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에 대한 인지연구(로널드 N. 기어리)_과학기술학편람 11장
오늘은 인지연구에 대해서 알아본다. 특히 과학이 어떻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지적 구조를 이해하고 인식능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는지를 살펴본다. 과학기술에 대한 인지연구는 1960년대 초, 과학적 발견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기존의 철학적 주장에 도전하며 허버트 사이먼의 인공지능 기반 계산 모델을 중심으로 다학문적 혼합체로 발전했다. 이 초기 연구는 케플러 법칙 시뮬레이션(Langley et al., 1987)처럼 인지 과정을 개인의 내재적 계산으로 국소화하여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분산 인지(Distributed Cognition) 개념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관점은 근본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PDP 연구와 허친스의 항해 연구(Hutchins, 1995)를 통해 인지가 사람, 도구(인공물), 그리고 사회적 환경 사이에 걸쳐 분산되는 시스템 속성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연구(SSS)와의 상보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확장된 인지 프레임워크는 이후 모델 기반 추론(Nersessian, 2003), 실험실 내 인과적 추론 및 유추(Dunbar, 2002), 그리고 문화적 차이가 인지 전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로 이어져, 과학 활동을 인지적, 사회적, 물질적 요소가 융합된 복합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부분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지금까지 과학이 왜 이러한 도표와 도식, 사진과 이미지를 사용해서 사람들의 인식구조를 바꾸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오늘은 이러한 과학기술에서 인지연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아본다. (생각보다 내용이 너무 길고 힘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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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과학기술에 대한 인지연구는 과학적 발견 과정이 근본적으로 합리적이지 않다는 당시의 표준적인 과학철학적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싹트게 되었다. 이는 과학적 발견을 인간의 인지적 과정의 산물로 보고, 이를 합리적인 접근방식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 새로운 시도였다. 이 초기 단계부터 연구는 과학기술사, 과학기술철학, 그리고 인지과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각기 다른 주제, 역사적 시기, 그리고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면서 다학문적 혼합체로 발전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학제 간 융합은 과학적 발견의 복잡성을 다각도로 조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허버트 사이먼의 계산적 접근_인공지능을 통한 발견의 시뮬레이션
초기 과학기술 인지연구의 가장 핵심적이고 영향력 있는 인물은 허버트 사이먼 (Herbert Simon, 1966, 1973)이다. 그는 인공지능(AI) 기법을 과학적 발견 과정을 연구하는 데 적용할 것을 최초로 제안했다.
주요 성과: '과학적 발견: 창조과정에 대한 계산적 탐구'
사이먼과 그의 수많은 협력자들이 수행한 이 작업은 1987년에 단행본 '과학적 발견: 창조과정에 대한 계산적 탐구 (Scientific Discovery: Computational Explorations of the Creative Processes)'로 출판되었다.
연구 내용: 이들은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 옴의 전기 회로 법칙, 그리고 화학 반응 법칙과 같은 역사적인 과학 문제 해결 활동을 시뮬레이션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의의: 이는 인간 과학자의 사고 과정을 계산 모델로 구현함으로써, 인공지능 분야에서 가장 인상적인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과학적 발견이 체계적이고 탐색 가능한 과정임을 입증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확산: 이 작업은 이후 미국의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과학적 발견과 이론 형성의 계산 모델 (Computational Models of Scientific Discovery and Theory Formation)'로 편집되는 등 관련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0년 후, 사이먼은 심리학자 데이비드 클라 (David Klahr)와 함께 25년에 걸친 연구를 논문 '과학적 발견 연구: 상보적 접근들과 서로 다른 발견들 (Studies of Scientific Discovery: Complementary Approaches and Contrasting Discoveries)'에서 개관했다. 여기서 "상보적 접근"이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사이먼은 과학적 발견 과정에 대한 이해를 총체적으로 보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상보적 접근방식을 제안했다.
사이먼의 상보적 접근법
과학적 발견에 대한 역사적 설명: 실제 역사적 맥락과 자료를 분석한다.
심리학 실험: 과학 관련업에 종사하는 비과학자들을 대상으로 과학적 사고 과정을 실험한다.
과학 실험실에 대한 직접 관찰: 실제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현장을 관찰하여 자료를 수집한다.
과학적 발견 과정에 대한 계산 모델: $\text{AI}$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발견 과정을 시뮬레이션한다.
사이먼의 작업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80년대에는 나중에 과학적 발견에 대한 인지연구로 인정받게 되는 다수의 초기 작업들이 진행되었다. 먼저는 심리학 분야의 발전이다. 심리학자들은 과학적 발견에 대한 시뮬레이션 실험을 진행하고 과학적 사고를 연구하는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특히 유추 추론 (Analogical Reasoning)과 정신 모델 (Mental Models) 이론이 발전하여, 전기의 발견이나 열과 온도의 구분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과학 사례에 적용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 과학철학 분야의 전환이 일어났다. 주지하듯이 과학철학자들은 토머스 쿤 (Thomas Kuhn)의 혁명적인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의 영향으로 개념적 변화 (Conceptual Change)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이고 누적적이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했으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게슈탈트 심리학의 원리 (인간은 대상을 개별적 부분의 조합이 아닌 전체로 인식한다는 주장)를 끌어들였다. 이로 인해 과학철학은 과학적 지식의 변화를 인지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수용하게 되었다.
