의 일체감으로 부터 분리되지 못했거나 혹은 처음부터 분리된 것으로만 인식하게 되면 바운더리가 결정되어 버린다. 전두엽이 자라나면서 아이들이 앞에 있는 이미지를 보고 자신의 이미지의 틀을 맞춰가는 시기에 부모님과의 교감이 없으면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어가면서 경직된 바운더리가 된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나는 혼자이고,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라고 하는 이기심과 교만함 혹은 비교의식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이것은 두려움의 일종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만들어낸 경계의 강직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같이 있지만 마음을 절대 열어놓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이다. 당연히 반대로 어린시절에 부모님과 일체감에 매몰되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부모의 경우에서 매몰된 아이들을 놓아지지 않거나, 반대로 아이들의 마음에서 '분리불안'증이 발동되면 아이들은 부모의 그늘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모든 것이 되어 버리는 희미한 경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경직된 바운더리나 반대로 희미안 바운더리는 연애를 할 때도, 결혼생활을 할 때도 드러나게 되어있다. 경직된 바운더리는 여내를 할 때부터 '나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이라는 명언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치장하지만, '사실은 나는 바꾸고 싶지 않고 누군가 내 삶에 들어오는 것은 두려워! 그러니 나를 그냥 내버려 두고 만약 더 내 세계로 들어오면 널 떠날꺼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다른 방식으로는 강한 자아같아 보이지만 그 반대다. 자신의 바운더리를 열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약한 자아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 강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들이 실은 더 약한 사람인 것과 같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성격이 세고, 스스로 잘한다는 교만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은 그 자체로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매여 있는 두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성향을 분석하고, 성격을 예측하고,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을 피하거나 혹은 좋아하거나 아니면 가스라이팅을 하거나 우위에 이고자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타자의 철학자'라고 불리우는 레비나스를 모셔온 것도 바운더리에 갖힌 사람을 어떻게 자유롭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이 가진 한계는 명확하다. 개인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사회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구분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거나 한 사람이 변화되거나, 한 사회의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한 사람과, 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방어적인 경계를 허물기도 하고, 사랑만이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희미해진 경계를 세워주면서 그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더 건강한 관계로 만나기 위해서이다. 물론 호르몬과 에로스의 영향으로 모든것이 다 좋아보니는 6개월에서 3년의 시간을 지나면서부타가 진짜인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이 기간 안에 눈에 쓰인 콩깍지가 떨어지고 상대방에게 자동으로 적용되는 필터가 제거되면서 다른 길을 걷거나 아예 마음을 안열기로 하거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게 정말 맞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자. 어릴적으로 트라우마로 경직된 바운더리가 되었든 희미한 바운더리가 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될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서로의 건강한 바운더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자체가 자녀들에게는 미래의 선물이 아닐까?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자. 방어형의 경계를 가진 사람과 방어형의 경계를 가진 사람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을려고 하면서도 그것은 존중의 영역이 아니라 서로의 두려움을 터치하지 않는 적당한 거리에서만 관계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느순간 방어를 하고 있는 서로를 발견하고 오랜기간 만난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저 사람을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지배형인 경계를 가진 사람과 순응형의 경계를 가진 사람이 만나면 당연히 쿵짝이 잘 맞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주종관계 혹은 갑을관계의 분위기에서 순응형들이 어느순간 지배형을 떠나거나 지배형은 어느순간 자신의 바운더리를 넓혀서 새로운 순응형을 찾아나설 것이다. 바운더리의 문제로만 보아도 이혼이나 바람을 피우는 것들이 아주 잘 이해가 갈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에 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진 사람이 지배형이나 순응형, 돌봄형이나 방어형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시간의 문제이긴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상대방도 조금씩 건강한 바운더리를 배워간다는 것이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와 같이, 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진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불렀던 예전의 전통을 생각해보면 명확하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또 추구하면서 성장하는 가운데 상대방이 가진 상처와 트라우마 그리고 두려움과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더 다가갈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 같다. 그 사람이 가진 상처와 아픔까지도 감내하고 품고 함께 걸어가기를 기도하고 기어가고 기여하는 것. 그래서 사랑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이런 방식이라면 요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겨우 성적인 관계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들은 많이 있지만 그래도 손에 꼽자면 오늘 소개한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프랑스의 '경계에 선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이다. 크리스테바는 누구라도 사랑하게 된다면 자신의 중심성을 상대방에게 선물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중심으로 세워준다고 한다. 그러니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계속해서 나의 중심에 놓고 그 사람을 세워주면서 나는 뒤로 물러서는 것과 같은 이미지이다. 한 사람만 그렇게 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두 사람다 상대방을 중심에 세우고 뒤로 물러나서 비천해지는 데까지 간다면 두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경계의 범위는 계속해서 성숙해지면서 계속해서 넓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가 겹쳐서 동심원들이 중립이 되는 지점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자유의지로 자신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건강한 아이들로 자랄 것이다.
