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커뮤니케이션
과학커뮤니케이션 수업을 듣는다. 매주매주 2~4개의 텍스트를 읽고 그에 대한 피드백자료를 써야한다. 1페이지 반이상만 쓰면 되지만, 이왕 쓰는거 열심히 써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고민하고 살펴보았던 철학적인 내용들을 모두 포함하여 제대로 써보고자 철학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장소와 비장소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가지고 미디어에 대한 이해로 넓히는 시간이다. 굳이 무엇인가를 해서 위대해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하면 위대해지지는 않는다. 오늘도 핵심으로 들어가보자.
참고자료_
1. Augé, Marc. 『비장소』, 아카넷, 2017.
- 장소에서 비장소로 (pp.94-138)
2. Meyrowitz, Joshua. 『장소감의 상실Ⅰ.Ⅱ: 전자미디어가 사회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 커뮤니케이션북스, 2018.
- 07. 물리적 장소와 사회적 장소의 분리 (pp.263-288)
- 15. 우리는 어디에 있었고 어디로 가는가 (pp.757-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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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공개된 미국드라마 '아메리칸의 신'에서는 두 종류의 신이 나온다. 미국을 주름잡고 있는 첫번째 신은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 영향을 끼치는 신으로 바람이나 눈, 농사와 생산량을 관장하던 신이다. 이에 반해서 새롭게 등장한 신은 장소가 아닌 공간에 살고 있는 신들인데 이들은 '가상공간'에 살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을 사용하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을때마다 힘이 세지고 존재가 더 확실해졌다. 새로운 신들이 등장하기 전에 과거의 신들은 인간들이 날씨나 기후,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행복을 만들어주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존재했었다. 이들에 대한 믿음이 커질수록 그들의 힘은 날로 강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제 사람들은 과학의 힘을 빌어서 과거의 신들이 행하는 일이 '미신'이라고 믿게 되고 오히려 가상 공간에서 존재하는 게임이나 정보, 뉴스들을 더 큰 믿음의 원천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드라마는 2011년 닐가이먼이 쓴 'Amrican God'을 영화한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장소에 존재하는 신을 믿느냐 아니면 공간에 존재하는 신을 믿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과 삶의 양태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더욱이 일정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 믿음의 대상인 신들의 힘이 강해지면서 그들의 영향력이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신들이 강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 되고, 현재의신들이 강해지는 것은 컴퓨터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현재의 신들의 편들이었지만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는 '미디어'가 신으로 등장한다.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장소와 공간이 아닌 일종의 '비장소'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만들어진 공간에서 사람들은 꿈을 꾸기도하고 판타지를 실현 하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신으로서 '미디어'는 장소와 공간 어느곳에도 속하지 않는 신으로서 최상의 권위를 누린다.
인식론적 전회가 끝나고 미디어적 전회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미디어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이전까지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가 '나의 정체성'을 형성했다면, 이제는 내가 어떤 것을 보는가에 따라서 나를 정의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끝나는게 아니라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재구성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과정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데카르트 이후의 공간과 시간의 개념과 19세기 현상학에 와서 현상을 구성하는 장소와 상황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것이 미디어적 전회를 통해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은 장소와 비장소, 공간과 시간, 물리적 장소와 사회적 장소와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를 통해서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정체성'의 근간이 어디에 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세상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들만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고이 명증성을 논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균일하고 논리적으로 규정되고 리듬을 만들어내는 '공간'에 대한 개념이 생긴다. 어떻게 보면 가상공간일 수 있지만 여기서 '공간'은 시간을 배제하고 그 자체로 기하학의 세계를 드러낸다. 공간에서는 익명성과 추상성으로 만들어진 도형과 거리, 무게가 설정되고 이것들의 합리적인 움직임의 축적이 시간으로 자리잡는다. 공간의 개념에서 인간의 존재는 공간에 존재하는 객체 중의 일부분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인간의 빈자리를 깨달은 학자들은 그 위대한 '관념의 모험'을 '현상의 다채로움'으로 돌렸다. 에드먼트 후설을 시작으로 의식의 명증성에 '시선의 명증성'이 추가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멈출 수 없는 시선과 의식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축적된 '장소'에 집중하게 되었다.