초기 과학기술 인지연구의 세 가지 특징과 향후 방향
과학 중심성: 초기 연구는 과학 (Science)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었으며, 기술 (Technology)에 대한 인지연구는 그 이후에야 발전하게 되었다.
다학문성: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인지과학의 서로 다른 측면(예:시뮬레이션, 유추, 개념 변화 등)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에, 이는 태생적으로 다학문적인 성격을 지닌다.
사회적 연구와의 단절: 초기 연구 대부분은 과학의 사회적 연구 (Social Studies of Science)에서 동시대에 이뤄진 발전(예: 지식 사회학 등)을 거의 혹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이뤄졌다.
이러한 단절 상황은 1980년대 말부터 과학의 사회적 연구와 상보적 관계를 형성하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앞으로의 연구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지연구의 주요 주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변화와 발전 양상을 더욱 심도 있게 탐구하게 될 것이며, 사회적 맥락과 인지 과정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보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분산 인지(Distributed Cognition)는 인지과학 내에서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개념이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인지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접근 방식은 인지연구 공동체와 과학기술의 사회적 연구(SSS) 공동체 사이에 건설적인 상호작용을 촉진할 중요한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기존 인지과학의 주류였던 "인지는 곧 계산이다"라는 패러다임은 인지 과정을 인간의 뇌 내부 활동에 국한시키며,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이나 환경의 역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분산 인지는 인지과학이 이러한 국소화된 계산 모델에서 벗어나, 인지 활동이 몸 외부와 사회적 맥락에 걸쳐 분산되어 일어남을 인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첫 단계이다. 따라서 분산 인지는 과학적 발견과 지식 형성 과정을 개인의 머리가 아닌 확장된 시스템의 속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전통적인 인지과학의 계산 패러다임은 인지 시스템이 기호 등의 표상 체계를 구축하며, 이 표상들이 명확한 규칙에 따라 변형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주로 디지털 컴퓨터와 같은 시스템을 인간의 마음 모델로 간주하며, 인지(계산)가 오직 개인의 내부에 국소화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 과학에 대한 인지연구 역시 이러한 프레임워크 내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며, 문헌의 제목에서도 계산적 접근의 중요성이 잘 드러난다. 이들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고려하지 않고, 시스템에 입력된 사회적 상황 관련 정보를 처리한 결과값이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관점은 모든 인지가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지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다는 강력한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반면, 과학의 사회적 연구(SSS)는 과학 활동 자체를 사회적 활동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인지는 자동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라는 훨씬 더 넓은 관념을 가지고 시작한다. SSS에 따르면 과학을 수행하는 모든 행위가 인지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되므로, 인지 과정은 개인의 머릿속을 넘어 집단적이고 상호작용적인 수준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자칫 역감소(reverse reduction)의 문제에 직면할 수 있는데, 이는 과학적 인지가 오직 사회적 수준에서만 일어난다고 가정하여 개인의 내재적인 인지 과정을 간과할 위험을 내포한다. 즉, 개인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내적인 과정이 곧 과학에서의 인지 이해와 동일하다고 전제함으로써, 사회적 환경으로만 모든 현상을 환원하려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최근 인지과학 내부에서는 인지가 인간의 내부에만 국소화되어 있다는 기존의 계산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인지 활동에 외부적·사회적 요소가 필수적이라는 의견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 새로운 연구들은 과학 지식을 창출하는 과정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 내부가 아닌, 신체 외부 즉, 도구, 아티팩트, 그리고 사회적 공동체 내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분산 인지 관점에서 과학적 인지 과정은 단순히 개인의 두뇌 작용이 아니라, 과학적 인지 결과물인 지식을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과정으로 확장하여 정의된다. 이러한 분산 인지의 아이디어는 PDP(Parallel Distributed Processing) 연구집단과 같은 인지과학 내부의 연결주의적 흐름에서도 중요한 이론적 원천을 얻었으며, 이들은 인간 외부 환경에서 일어나는 과학의 인지 활동에 대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과학기술 인지연구의 방법론적 변화를 이끌고 있다.