성숙한 사람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결국 핵심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성숙한 사랑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깊이있게 해 본다. 이 글도 사실 거의 한달 내내 씨름하면서 써내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글은 항상 '타자로써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내가 쓴 글들은 타자로서 나에게 '너 잘하고 있어? 너의 목표는 뭐야? 너가 좋아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정말로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철학을 너가 할 수 있겠어? 크리스테바가 말한 비천하게 되는 것들들을 너가 할 수 있겠어?'라고 물어보는 것 같다. 불쾌하지는 않지만 쓰는 내내 다른 사람이 나와서 쓰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조금 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이런 생각도 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가 뭐가 필요해? 그냥 만나면서 준비하는 거야!'라는 말을 끊임없이 나에게 던진다. 그럴것도 같지만, 또한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언젠가 만날 때 나의 마음을 잘 정리하고 정돈하고 또 아름답게 말에 잘 포장해서 '선물'로 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러니 앞으로도 이런 고민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할 때 의지를 발동한다. '아 물을 먹어야겠다'라고 하면 물을 먹어야지라고 마음 먹는 순간 몸이 움직여서 냉장고로 가게 된다. 이렇든 우리의 모든 행동은 의지가 기반되어 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의지가 '무엇을 꼭 해야해!'라는 당위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선택이 놓여져 있을 때 정말 너가 하고 싶은 것은 뭐야?'라고 물어보는 시기가 오면 우리 인간은 단 한가지의 방향으로 그 선택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다름아닌 '더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는 행위'이다. 자유의지가 충만해지면 사람들은 더 사랑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니깐 자유의지가 성숙해질수록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아름다운 낭만을 간직한 그사람에게 내가 더욱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록 더욱 깊이있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자유의지로 자신의 경계를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면서 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궤적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진 사람'이 되어서 성숙한 사람을 한느 사람이 되고 싶다.
어른인 당신의 관계가 계속 힘들다면
‘관계의 틀’부터 살펴보라
사람들은 늘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내 맘 같지 않다”고 한탄한다. ‘성장하는 삶’이라는 화두로 꾸준히 활동해온 정신과 의사 문요한은 “상대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전혀 의도하지 않았어도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의 본질”임을 직시하라고 권한다. 내 마음 같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하다는 얘기지만, 이는 ‘힘들 테니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공허한 위로와는 다르다. 그보다는, 필연적인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계마다 ‘건강한 거리’를 되찾아 나답게 살아가라는 ‘변화’의 심리학이다. 『관계를 읽는 시간』에서는 그 변화의 출발점으로 ‘관계의 틀’에 주목한다.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관계방식, 이것을 이해하고 바꾸지 않는 한 관계에서 겪는 괴로움도 반복된다. 그러면 관계틀은 어떻게 알아보고 바꿀 수 있을까? 그 여정은 ‘바운더리’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프롤로그 / 아이의 관계에서 어른의 관계로
1부. 문제는 바운더리다
당신의 관계는 안녕한가요?
1장. 착해서 힘든 게 아니야
착해서 늘 손해라고요? 미숙한 착함과 성숙한 착함 · 그 여자가 지나치게 친절한 이유 · 착한 게 아니라 ‘약한’ 거
2장. 왜 상처는 가까운 사람이 더 줄까 ?
받았다는 사람은 많은데 준 사람은 없는 ‘상처’ · 바운더리가 모호해질 때: 관계의 소유욕 ·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랄 때: 결핍이 몰고 온 파국
3장. 조종하는 자와 조종당하는 자
연결감이 족쇄가 될 때: 감정사슬 · 감정사슬의 흔한 모습 · 감정을 조종하는 사람과 감정을 조종당하는 사람 · 어떤 사람들이 조종당하나요?