무감정의 공간에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명확한 해답을 구하는 방식으로 공간이 구성되기 때문에 기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자연의 난폭함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의 발달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다양한 객체와 주체가 얽혀서 시간을 만들어내는 장소에서는 공간이 뒤틀리면서 시간도 뒤틀리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시대의 시간이 같은 공간에 실현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나타나기도 하고 다양한 시간대가 각자의 시간적 빠르기를 가지는 '다중전환' multi-transformation이 일어나기도 한다. 장소의 개념에서는 이것을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에는 주체와 객체가 설정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상황은 계속해서 변화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인간에게는 기억이 되고 사물에게는 기록이 되어서 다른 시간에 전해진다. 역사는 언제나 이러한 시간의 축적을 공간에 앉히는 방법으로 존재했다.
개념사의 대가인 독일의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개념사'에 대한 고고학적인 접근을 하면서 개념은 반드시 시간인 tempo와 장소인 topos가 연결되어야만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시간이 달라지는데 장소가 같을 경우에는 그 장소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통시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고, 장소가 달라지는데 시간이 같은 경우라면 하나의 시간에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시적인 관점을 가지게 된다. 더욱이 하나의 개념이라는 것은 언제나 장소나 시간을 동일하게 가질 수 없음으로, 일정한 장소에서 만들어지는 개념은 다른 장소로 옮겨가든 아니면 시간이 지났든지 다른 개념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코젤렉은 '개념사의 역사'라고 불렀다.
개념사의 관점에서 미디어적 전회는 '공간'이라는 개념과 '장소'라는 개념이 중첩되는 변화를 가지고 온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진중권은 이것을 '파타피직스'라고 불렀고(진중권, 2014), 피지털커먼즈에서 이형석은 '피지털'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이형석, 2021). 현실과 가상이 중첩되는 곳, 공간과 가상이 중첩되는 곳 바로 미디어의 세계에서 공간과 장소는 미디어의 문법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우리는 장소의 상실인가 혹은 공간의 생산인가라는 질문 사이에서 미디어의 의미를 면밀히 들춰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상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정한 '상징'을 기표로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라캉의 개념으로 하면 '상상계'를 대표하는 '공간'과 '실재계'를 대표하는 '장소'의 중첩은 우리의 정체성 역시 다양한 경로와 방식으로 중첩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Augé, Marc은 '비장소'(2017)에서 장소와 비장소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장소가 정체성에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로 규정될 것이다'라고 비장소의 개념을 구분한다. 따라서 역사성이 없으며, 정체성이 없는 공간이 비장소가 된다. 이러한 비장소는 비인간성인 양태를 띄면서도 고독한 개인성, 일시성, 임시성, 찰나성이 지속되는 장소이자 공간이다. 비장소는 시대의 척도, 계량화할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에 철도노선이나 항공로, 철도노선, 고속도로와 교통수단, 공항, 우주항공기지나 거대 호텔체인, 톨이공원이나 대형 유통매장이 된다. 여기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삼을 수 있는 이야기가 존재할 수 없으며 역사성이 머무를 시간이 없는 곳이다. 니클라우스 루우만의 의하면 이 공간은 '인간이 없어도 알아서 굴러가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미셸 드 세르토는 장소와 공간개념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장소'와 '비장소'와 같은 대립으로 보지 않는다. 다시 마랗면 '장소'와 '공간'의 대립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근에 유행하는 개념인 '신유물론'에서 말하는 교차성과 횡단성을 공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간은 '실천된 장소', '동하는 것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되면 기하학적인 공간들을 횡단하는 보행자들이 존재하면서 그 안에 움직이는 것과 이동하는 것들이 계속해서 횡단하기 때문이다. 미셸 드 세르토는 몇 가지 기준점을 제시하는데 그 첫 번째 기준점은 메를로퐁티의 논의이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기하학적 공간'과 '인류학적 공간'을 구분한다. 인간이 살아가고 숨쉬는 실존적 공간으로서 인류학적 공간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본질으로 위치지어진 존재의 세계에 대한 경험의 장소이다. 이에 반해서 기하학적 공간은 이러한 관계가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으로써 한나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이야기한 '인공물'로써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기준은 그 유명한 소쉬르의 작업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바로 파롤parole과 발화행위acte de locution에 대한 것이다. 장소는 일정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 상황에서는 언어의 선택은 장소에 의존적이면서 상황에 관계적이다. 