분산 인지 개념의 첫 번째 중요한 원천은 인지과학의 핵심 분야인 컴퓨터 과학, 신경과학, 심리학 등이 결합된 연구에서 나왔다. 1980년대 초 인공지능 분야의 PDP(Parallel Distributed Processing) 연구집단은 정보가 병렬적으로 처리되며 시스템 전체에 분산되어 있다는 기본 이론을 탐구했다 (McClelland & Rumelhart, 1986). 이러한 연결망은 기능적으로 인간 뇌의 신경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모델링되었으며, 패턴을 인식하고 주어진 입력에서 빠진 부분을 완성하는 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 연구 결과를 일반화하여, 인간의 인지 활동 중 상당 부분이 본질적으로 패턴 인식의 문제라는 핵심 주장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뉴런 기반의 패턴 인식 모델은 언어 처리나 복잡한 수학 계산처럼 선형적 기호 처리가 필요한 인간의 기본적 인지 활동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매클랠런드와 러멜하트는 인간의 복잡하고 선형적인 인지 활동은 외부의 표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조작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세 자리 숫자를 곱하는 과제를 수행할 때, 우리는 단순히 머릿속으로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 숫자를 쓰고 곱셈을 수행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호들은 문자 그대로 손으로 작성되며, 눈과 손의 운동 협응을 필수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인지 과정이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람은 외부 표상을 구축하고, 올바른 순서대로 계산을 수행하며, 곱셈값을 도출하는 등의 역할에 기여하고, 전자계산기나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복잡한 인지 과제를 수행하는 시스템은 사람과 외부의 물리적 표상으로 이루어진 전체 시스템이며, 인지 과정은 이 둘 사이에 분산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분산 인지 개념의 두 번째 원천은 인류학자 에드 허친스(Edwin Hutchins)가 저서 '야생의 인지(Cognition in the Wild)'(1995)에서 수행한 항해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이 연구는 항구에 다가서며 육지와 가까이 항해하는 "도선(piloting)" 과정을 민족지학적(ethnographic)으로 분석한 것이다. 허친스는 이 분석을 통해 사람 개개인이 훨씬 복잡한 인지 시스템의 단순한 구성요소일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선원들은 망원경으로 선박의 위치를 파악하여 측정값을 기록하고, 이 수치들은 전화를 통해 도선실의 항해사에게 전달된다. 최종적으로 항해사는 이 수치들을 정리하여 지도에 선박의 위치를 표시하는데, 최종 결과값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전까지 오직 항해사 한 명뿐이다.
허친스의 분석은 선박 위의 사회 구조와 더 나아가 미국 해군의 문화까지도 전체 인지 시스템의 작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시스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항해사가 관측을 하는 선원들보다 높은 계급에 있어야 하는데, 이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 구성요소와 관련된 사회 시스템은 단순히 요구되는 장치들의 물리적 배치뿐만 아니라, 전체 인지 시스템의 필수적인 일부가 된다. 결국, 사회 시스템은 인지적 노동과 정보가 어떻게 분산되는가를 구조적으로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선박 위치 결정 사례는 하나의 공동체, 즉 조직된 집단이 인지 과제를 수행한다는 면에서 집단 인지(collective cognition)의 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지만, 허친스의 분산 인지 개념은 이를 뛰어넘는다. 허친스는 인지 시스템의 일부로 사람들뿐만 아니라 장치(망원경)나 다른 인공물(지도)도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선박의 위치는 배 양편의 두 사람이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를 이용해 지도 위에 그려짐으로써 결정된다. 따라서 선박의 위치를 결정하는 인지 과정의 일부는 누군가의 머릿속이 아닌 망원경 등의 외부 장치나 지도 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즉, 인지 과정은 사람들과 물질적 인공물 사이에 실질적으로 분산되어 작동한다.
실험은 전통적으로 과학의 사회적 연구의 핵심 관심사 중 하나였으며(Shapin & Schaffer, 1985; Gooding et al., 1989), 인지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실험은 허친스의 항해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분산 인지 시스템의 작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험에 분산 인지의 관념을 도입함으로써, 과학 활동이 인지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다. 이는 인지적 분석 방식과 사회적 분석 방식을 상보적으로 활용하여 과학 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카린 크노르 세티나는 그녀의 저서 '지식 문화(Epistemic Cultures)'(1999)에서 고에너지 물리학과 분자생물학 연구를 탐구하며 분산 인지의 개념을 간접적으로 활용한다. 그녀는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에서의 가속기 작동이 수백 명의 연구자들의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를 "일종의 분산 인지", 즉 집단 인지(collective cognition)의 의미로 설명했다. 그녀가 묘사한 과학자들의 상황 판단, 협상적인 선택 등 다양한 참여자들의 복잡한 행동을 통해 실험에는 특정한 유형의 사회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그녀는 분자생물학에서는 분산 인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분자생물학 실험이 주로 다양한 장치를 가지고 작업하는 단 한 사람의 연구자만 포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지 분석의 관점에서는 허친스의 사례처럼 망원경을 이용하는 선원을 시스템의 일부로 포함시켰듯이, 장치를 사용하는 연구자 각자가 이미 분산 인지 시스템을 구성한다고 해석하며 연구와 차이를 보인다.