4장. 그런데 바운더리가 뭔가요?
내 자아의 울타리 · 바운더리는 무슨 일을 하나요? · 바운더리에 탈이 나면: 희미하거나, 경직되거나 · 균형 잃은 바운더리의 비극: 에코와 나르키소스
5장. 바운더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자아 탄생의 심리학 · 애착손상은 자아발달을 왜곡한다 · 그럼 모든 게 부모 때문이야? · 애착은 ‘복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 더 고려할 것: 문화와 바운더리
2부. 일그러진 바운더리 :
순응형 · 돌봄형 · 방어형 · 지배형
왜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을까?
6장. 바운더리에 문제가 생기면
인간의 발달 · 아이들의 트라우마: 트라우마성 발달장애 · 심리적 미숙아와 심리적 과숙아 · 바운더리 크로서와 바운더리 가더 · 바운더리 이상에 따른 역기능적 관계틀
7장. 누군가와 불편해지는 건 너무 싫어: 순응형
왜 그렇게까지 상대에게 맞춰야 하나 · 미처 해소되지 못한 분리불안 · 순응형이 대인관계에서 만나는 문제
8장. 네가 기뻐야 나도 기뻐: 돌봄형
누군가를 돌봐야만 살 것 같은 사람들 · 과잉책임감 덩어리 · 돌봄형이 대인관계에서 만나는 문제
9장. 나한테 신경 좀 쓰지 마: 방어형
너는 너 나는 나 · 뿌리 깊은 불신 · 방어형이 대인관계에서 만나는 문제
10장.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 지배형
지배와 착취로 얼룩진 인간관계 · 분노 뒤에 숨어 있는 ‘수치심’ · 지배형이 대인관계에서 만나는 문제
3부. 행복한 관계의 조건
바운더리가 건강해지려면 필요한 다섯 가지
11장. 관계조절력: 관계의 깊이를 조절하는 능력
건강함이란 삶의 양면을 아우르는 것 · 제대로 의심하고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 도식의 분화와 기본적 신뢰
12장. 상호존중감: 따로 또 같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 어울리되 같아지기를 요구하지 않는 능력 · 기계적 대칭성을 넘어서
13장.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 내 마음과 당신의 마음
안정애착을 맺는 양육자의 비결 · 왜 힘들다는 말을 못했냐고요? · 사람마다 ‘공감의 원’이 있다 · 바운더리에 따른 공감능력의 문제 · 내적 경험을 공유하는 것
14장. 갈등회복력: 회피보다 복구가 중요해
갈등에 대처하는 방식 · 갈등을 만들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갈등회복력’이다
15장. 솔직한 자기표현: 과장된 두려움 버리기
좀 더 솔직해진다고 해서 뭐가 두려운가? · 마음과 표현이 한없이 어긋날 때 · 부드러운 솔직함과 거친 솔직함
4부. 바운더리의 재구성
바운더리를 다시 세워 ‘나답게’ 사는 법
16장. 관계의 역사 이해하기
첫 관계가 우리의 관계를 지배한다 · 내게 반복되는 ‘관계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 · 무엇을 이해할 것인가?
17장. 애착손상 치유 연습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을까? · 과거와 현재의 관계 구분하기 · 상처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는가? · 나를 위로하는 능력
18장. 바운더리를 세우는 자기표현 훈련 P.A.C.E.
1단계. 일단 멈춤Pause_멈추고 자동반응을 보류하는 연습 · 2단계. 알아차림Awareness_내 감정과 욕구 그리고 책임 알아차리기 · 3단계. 조절Control_상황과 상대에 따라 자신의 반응 조절하기 · 4단계. 자기표현Self-Expression_솔직하게 그러나 정중하게
19장. ‘아니오’ 연습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다 · 부탁 훈련: 나는 부탁할 수 있고 당신은 거절할 수 있다 · 거절의 표현: 내가 거절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요청일 뿐 · 바운더리 유형별 거절 훈련 · 관계를 끊어야겠다면: 불쾌감을 차분히 표현하는 법
20장. ‘자기 세계’ 만들기
지금껏 내 삶에는 내가 있었는가? · 건강한 자기세계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 ·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내는 힘, 나의 ‘오티움’은 무엇인가?
에필로그 / 바운더리는 바운더리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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