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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06. 2024

전술미디어와 뉴아트행동주의

과학커뮤니케이션_비평적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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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아니 저널리즘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아니 세상이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여줄수는 있을까? 오늘날 쾌락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 같은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숙명 그리고 운명에 저항하면서 나름대로의 미래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깊게 파인 발자국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최근 이광석 선생님의 글을 자주 접하고 있다. 비판적 문화미디어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잊고 있던 조각을 찾은 느낀도 든다. 이번에 배운 내용은 '전술'미디어라는 주제였다. 마치 전쟁에서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인 '전술'을 미디어와 연결해서 전투에 돌입하는 미디어 전사들이 핵심이다. 과연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미디어의 전사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까? 



1. 전술미디어란 무엇인가?


전술미디어란 무엇일까? 지금부터 우리는 미디어가 단순히 수동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해방과 희망을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전술미디어는 영어로 tactical media라고 할 수 있다. 전술은 전략의 하부요소로써 '상황적'이고 '구어적'이며 '화용'론적인 관점에서 벌어지는 일상단위의 미디어의 전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커다란 이론적인 관점에서 마셜맥루한과 해롤드 이니스의 미디어 자체의 특징을 논의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미디어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실천적인 관점에서는 '전술미디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정의하자면 전술미디어란 '디지털 기반형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예술과 문화, 미디어와 정보계를 교차하여 등장한 문화 실천이자 현실 개입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전술미디어는 어떻게 보면 그 방향성에 있어서는 아방가르드와 사이방가르드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아방가르드란 예술과 문화, 사회에 대한 실험적이고 급진적인 저항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예술이 가지고 있는 권위에 도전하면서 예술사적으로 쌓여진 구조와 경계를 허물고 예술이 현실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참여하는 활동까지 포함한다. 이에 대해서 사이방가르드는 '사이버'와 '아방가르드'의 합성어로써 사이버 시대의 아방가르드적인 행동주의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를 가지고 새로운 경계를 만들고 권위를 허물어 뜨리면서 문제를 직면하게 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이광석의 글에서 드러난다. 이광석은『뉴아트행동주의: 포스트미디어, 횡단하는 문화실천』, 안그라픽스, 2015. - 뉴아트행동주의: 전술미디어의 역사적 유산 (pp. 36-9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운동과 문화실천의 저항을 담은 어떠한 명명법도 환영한다. 예컨대 예술행동, 문화간섭, 행동주의, 참여민주주의, 대안미디어, 공동체미디어, 급진미디어,포스트미디어 혹은 전술미디어 등 어떤 개념도 사실상 고유한 의미와 맥락을 갖는다고 본다. 그리고 각각의 명명들이 갖고 있는 역사적 태동과 맥락의 차이를 존중한다. 단지 나는 개념의 차이보다는 겹쳐져 있는 공통의 전술적 지향을 서로 공유하는데 더 큰 실천적 가치를 두고자 한다. 무엇보다 체제의 삶권력이 온라인 공간과 미디어를 통해 벌이는 정보 왜곡에 대항하고 독점적 권력 담론의 재생산에 틈과 흠집을 만드는 모든 시도에 동의한다.” (p.15)


이광석은 뉴아트행동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전술미디어의 역사적인 계보를 그리는데 주력한다. 이러한 과정은 이전까지 미디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회학'적인 방식의 규정적인 미디어 연구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디어가 자본주의와 인클로저와 같은 문제들에 대응해서 실제로 미디어를 가지고 전쟁을 치루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전술미디어'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전술미디어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사건은 바로 멕시코의 '사파티스타'Zapatista라고 하는 미디어 운동이다. 사파티스타 운동은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상에 대해서 항의하면서 자신들 만의 혁명을 시작하였다. 멕시코 저항군은 각자 총을 들고 스마스크를 쓰고 정글 속으로 들어갔고 이들을 일컫어서 멕시코 사파티스타 농민 해방군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단지 봉기하여 무장혁명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디어 반란군'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주류 담론에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반란을 시작한다. 이들은 무장봉기 후에 전면적인 대결을 뒤로 하고 평화적인 선전전에 주력한다. 인터넷 네트워크로 연결된 이른바 미디어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인터넷에 자신들이 가진 생각을 이미지와 영상, 글로 전달했고 이것을 받아서 2차, 3차 미디어 자료들이 리믹스되고 매쉬업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오늘날 자율을 위한 저항 운동사에 역동적 주체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 이후 로빙크와 가르시아가 사파티스타 혁명의 방식을 글로벌 문화실천의 하나로써 '뉴미디어'라고 정의하면서 전술미디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후 이러한 '전술미디어'는 사파티스타' 혁명운동과 비슷하게 미디어 게릴라전을 치루면서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현재 자신들이 속한 문제에 대해서 아방가르드적인 운동을 진행한다. 