브뤼노 라투르는 '순환하는 지시체: 아마존 밀림에서 흙 표본을 추출하라'라는 논문(Latour, 1999)에서 토양학자들이 사용하는 토양 비교 분석기의 역할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토양 비교 분석기는 작은 상자들이 질서 있게 정렬된 얕은 선반으로, 가로줄은 채취 장소를, 세로줄은 깊이를 표시하여 토양 표본을 담는 격자 시스템의 좌표 역할을 한다. 토양은 진흙에서 모래로 변화하면서 색깔이 바뀌는 특성이 있어, 토양이 가득 채워진 이 분석기는 색깔 패턴을 통해 토양 조성의 변화를 곧바로 읽어낼 수 있도록 돕는다 . 이 사례에서 과학자들과 분석기에 배열된 흙 표본들은 상호작용한하며 분산 인지 시스템을 형성한다. 더불어 과학자와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환경(분석기) 사이의 상호작용 덕분에 과학자들이 단순히 패턴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복잡한 토양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낸시 네르세시언(Nersessian, 2003)과 그녀의 동료들은 실험실이 진화하는 분산 인지 시스템으로 가장 잘 해석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들은 실험실을 단순히 고정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구성요소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역동적인 문제 공간으로 바라본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지는 사람들과 인공물들 사이에 분산되어 존재하며, 시스템 내의 기술적 인공물과 연구자들 간의 관계 역시 실험의 진척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한다. 이러한 진화하는 인지 시스템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그들은 민족지학과 역사적 분석을 모두 활용하는 다학문적 접근법을 취한다. 즉, 실험실에 대한 심층 관찰뿐만 아니라, 실험 장치들의 역사 연구까지도 분석 자료로 통합하여 이용한다. 나아가 그들은 실험실에서의 학습이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인공물과의 관계 구축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실험실은 분산 인지 관념을 중심으로 사회적, 인지적, 역사적 분석이 융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통합 사례가 된다.
과학에 대한 인지연구는 인간의 정신 모델(mental model)이 도상적(iconic)이라는 관점을 따르며, 이는 인지 과정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전제이다. 여기서 정신 모델은 외부 현실에 대한 내부적 표현을 의미하며, '도상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생각이나 대상을 그림이나 이미지 형태로 나타내는 속성을 뜻한다. 도상적 정신 모델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개인이 익숙한 방에 대해 가지는 심상(mental image)을 들 수 있으며, 이 심상은 단순히 마음속의 사진이 아닌 도식적인 구조로 이해된다. 많은 심리학 실험 결과들은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이러한 방의 심상을 조사(inspection)함으로써 창문의 수나 위치 같은 방의 특성들을 효율적으로 알아낸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러한 내부의 시각적 모델은 과학자가 머릿속으로 현상을 시뮬레이션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리학자 기어리(Geary)는 과학 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신 모델보다 외부 모델의 역할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논의의 초점을 내부 인지에서 외부 환경으로 확장한다. 외부 모델에는 스케치, 그래프, 사진, 컴퓨터 그래픽 같은 시각적 모델뿐만 아니라 단순 조화 진동자나 이상기체와 같은 추상적 모델도 모두 포함된다. 기어리는 과학자들이 때때로 복잡한 명제 추론(propositional reasoning)의 형태를 거치지 않고, 시각적 표상에 직접 근거하여 신속하게 판단을 내린다고 보았다. 이는 시각적 정보 처리의 효율성과 직관성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외부 모델은 앞서 다루었던 분산 인지 시스템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적 인지 연구의 핵심적인 탐구 대상이 된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구딩(David Gooding, 1990)은 과학자들이 실험과 이론 구축 과정에서 시각적 표상을 광범하게 활용한다는 것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발견했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의 전자기 유도 발견을 위한 연구를 들 수 있다. 구딩은 패러데이가 연구 노트에 그린 수많은 도해(diagrams), 즉 시각적 표상이 패러데이가 자신의 복잡한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을 구축하는 과정의 결정적인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 이 도해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현상을 시각적으로 구조화하고 새로운 관계를 추론할 수 있게 하는 인지적 도구로서 기능했다. 결국, 이러한 외부 시각 모델은 과학적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분산 인지 시스템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과학 활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기어리(David C. Geary)의 이론
심리학자 데이비드 C. 기어리(David C. Geary)의 이론은 진화 교육 심리학에 기반하여 인간의 지식과 학습이 진화적 적응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설명한다. 그의 이론은 크게 지식의 이분법, 습득 방식의 차이, 그리고 일반 지능의 역할이라는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기어리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생물학적 1차 지식(Biologically Primary Knowledge)과 생물학적 2차 지식(Biologically Secondary Knowledge)을 구분하는 지식의 이분법이다. 1차 지식은 구어, 얼굴 인식과 같이 인류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진화를 통해 자동적으로 습득하도록 설계된 지식이다. 반면에 2차 지식은 읽기/쓰기, 형식 수학과 같이 문화적으로 중요하지만 진화적으로 특화되지 않아 명시적인 교육이 필수적인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의 구분은 습득 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1차 지식은 개인이 내재적인 동기를 가지고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습득할 수 있으며, 학습 과정에서 작업 기억(working memory) 자원을 적게 소모한다. 