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커뮤니케이션
매주 과학커뮤니케이션 수업에서 발제하는 내용을 먼저 읽고 피드백을 남겨야 한다. 간단하게 써도 되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서 학문적 글쓰기의 일환으로 더욱 열심과 성의를 가지고 써보려고 한다. 이번주에는 미디어로써 모바일이 갖는 특징과 그것이 인간의 생각과 라이프 스타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고찰하는 시간이다. 글을 읽고 글을 쓰다보니 어느순간 한 순간도 놓고 살 수 없는 핸드폰의 존재론을 다시 고민하게 된다.
[Reading Text]
1. 이재현. 모바일 미디어와 모바일 사회,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 모바일-텍스트와 감각양식 (pp.67-93)
2. 김홍중. 미디어스케이프와 모바일 성찰성, 『문화와 사회』, 10권, 2011.
휴대전화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미디어이고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경험을 창출해 낸다. 사실 모든 미디어가, 사물이 그렇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서 인간을 위해서 생성된 도구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교차하며 또 시간을 횡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나아렌트가 말했듯이 인간의 조건 중에서 '작업'을 통해서 만들어진 '인공물'은 그 자체로 반영구적이고 인간이 사라져도 그 자체로 살아 남는다. 인간의 역사를 횡단하면서도 인간 관계 속에서 교차적으로 존재하는 미디어는 항상 도구적으로 발명되었다가 미디어가 되고 결국은 삶을 이룬다.
휴대전화의 미디어로써 존재감은 "자기 세계에 대한 개인들의 지각의 결과로 개인들이 집합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변동"의 과정(Townsend, 2000:85b)을 보여준다. 이것은 미디어가 자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와 형성된 인지모델을 통한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한 인사이트를 준다. 비판적 정보기술 및 미디어 문화연구를 위해서 오늘은 독특한 감각양식을 만들어 내는 '모바일 텍스트'에 대하 논의를 '이재현. 모바일 미디어와 모바일 사회,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 모바일-텍스트와 감각양식 (pp.67-93)'를 통해서 알아보자. 또한 휴대전화가 변화시킨 '성찰적 개인'과 연결시켜서 '모바일 성찰성'이라는 개념을 '김홍중. 미디어스케이프와 모바일 성찰성, 『문화와 사회』, 10권, 2011.'을 통해서 알아보자.
비판적 정보기술 및 미디어 연구는 기술정보문화연구의 관점에서 구성주의, 비판적, 실천적 태도를 형상화해보고 이론과 비평, 실천의 세 가지 층위에서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후기정보 사회에서는 기술의정보의 역사를 넘어서 기술정보가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정보연구에 있어서 기존의 저작권 문화나 망중립성 연구를 넘어서 대안적인 정보공유의 라이선스 문화라던지, 디지털커먼즈 연구를 통해서 정보기술문화연구를 확장한다. 이러한 이해의 지평선에 '모바일-텍스트'와 '모바일 성찰성'이 개념을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이해하며 실천적으로 행위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해보자.
고전사회학 이론체계에서는 행위자는 몸을 갖고 있는 존재라기 보다는 순수한 의식과 인지의 주제로 설정되어 있다. 독일철학에서 베버와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러운 의식, 관념, 세계관, 가치관, 사유체계와 같은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회학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철학의 전통의 '생철학'의 전통과 만나게 된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이라던지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이라던지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과 같은 이론들은 고전사회학이 집중하지 않았던 '몸'과 '체험'에 집중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감성적이고 미적인 감수성을 중심으로 하는 체험의 기반이 중요성을 갖는다. 여기에 휴대전화와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결성을 찾아보면 미디어로써 휴대전화가 갖는 독특한 지위가 발견된다.
먼저 휴대전화는 중간대상으로 인식된다. 중간대상이라고 하면 아이가 엄마와 융합상태에서 벗언는 과정에서 신체와 이부현실 사이에서 '중간영역'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겹쳐진 회색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미디어의 관점에서 그리고 신체의 확장의 관점에서 휴대전화는 세계에 대한 내면적인 부분과 외재적인 부분 사에서 양가감정을 동시에 갖는 미디어이다. 또한 휴대전화는 20세기 초반 전쟁 부상자들의 소실된 신체 일부를 보정하는 테크놀로지였던 보철로도 볼 수 있다. 최근에 드라마다 영화로 많이 볼 수 있는 인간의 몸에 필요한 기능을 가진 기계를 연결하는 '임플란트'와 같은 것이다. 휴대전화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의식과 몸이 연결된 디지털 보철이라고 볼 수 있다.