따라서 발화행위가 일어나는 장소의 중요성이 기준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추후에 '미더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발황행위에 대한 고찰을 해볼 수 있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서 우리의 언어는 일종의 '뉘양스'와 시제를 가지게 되고, 단순히 기표와 기의가 1:1로 대응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의성을 가진 기표가 상징으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는 장소 안에서 발화행위가 보여주는 역사성과 정체성을 볼 수 있는 기준이된다. 세 번째 기준은 장소에 깃든 '하기'와 '보기'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일종의 행위자에 의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여행은 언제나 '하기'와 '보기'의 연속지점들이 지도 안에서 좌표를 남김으로써 역사성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기준들을 기반으로 공간과 장소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장소는 하나의 사건이나 신화 혹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을 말한다. 이에 반해 공간은 하나의 영역, 두 개의 사물이나 두 지점들 간의 거리 혹은 시간적 크기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따라서 공간은 데카르트의 논리와 같이 추상적이고 상상의 영역이다. 비장소는 어떤 목적과 관련된 구성의 공간이면서 그 구성에 개인이 연결되는 공간이다. 인류학적 장소가 유기적인 사회성을 갖는다면, 비장소는 고독한 계약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초근대성으로서 비장소는 개인이 타자들과 계약된 관계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공간은 비장소와 장소가 서로 얽혀 있으며 서로에게 침투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비장소와 장소의 '폴딩'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했던 액체근대의 양가성을 만드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 결국은 어떤 지점에서 공간의 규정을 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으로써 정치의 역할일수도 있다. 근대성이 만든 푸코의 통치성이 장소의 개념 범주 안에서 운영되었다면, 초근대성이 만든 비장소의 개념에서는 이미 지배적인 가치가 되어버린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으로 운영되는 공간이다. 장소에서 비장소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장소가 가진 역사성과 정체성은 가치의 전도를 맞이하게 되고 비장소의 공간에서는 항상 합리성과 효율성의 가치에 의해서 지배받은 고독한 개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본 발터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서 점점 아우라를 잃어가는 사람들의 내면을 본 것은 아닐까?
사실 장소와 비장소의 구분을 통해서 공간의 개념을 분할하고 그것을 적용해서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다시 재구성하는 방식은 '인식론적 전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를 넘어서 미디어적 전회를 맞이했다. 전자 미디어의 출현으로 물리적인 장소에 균열이 생겼다. 이른바 현실과 디지털 혹은 가상의 중첩이 생겨나면서 인간이 마주는 사회적인 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해롤드 이니스가 구분한 미디어의 장소적 편향과 시간적 편향을 넘어서 마셜 맥클루언이 이야기한 '감각의 편향'이 장소의 개념에도 그대로 균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 장소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전자미디어를 통해서 얻을 수 있게 바뀌면서 전자미디어는 사회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정체성을 재형성하게 되었다.
전자미디어는 점점 투명사회로 넘어가고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온라인상의 행동이 데이터로 기록되고 공유되면서 우리가 검색한 것들과 시청한 것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보여준다. 전자 미디어는 정보와 경험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장소로 전달한다. 따라서 전자미디어를 시청하고 또 생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정체성도 생성하지만 사회적인 정체성의 생성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호튼과 홀이 주장하든 전자미디어는 '준사회적 상호작용'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인간관계로 이어진다. 준사회적 상호관계는 실제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만난 것과 같은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는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이야기할 때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행동이 변활수 있는가이다.
전자미디어는 자신이 가진 메시지와 함께 일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맥락을 경합한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그것들을 다양한 상상력과 다양한 실재의 이미지를 결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자미디어는 현실이 가진 장소와 시간의 특별함을 파괴하며, 특정한 물리적 공간에서 특별한 경험에 의존했던 집단 정체성과 사호화, 위계의 측면들을 파괴하거나 변곡하거나 새롭게 융합한다. 미국 드라마 '아메리칸 갓'의 단지 정보와 가상에서 작용하는 새로운 신들은 자신들을 믿게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과거의 신과 현재의 신들을 넘어선 '미디어의 신'은 매번 현실을 새로운 이미지와 융합하여 정체성을 재창조한다. 따라서 자신을 경배하라고 주장히자 않고 그들 마음과 머릿속에 녹여들어서 그들의 일부가 되고, 그들은 미디어의 일부가 된다. 이것은 '준사회적상호작용'을 'para'라는 영어단어로 시작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고 실제하지 않지만 진짜로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요소가 된다.