하지만 2차 지식은 학습을 위한 진화적 모듈이나 동기가 부족하므로, 상당한 인지적 노력과 명시적인 교수(explicit instruction), 그리고 의식적인 주의 집중이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론은 일반 지능(General Intelligence)이 특히 2차 지식의 습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1차 지식은 진화된 특화된 인지 모듈을 통해 효율적으로 처리되지만, 2차 지식처럼 새로운 영역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전두엽 피질의 유연한 사고 능력과 관련된 일반 지능이 필요하다. 따라서 2차 지식의 습득은 '무작위 생성 및 시험(random generate and test)'과 같은 노력이 많이 드는 전략을 수반하며, 이는 진화적 적응에 따른 인간 인지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개인들의 추론에 대한 방대한 실험 연구 문헌은 인간의 추론이 맥락(context)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고, 규범적 논리 원칙에 의해서는 약하게만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특히, 초기 연구들은 사람들이 논리적 과제를 수행할 때 일관된 편향(bias)을 보인다는 점을 입증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결국 인간이 실제 과학 활동이나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 추론 전략이 형식 논리학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는 개인적 추론에 대한 실험 연구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편향을 보여주는 선택 과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개인적 추론 연구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문제 중 하나는 1960년대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Peter Wason)이 고안한 선택 과제(Selection Task)이다. 한 연구(Evans, 2002)에서는 피험자들에게 카드 한 면에 알파벳, 다른 면에 숫자가 적힌 네 장의 카드를 제시하고, '카드 중에 한쪽 면에 A가 있으면 반대쪽 면에는 3이 있다'는 법칙의 진위를 결정할 최소한의 카드를 선택하도록 지시한다. 이 논리적 과제의 정답은 'A'가 적힌 카드와 '7'이 적힌 카드를 선택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A' 카드의 뒷면에 '3'이 아닌 숫자가 있다면 법칙이 틀렸음이 반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험자들은 일반적으로 제안된 가설을 반증할 수 있는 증거보다는 그것과 부합하는 증거를 찾으려는 경향을 보이며 'A'와 '3'이 적힌 카드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평균적으로 피험자의 10퍼센트 정도만이 정답을 맞히는 낮은 정답률을 보이며, 이를 통해 통상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확인 편향(confirmation bias)을 보인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제안된 법칙이 사회적 관습을 포함하는 현실적인 맥락과 함께 제시되면 추론의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문제의 법칙을 주류에 대한 법적 허용 연령과 관련한 '어떤 사람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면, 그 사람은 18세가 넘었을 것이다.'와 같은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피험자에게 제시된 네 장의 카드가 맥주, 청량음료, 20세, 16세를 나타낼 때, 법칙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는 '맥주' 카드와 '16세' 카드를 뒤집는 것이 정답이 된다. 놀랍게도 이 사회적 맥습 맥락에서는 평균적으로 피험자의 75퍼센트가량이 정답을 맞히는 높은 정답률을 보였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공유된 관습이나 친숙한 규범이 건조한 논리적 형태의 법칙보다 인간의 추론 과정에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러한 극적인 결과 차이에 대해 에번스(Evans, 2002: 194)는 인간의 추론에 근본적인 계산 편향이 존재하며, 이는 정보를 맥락화하는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적 관습과 관련된 문제는 이미 우리의 내부 인지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거나 쉽게 접근 가능하여 올바른 답을 유추하기 쉽다. 반면, 새롭고 추상적인 논리적 형태가 제시될 경우에는 이러한 맥락화 능력의 부재가 명확히 드러나면서 추론에서 오답을 이끄는 주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연 추론은 카를 포퍼(Karl Popper)가 주장했던 '일반 명제의 반증(falsification) 시도'를 따르기보다, 일상생활에서 유용한 확인(verification) 경향성에 의해 주도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수많은 심리학 실험(Kahneman et al., 1982)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규범적 확률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판단을 내린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대표적인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가상의 여성에 대해 단순히 '은행원'일 확률보다 '페미니스트이면서 은행원'일 확률을 평균적으로 훨씬 더 높게 평가했다. 이러한 판단은 두 진술이 동시에 일어날 확률은 각각의 개별 확률을 곱해야 하므로, 개별 확률보다 반드시 낮아야 한다는 합의 법칙(Conjunction Rule)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결과이다. 이러한 효과는 사람들이 확률의 객관적 법칙보다 특정 사례가 해당 범주를 얼마나 잘 대표하는가와 같은 직관적인 지각에 판단의 근거를 두기 때문에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명제에 추가적인 세부사항을 제공하면 이론적으로는 확률을 낮추지만, 그 사례의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을 높일 수 있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 지저렌저(Gigerenzer, 2000)는 이러한 대표성 휴리스틱이 일상생활에서는 일반적으로 유용한 전략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철학자 솔로몬(Solomon, 2001)은 이러한 개인 수준에서의 추론 편향이 집단에 의한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지식 구축과는 양립 가능할 가능성을 논의하기도 한다.