휴대전화는 생태학적 미디어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인터페이스를 형성한다. 생태학적 미디어는 인간의 소통과 상호작용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환경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휴대전화는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 인간이 만든 도구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터페이스이자 플랫폼이다. 이 공간에서 인간은 주체화가 되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미디어와 풍경인 스케이프가 합쳐저서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되는 '미디어스케이프'라고 해보자. 환경으로서 미디어가 이미 내장된 세계에서 인간의 경험은 미디어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특히 휴대전화의 경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간영역이면서 보철인 동시에 인터페이스를 형성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휴대전화가 가지고 있는 특성상 움직이면서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한 번에 다양한 정보들이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기 때문에 지각의 산만성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움직이는 것들의 기본은 '움직인다는 것' 자체에 있듯이 계속해서 문자와 영상이 시각과 촉각을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과정에서 미디어스케이프의 인간은 산만성을 기본으로 하면서 정신적으로는 탈내면화의 과정을 겪는다. 내면의 해체는 자연스럽게 외부로 향하는 탈내면화된 주체성을 형성하게 되고 반성이나 성찰보다는 외부로부터 유입된 정보와 선호, 유혹에 쉽게 자신의 텅빈내면을 내어 준다. 더욱이 전화가 걸려오는 순간, 메시지가 오는 순간 탈내면화된 인간의 주체성은 바로 탈맥락화된 개인으로 바뀌어서 메시지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어진다.
에버릿과 캘드웰(Everett & Caldwell, 2003)은 "디지털텍스트성"(digitextuality"의 개념을 컴퓨터와 미디어와 기술적 과정과 산물을 뜻하는 '디지털'과 크리스테바가 텍스트간의 관계를 주장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합성어로 주장한다. 이 개념을 모바일과 연결하면 모바일 미디어가 가진 미학적 특성과 인터페이스, 기존의 미디어와의 관계와 연결된 포괄적 개념으로 "모바일-텍스트성"(mobile-textualiity)으로 제시한다. 쉽게 말해 모바일-텍스트성이란 모바일 미디어의 콘텐츠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바일-텍스트성의 두 가지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노'미디어에서 시작해서 멀티미디어로 확장해 가면서 음성, 텍스트(SMS)로 발전했고 텍스트와 그래픽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그림메시지 전송(PM)에서 텍스트, 그래픽, 이미지, 음성 등을 매끄럽게 토합해서 보낼 수 있는 멀티메시지 전송으로 바뀌었다. 둘째, 사용자 측면에서 모바일-텍스트는 기능성 가전성을 확대하여 편익을 증대시켰다(Nokia, 2001). 물론 이러한 관점은 기술결정론에 의한 기술낙관론으로 볼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SMS의 '문자성'에 관한 시도이다(Small, 2003). 휴대전화의 멀티미디어화가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문자' 언어의 확대는 보편적이 되었다. 문자를 사용해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언어적인 관점에서 의사소통이 진행되고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월터옹(Walter Ong, 1982)의 논dml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제2차적 문자성"(secondary literacy)은 자신의 생각을 짧게 표현하고, 문자성과 구술성의 혼성체를 통한 구술적 문화성의 구현을 담고 있다. 또한 SMS는 송신자와 해독자에게 메시지 해독의 과정에서 즐거움을 부가적으로 제공해준다.
맥루한의 관점에서 모든 미디어는 신체의 확장이며 모바일 미디어도 감각양식의 다양한 측면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맥루한이 이야했듯이 미디어가 대표하는 감각은 다른 감각에 의해서 지배력을 가지게 되어서 감각의 불균형이 생기고, 결국 편향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모바일 미디어는 그 자체로 시각, 청각, 촉각의 다양한 감각양식이 담겨있다. 원래부터 '전화'라는 미디어는 실시간 양방향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감각적 충실함의 유혹이 지배적으로 촉각에도 나타난다고 본다. 따라서 멀티미디어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모바일의 경우에는 감각양식의 다양성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지는 그 사람이 모바일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재현(1997)에 따르면 새로운 테클로로지는 3단계를 거치는데 이것을 모바일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이재현은 테클놀로지의 시대, 수용자 리듬의 시대, 모바일 리듬의 시대라는 단계로 모바일 미디어의 확산과 수용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테클놀로지의 시대는 말 그대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유입되면서 갖는 신기함이 주요한 이벤트가 된다면 수용자리듬의 시대에는 테클놀로지 안의 콘텐츠와 서비스가 이슈가 된다. 모바일이 수용자 리듬의 시대를 만나면 모바일 안에서 어떤 콘텐츠와 서비스를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욕구가 충족되기도 하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모바일 디임의 시대에는 이제 일상과 모바일이 하나가 되면서 모바일이 사용자의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이다.