윤리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자신의 스승인 하이데거를 비판하면서 현대인들의 문제를 드러낸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존재는 거대한 존재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존재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그러한 인식론 자체가 존재론으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존재가 아닌 것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악마화하거나 배제시켜버림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에 집중했다. 근대성을 문제를 해결하는 담론으로 내놓은 '존재와 존재자'의 정의를 가로질러서 레비나스는 현대인들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이유는 '얼굴의 신비'에 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언제나 정의내릴 수 없는 신적인 신비의 표상인 얼굴은 타자가 신비롭다는 것과 함께 타자를 정의내릴 수 없음으로 인해서 타자가 영원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더욱이 우리는 타자와 만나서 살갗을 부비고 마음을 나누면서도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다시 그 사람의 몸을 통해야만 완전해 질 수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얼굴의 신비는 접촉의 신비와도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인류의 가장 시원인 '거주에 대한 향유'와와도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집을 떠나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영혼은 계속 불안을 경험해야하고 누군가에게 정복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누군가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우리는 '타자와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서로의 신비를 공유하고 서로에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기하학으로 만들어진 공감에 계약의 관점이 포함되면서 상상계에서 연역적으로 규정된 규칙들이 공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반대로 실제적인 제국의 논리에 의해서 장소는 구획되어지고 경계지어서 국가를 이루고 사회를 이루며 개인의 소유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공간에서도 멀어지고 장소에서도 멀어져서 정체없이 세상을 떠도는 노마드가 되었다. 노마드들이 자신의 쉴 곳을 찾아서 머무른 곳이 다른 아닌 미디어이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에서 자신이 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미디어는 처음에는 안락한 휴식처가 되지만, 점점 시간을 돈을 환산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넓히고 사람들의 영혼을 시간으로 빨아먹는다. 시간으로 이어진 현실과 가상의 세계에서 미디어는 꾸준히 '신'으로써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인간들의 '편향'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계속해서 비장소에 거주하면서도 공간을 생성할수 없을 때, 역사성과 정체성을 모두 공백으로 만들어 놓고 미디어에게 마음의 안방을 내 놓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외로움'은 전체적주의로 흐른다고 말한 한나아렌트의 말이 옳았다. 자신이 거주할 공간을 잃어버린, 그래서 자신이 실제로 서 있는 장소조차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자본의 제국을 사는 이들은 언제나 외로움의 습격을 받는다. 미디어는 헨델과 그레텔에게 계속해서 과자를 던져는 존재와 같다. 우리는 미디어를 접하면 접할 수록 점점 더 우리의 내면을 진공으로 만들어버릴 것이고 장소의 개념이 사라져버린 빈 공간에서 주입되는 계약과 소유의 콘텐츠들이 점점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체성과 역사성은 두 발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인간은 언제나 상상계와 실재계 사이에서 상징계를 만들어내는 플랫폼이다. 우리는 지배당한다고 하지만 실상 우리는 상상의 이미지를 실제의 몸의 움직임과 엮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우리의 것이었다. 언제나 모든 것에 시작은 인간의 상상과 실제의 몸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미디어는 이것을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매개체로써 미디어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거주의 공간, 향유할 수 있는 장소'인 타자의 신비로 발을 들여야 한다.
그럴려면 만나야하고, 손을 잡아야하고 포옹을 해야하고 어깨를 마주해야하고 눈을 마주쳐야 한다. 미디어로 인해서 '에로스의 종말'이 '타자의 소멸'을 가지고 왔다면 그 반대로 다시 타자와의 신비로운 만남을 통해서 '에로스의 부활'을 노래해야 한다. 그럼의미에서 미디어는 인간과 인간사이에서 또 하나의 플랫폼으로써 봉사할 수 있다. 있어야 할 것들이 원래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평화라면 인간이 이제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고, 서로의 영혼 안에서 안전하게 거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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