심리학자 케빈 던바(Kevin Dunbar, 2002)와 그의 협력자들은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의 주요 과학 실험실들에서 매주 열리는 연구실 회의(lab meeting)에 직접 참여하며 과학적 추론 과정을 현장 연구했다. 그들은 회의 내용을 녹음하고 과학자들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추론 유형을 정밀하게 분석했으며, 추가적으로 심층 인터뷰 수행 및 실험 노트 검토 등을 병행하는 다각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 광범위한 현장 연구 결과, 그들이 찾아낸 실험실에서의 주요 인지 활동은 주로 인과적 추론, 유추, 그리고 분산 추론의 세 가지였다. 이러한 결과는 과학적 추론이 단순히 개인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논리적 연역 과정이 아니라, 집단적 상호작용과 특정 환경 내에서 분산되어 일어나는 활동임을 시사한다. 특히 연구 집단은 개인이 보이는 확률적 편향과는 달리, 집단적 모델 형성과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던바와 동료들의 분석에 따르면, 연구실 회의에서 나오는 진술의 80퍼센트 이상이 특정 원인에서 특정 효과로 이어지는 인과적 추론임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러한 인과적 추론이 단일한 인지 과정이 아니며, 귀납적 일반화, 연역적 추론, 범주화, 유추의 활용 등 다양한 하위 과정들의 복합적이고 반복적인 연쇄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과적 추론의 연쇄는 회의에서 30~70퍼센트를 차지하는 빈도로 등장하는 예상치 못한 실험 결과에 대응하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과학자들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을 때, 처음에는 실험이 올바르게 수행되었다면 예측했던 결과를 얻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오류를 방법론적으로 범주화하려는 시도를 먼저 한다. 하지만 오류를 개선한 실험에서도 그러한 예상치 못한 결과가 계속해서 등장한다면, 그제야 과학자들은 그 결과를 탐구 대상으로 삼고 수정된 모델을 유추하는 인지적 전환을 일으키게 된다.
심리학자 던바(Dunbar, 2002)는 유추(analogy)가 연구실 회의에서의 추론에 공통된 특징임을 발견하며, 과학적 사고의 핵심 도구임을 강조했다. 네 곳의 실험실에서 열린 열여섯 번의 회의에 대한 일련의 관찰에서, 연구팀은 무려 99건의 유추를 식별해냈다. 유추는 과제의 성격에 따라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설명하는 과제이다. 이 경우, 유추의 원천 대상과 유추 대상 모두를 동일하거나 매우 유사한 연구 영역에서 가져오기 때문에 차이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이러한 유추들은 과학에서의 유추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과학적 정신의 일꾼"으로 묘사된다. 둘째로, 과제가 새로운 모델을 도출하는 것일 경우에는 유추 대상 상황과 실제 상황의 차이가 좀 더 크며, 원천 대상과 유추 대상은 추상적인 구조적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혁신적인 유추는 추론 과정에서 많이 활용되지만, 최종적으로 논문의 내용으로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분산 추론(Distributed Reasoning)은 주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실험의 수정으로도 사라지지 않아 탐구 대상 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인지적으로 어려운 경우에 두드러지게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 인지적 제약뿐만 아니라 사회적 제약을 모두 받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해법을 찾는 데 기여한다. 여기서 인과적 추론과 유추는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적인 인지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인지적 활동들이 개별적인 머릿속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분산 추론은 개개인이 가진 지식과 관점, 그리고 외부의 도구 및 인공물을 통합하여, 단일 개인이 도달하기 어려운 총체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던바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추론하는 방식에도 문화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과학적 인지 연구에 중요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도입했다. 그는 비슷한 규모, 시료, 방법을 사용하며 연구하는 미국과 이탈리아 연구실 회의에서 일어나는 추론을 비교했다. 두 실험실 구성원들은 동일한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학회에 참석했으며, 심지어 많은 이탈리아 과학자들이 미국의 실험실에서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지 스타일이 크게 달랐다. 구체적으로, 미국 과학자들은 이탈리아 과학자들보다 유추와 귀납적 추론을 더 자주 활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결과는 문화 전반에서의 차이가 과학자들 간의 인지 전략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하나의 단일한 인지 과정으로 과학 전체를 특징지을 수 없으며, 하나의 연구는 서로 다른 인지 과정의 혼합을 이용하여 수행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때 실험실에서 어떤 인지 전략이 지배적일지는 탐구 주제뿐만 아니라 주변의 문화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출간 이후 개념적 변화는 과학철학과 과학사에 주요한 관심 주제로 부상했으며, 이후 인지과학의 부상은 이 변화를 설명하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했다. 컴퓨터의 대중화와 함께 인지과학은 인간을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에 비유하며, 그 도구들을 과학적 개념 변화 설명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중요한 사례 중 하나가 낸시 네르세시언(Nancy Nersessian)의 모델 기반 추론(Model-Based Reasoning) 이론이다. 그녀의 이론은 정신 모델을 추론의 기본 틀로 삼으며, 과학에서의 개념적 변화 과정을 일반적 인지연구의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한다. 네르세시언은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수단으로 유추, 시각적 표상, 그리고 사고 실험(시뮬레이션)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모델에 초점을 맞추었다.