모바일을 통한 리듬의 형성은 일상 생활이 의사소통과 관계맺는 방식, 말하기 방식, 이해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맥루한의 비판처럼 멀티미디어의 형식으로 모든 감각의 리듬을 만드는 스마트폰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게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맺는 방식에도 모바일의 리듬은 적용되는데 플랜트(Plant, 2001)는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타자지향형의 방식으로 구분한다. 휴대전화 이용패턴에 따라서 세계에 대한 인간관계의 이해를 모바일 미디어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소쉬르가 등장하면서 철학계에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가 진행되었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사실은 생각의 방식이 담겨 있고, 그것은 곧 일종의 '구조'라고 하는 구조주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녀들이다. 그러니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소쉬르의 철학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논의도,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도,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도 언어적인 관점에서 혹은 상징계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현상이다. 17세기에는 데카르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신을 떠난 인간이 사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가 일어났고 거의 200여년을 이러한 전회를 향유하며 과학과 계몽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0년이 지나면서는 마셜맥루학의 이야기처럼 미디어적 전회medial turn이 일어났다.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가 사유의 방식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전까지 사람들이 생각하던 방식이 모두 새롭게 정의되었고, 해석도 달라지게 되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들뢰즈는 '시네마'에서 이미지가 운동으로 연결되고 운동이 다시 이미지로 분할되는 방식으로 인간의 기억을 정리했다. 인간은 누구나 이미지와 그에 연결된 감정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 자체로 현실보다 훨씬 더 개연성을 주고 이미지들의 연결이 매끄러워서 사람들의 정체성이나 사유를 더욱 튼튼하게 해주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지속의 이론으로 시작된 이미지적 전회는 들뢰즈에 와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새로운 전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들뢰죄는 그 동안 언어적 전회로 인기를 끌어온 라캉의 이론과 프로이트의 논리들을 '인간 외에는 모두 무의식'이라는 의미로 비인간주의를 표방하면서 무의식을 언어적으로 분석하는 이원론을 종말시킨 것 같았다. 그래도 들뢰즈에게서는 초월적이기는 하지만 일원론이라는 기반이 있었고 기존의 영토를 벗어나는 탈영토화는 자연스럽게 재영토를 만드는 재구축이 일어난다고 하는 방향성이 있었다. 목적론적 사고는 모든 전회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전환에서 '현상학'의 독특한 위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모바일성찰성과 관련해서, 모바일-텍스트성과 관련해서 미디어적 전회 이후에 인간이 어떤 현상에 놓였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지를 생각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현상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에드먼트 후설'의 구분을 살펴보자. 후설은 주관을 4가직로 나누는데 외재적 주관, 내재적 주관, 수리적 주관, 타자적 주관이다.
1) 외재적 주관 : 뇌과학적 연구
외재적 주관은 자아 외의 존재하는 지향성이 닿아서 인식된 자연, 사물, 공기, 건물, 우주와 같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주관에 의해서 그것들을 계속해서 인식된다.
2) 내재적 주관 : 현상학적 관점
내재적 주관은 외재적 주관이 인식될 때 내 안에서 느껴지는, 이해되는 것들이다. 몸이 아프다거나, 마음이 좋다던가, 머리가 아프던가, 시원하다라는 등의 여러가지 인식들이 내재적 주관을 만든다.
3) 수리적 주관 : 의식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
수리적 주관은 수학적 주관과 같다. 외재적 주관과 내재적 주관도 마찬가지로 몇개가 있는지, 어떤 배열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어느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려면 수리적 주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타자적 주관 : 의식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
타자적 주관은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외재적 주관과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을 사물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것들을 인식하는 것처럼 타자도 나처럼 다른 것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의식적인 능력이 있으나 그것도 역시 내 안에서는 '그와 그녀에 대한 주관'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의 구분이 중요한 것은 20세기 초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4가지의 주관을 가지고 있었따는 것이다. 외재적인 주관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내재적 주관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 다양한 변화들을 성찰하고, 수리적 주관을 통해서 사회와 내면의 구성을 객관화하고 타자적 주관을 통해서 나처럼 생각할 수 있는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현상' 자체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의미들을 포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미디어적 전화가 일어나고 특히 휴대전화가 '밀어서 잠금해제'가 되는 순간 인간의 주관은 맥루언의 이야기처럼 감각적인 편향이 증폭되어 버린다.