네르세시언은 과학에서 일반 모델(General Model)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모델을 추구하는 실제 시스템의 수많은 특징들로부터 핵심적인 변수만을 추상해낸 것이다. 한 가지 예로, 뉴턴의 중력 모델은 일반 모델이며, 주된 변수는 다른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 거대한 물체로부터의 거리의 역제곱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포알의 운동과 달의 운동은 변수만 다를 뿐 동일한 일반 모델의 사례로 간주된다. 대다수의 인지과학 문헌은 이와 함께 유추(analogy)에 초점을 맞추는데(Lakoff, 1997; Gentner et al., 2000), 생산적인 유추는 원천 영역과 대상 영역 사이에 구조적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 네르세시언은 원천 영역이 대상 영역의 일반 모델을 구축하는 데 제약을 가함으로써 모델 제작 과정에 기여하는 구조적 관계를 주장한다. 과학에서는 새로운 일반 모델을 구축할 때 생산적인 원천 영역을 찾는 것이 문제의 중요한 부분이며, 이는 일상적 추론과 구별되는 좋은 유추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과학의 수행 과정에서 도해와 그림의 중요성은 과학의 사회적 연구(Lynch and Woolgar, 1990}$)에서도 오랫동안 관심을 받아온 주제이다. 네르세시언은 시각적 모델과 정신 모델의 관계를 강조하며, 시각적 모델은 유추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일반 모델을 구축하는 과정을 쉽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그녀는 시각적 모델을 외부 표상으로서 인식하고 이를 분산 인지 시스템의 요소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관점은 시각적 모델이 사람 간, 그리고 분야 간에 모델을 이동시키는 중요한 인지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STS의 일반적 지식을 만들어냈다. 한편, 시뮬레이션 모델은 역동적인 모델로, 사고 실험이나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이 그 예시이며, 이는 모델의 중요한 변수를 찾고 수정하는 데 사용된다. 움직이는 배의 돛대에서 추를 떨어뜨리는 사고 실험에 기반한 갈릴레오의 유추는 이러한 시뮬레이션 실험이 유추의 특징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지연구 분야에서 기술(Technology) 분야는 과학 분야보다 연구가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술에 대한 인지연구에서 가장 내세울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기술적 사고(Science and Technology Thinking)'(Gorman et al, 2005)가 비교적 최근에야 출간되었으며, 이 책조차 14개 장 중 기술만 다룬 장은 5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과학을 함께 다루고 있다. 이는 기술적 문제 해결이나 설계 과정의 인지적 특성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여전히 부족함을 나타낸다. 마이클 고먼(Michael Gorman, 2005a)이 제안한 프로그램은 기술 연구에 대한 인지적 접근과 사회적 접근의 결합을 목표로 하며, 기술에 대한 다학문적 연구의 틀을 제시한다. 이 프로그램은 기술 연구의 발전을 위해 인지적 접근과 사회적 접근을 모두 포함하는 다학문적 발전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마이클 고먼(Gorman, 2005a)이 제안한 '전문성의 수준과 교역 지대: 기술연구에 대한 인지적 접근과 사회적 접근의 결합' 프로그램은 기술에 대한 다학문적 연구의 틀을 보여준다. 그는 기 존에 콜린스와 에번스가 제안한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기술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할 때의 세 가지 경험의 공유 수준을 다음과 같이 끌어온다. (1) 공유된 경험이 아무것도 없다, (2) 참가 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있다, (3) 참가자들이 서로의 분야의 발전에 기여한다. 그는 이러한 구분 이 인지연구와 연결된다고 보고, 의사소통을 통해 의미와 정신 모델을 공유하고 서로의 분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기술에 대한 인지연구는 인지적 접근과 사회적 접근 모두를 포함하여 다학문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고먼의 프로그램은 콜린스(Collins)와 에번스(Evans)가 제안한,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기술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할 때의 경험 공유 수준에 대한 구분을 끌어온다. 그 구분은 (1) 공유된 경험이 아무것도 없다, (2) 참가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있다, (3) 참가자들이 서로의 분야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세 단계이다. 고먼은 이러한 구분이 인지연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보고, 의사소통을 통해 의미와 정신 모델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특히 참가자들이 서로의 분야 발전에 기여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상호작용이 바람직한 목표라고 주장한다. 결국, 기술에 대한 인지연구는 단순한 인지 과정 분석을 넘어, 다양한 전문가들 간의 의사소통과 개념 공유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접근을 포함하여 발전해야 한다.
크노르 세티나의 '지식문화' : 지식 주체로서 개인의 삭제에 대한 정당성 여부
크노르 세티나는 고에너지 물리학의 대형 실험처럼 복잡하고 분산된 시스템에서는 실험 결과로 얻어진 지식을 생산해낸 주체를 특정 개인이나 소집단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지식 행위자를 확장된 실험 시스템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 시스템이 스스로 지식을 갖는다고 하여 "자기 지식(Self-Knowledge)"을 실험 자체에 귀속시킨다.
지식 주체 또는 인지 시스템의 일부로서 개인을 완전히 삭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개인의 역할은 형태가 변화할 뿐 본질적으로는 시스템 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론 1: 분산 인지 시스템의 구성 요소로서의 개인: 허친스나 네르세시언과 같은 분산 인지 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은 시스템 내에서 정보의 흐름과 처리에 필수적인 노드(node) 역할을 수행한다. 크노르 세티나가 강조하는 가속기의 작동 역시 결국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상황 판단, 장치 조작, 협상적인 선택 등의 개인적 인지 활동이 통합되어 발생한다.
반론 2: 인지적 공헌의 재해석: 개인이 최종 지식을 '혼자서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인과적 추론, 유추, 또는 전문 지식을 통한 기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분산 인지는 인지적 노동이 분산된다고 주장하지, 소멸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절충적 결론: 따라서 크노르 세티나의 주장은 "지식 주체"를 전통적인 개별 인간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이자 통찰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은 여전히 인지 시스템의 일부이며, 지식 생산의 사회적·인지적 과정에 필수적인 기여자이다. 즉, 지식의 소유 주체로서 개인을 삭제할 수는 있으나, 인지 시스템의 구성 요소로서 개인을 삭제하는 것은 분산 인지의 개념과 모순된다.
앤디 피커링의 비대칭적 개념 유지 입장과 강한 프로그램의 파급 효과
앤디 피커링(Pickering, 1995)은 분산 인지 시스템에서 의도나 지식 같은 속성들을 시스템 전체가 아닌 시스템 내 인간 구성 요소로만 부여하는 비대칭적 개념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상식에 부합하고, 과학사를 인간 행위자 중심의 서사로 유지하려는 과학사가들의 관점도 존중하는 장점이 있다.
강한 프로그램(Strong Programme)의 네 가지 이상(원인성, 공정성, 대칭성, 반성성)을 모두 받아들여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기계, 인공물, 자연 등) 모두에게 대칭성(Symmetry)을 부여할 경우, 그 파급 효과는 다음과 같이 광범위하게 나타날 것이다.
지식의 행위자 확장 및 인간 중심주의 해체: 지식과 행위의 원인을 찾을 때 인간의 의도, 합리성, 지식에만 초점을 맞추는 인간 중심주의가 근본적으로 해체될 것이다. 기계, 실험 장치, 심지어 토양 표본까지도 지식의 형성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준-행위자(quasi-agent)로 인정받게 된다.
도구의 역할 재정립: 과학 도구나 인공물은 단순히 인간의 의도를 수동적으로 실행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체적인 특성과 제약을 통해 실험의 결과와 방향을 능동적으로 규정하는 공동 행위자로 간주된다. 이는 과학의 역사가 단순히 과학자의 '발견' 서사가 아닌, 인간-비인간 간의 상호작용과 조율의 서사로 재작성됨을 의미한다.
책임과 윤리의 분산: 지식의 성공(진리)과 실패(오류)에 대한 책임이 더 이상 개별 과학자나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스템 전체로 분산된다. 예를 들어, 실험 오류의 원인이 복잡한 기계의 오작동이라면, 기계의 설계나 유지보수 과정(비인간 행위자)에도 책임이 일정 부분 부여될 수 있다.
역사 서사의 탈인간화: 과학사는 인간 행위자들의 영웅적인 발견 이야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행위자들이 엮인 네트워크 내에서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고 투쟁하며 안정화되는지(예: 라투르의 ANT이론)를 추적하는 객관적이고 비인간적인 서사로 전환된다.
정리해보자. 초기 과학기술 인지연구는 개인의 계산적 추론과 편향(Wason Selection Task)을 밝혀내는 데 집중했지만, 분산 인지 패러다임의 도입은 과학적 지식 생산의 주체를 확장된 시스템으로 재정의하는 중요한 함의를 제공했다. 던바의 실험실 연구는 유추, 인과적 추론이 집단적으로 작용하는 방식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문화적 차이가 과학자들의 지배적인 인지 전략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러한 결과는 과학적 합리성이 개별적인 논리적 완벽함이 아니라, 분산된 인지적 노동과 사회적/물질적 맥락 속에서 집단적으로 구성되는 현상임을 시사한다. 궁극적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인지연구는 개인적 정신 모델(Nersessian)부터 기술에 대한 다학문적 접근의 필요성(Gorman et al., 2005)까지 탐구 범위를 넓히면서, 인지적 분석과 사회적 분석을 통합하는 다학문적 융합체로서 과학과 기술 활동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밝혀나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과학기술학 편람에서 인지연구에 대한 정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