SNS나 쇼츠를 보는 순간 탈맥락화와 탤내면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테크롤로지 자체의 놀라움보다는 콘텐츠의 '잔인함이나 유치함'이 계속해서 인간의 주의력을 가지고 간다. 미디어적 전회가 있었던 때만해도 영화는 2시간의 시간을 사람들에서 가지고 갔지만, 지금은 15초면 모든 주의력을 앗아가고 또 다시 다른 숏츠를 찾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원래 인간은 이렇게 산만한 존재인가? 아니면 이렇게 학습되면,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믿어버릴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오늘의 이야기를 꼽씹어 보면 '시간의 향기'에서 한병철이 이야기한 것처럼 미디어에 의한 리듬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리듬에서 시간이 주관적으로 흘러야 한다.
자신의 텅빈 내면을 자시 성찰적으로 가득 채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에 스스로를 돌아보면 의미의 무게가 필요하다. 잠시 꺼두어도 좋은 휴대전화의 전원을 지긋이 누르는 촉각이 주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에 다시 자신이 처해진 환경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더욱이 성찰을 위해서는 '감정에 대한 감정'인 메타감정에 대한 이해와 실천도 필요하다. 감정사회학(김왕배, 2019)에서는 감정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다. 1차 감정과 2차 감정이다. 본질적으로 아무리 인간이 미디어의 리듬을 쫓아가고 있더라도 자신의 감정은 다시 성찰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미디어스케이프가 만든 세상에서 다시 휴먼스케이프로 돌아오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1차적 감정_원초적 감정
1차 감정의 4가지 : 공포(두려움), 분노, 우울, 행복(만족)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죄의식, 자긍심, 수치와 같은 2차적 감정이 만들어 진다.
1차 감정은 원초적 감정으로 모든 감정의 기본이 된다.
1차적 감정_주요 감정 공통특징
다른 영장류에게서도 나타나는 주요 감정
명확히 구분되는 심리적 반응
명확히 구분되는 선행사건의 존재
자율신경계의 반사적 반응과 표현적 반응의 일관성이 나타남
즉각적인 촉발
짧은 발현시간
자극에 대한 반사적 평가를 야기함
행위자에게 자신의 통제를 넘어서는 사건으로 경험됨
2차적 감정_1차감정의 조합 feat. Kemper 1987
공포 +우울 : 불안
공포 + 분노 : 증오, 질투, 시기
공포 + 행복 : 경탄, 경외, 희망, 수줍음
분노 + 행복 : 복수심, 우월감, 경멸, 고소함
우울 + 행복 : 향수, 동경
공포 + 분노 : 비탄
자신이 가진 생각이 어떤 생각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가진 감정이 어떤 사건과 메시지, 관계에 대해서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단순히 인지적인 주관의 회복만으로는 의식적으로는 해답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몸과 연결된 반응에서는 여전히 한계일 수 밖에 없다. 감정적인 회복에서 감각적인 통제가 일어날 수 있는 감정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리듬'을 비로소 감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0. 나오기
최근들어 애플은 '비전프로'라고 하는 확장현실 기기를 출시했다. 기존의 모바일-텍스트성은 모바일 기기 안에서만 만들어지는 인터페이스안에서 탈내면화와 탈맥락화를 했다면 이제는 '애플비전'을 통해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소셜미디어의 맥락을 집어 넣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내면 속에 집어 넣는다. 이것은 탈내면화된 텅빈 자신의 내면의 허기를 달래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보철느낌이었던 휴대전화가 이제는 신체의 일부가 되어서 아예 현상자체를 구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애플비전'은 말그대로 애플이 만든 비전대로 현실의 가상을 결함한 확장현실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멀티버스와 생성행AI 그리고 애플비전의 등장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러다가 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핸드폰 혹은 패드 혹은 노트북의 창을 열고 세상을 보고 세상을 이해하고 감동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병철이 말처럼 '비타악티바'라는 활동의 지속성이 아니라 '비타콘템플라티바'라고 하는 관조하는 태도가 더 필요한게 아닐까? 떨어져서 생각해보고 잠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보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리듬을 찾아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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