전술미디어는 일상에 침입한 권력에 생체기를 낼 수 있는 미디어이다


정치이념의 전략적 이상주의에 회의감이 있다 보니 오히려 아나키적 전술로 과잉 집중되는 것을 발견했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상황주의자 등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의 좌절과 자 본주의적 질서로의 투항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전략 없는 전술에 기댄 전술미 디어식 문화실천의 아나키적 속성이 새로운 대안을 세우는 데 유효한 태도일까라는 문제제 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전술미디어가 의도했고 바라봤던 현실 변혁의 실천적 지향은 새롭게 등장한 뉴미 디어를 매개로 일상 속에서 실천적 주제들이 다층적으로 펼치는 개입을 통해 자본주의 문화에 저항하는 ‘일상 혁명’에 무게를 두고 있다.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진지전처럼 느리지만 공개된 환경에서 실천적인 주체들이 다층적인 저항으로 미디어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전술미디어는 혁명의 전체주의적 이상을 반복하는 기획과 이념 정치에서 탈피하여 자본주의 바깥에서 벌이는 구습의 혁명 정치와 결별하려는 노력이었다. 주류를 대신하려는 저대적 목표를 두고 움직이기 보다는 상황적인 목적에 의거하여 우연하고 유연하게 행위와 표현예술을 실행했다. 이런 의미에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전략'이 없는 상황적 '전술'의 연쇄는 아무런 변화를 만들지 못하고 하나의 '사건'으로 그칠 수 밖에 없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술행동이 대안 미디어를 촉발시키고 그것들이 쌓이면서 기존의 문화에 다른 주파수인 '문화간섭'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테크노정치에 대응하는 대중기반 뉴미디어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실 예술은 예로부터 '부'와 '낭만', '시간'과 '여유'가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는 문화적 상징체계라고 믿었다. 그에 따라서 삐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것처럼 예술은 다른 계층과 자신들이 속한 계층을 나누는 '상징자본'으로 작동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단단한 성곽을 부수는 쇄빙선이 되어서 전쟁의 맨 앞에서 실천적인 행위예술로 권력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크시슈토프 보디츠코는 기존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혼란과 불안을 일으키며 소수자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고백담을 예술장치로 실행한다. 노숙자의 수레라던지, 노숙자들끼리의 무선통신을 통해서 노숙자들이 겪는 고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문화로 만들려는 노력을 한다. 


예술을 위한 공공 공간이 아니라, 공공 공간을 위해 그 곳에 혼란과 불안을
야기시키는 예술이 보다 나은 도시의 삶과 도시의 더 나은 사람들을
지향하는 공적 담론을 촉진시킨다_크시슈토프 보디츠코




2. 전술미디어 문화실천의 영역적 특성


전술미디어는 1990년대 시작한 이래 다양한 변주와 리믹스를 거쳤다. 예술을 하는 운동가들이 뿌리 내린 사회에서 문화적인 실천의 방식들을 모아보면 보통 5가지 정도의 영역적인 특성을 볼 수 있다. 아방가르드 전통, 예술행동주의, 문화간섭, 대안미디어, 전자저항의 영역이다. 이것을 정리한 이광석은 이러한 영역적 실천들이 뉴아트행동주의의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전술미디어가 나오는 맥락은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이 디지털세계에서 매개된 새로운 힘을 얻고 현실로 내려와서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흐름에서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펼쳐지는지를 그룹핑하고 분류해놓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이론적인 배경이 필요하다. 


첫째, 아방가르드 전통

전술미디어는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새로운 문화실천적 개념이긴 하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과 저항의 자원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술미디어는 아방가르드의 전술적 유산(콜라주, 포토몽타주, 퍼포먼스, 전 유와 전용, 정치기업 패러디, 실험정신, 집단 작업과 협업등)을 승계했다.


둘째, 예술행동주의

현장,장소,상황 요인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예술행동(주의)’ 혹은 ‘행 동주의 예술’은 전술미디어를 구성하는 주요 사회미학적 계열로 볼 수 있다. 

예술행동주의는 스펙터클 소비미학과 정치적 신자유주의 비관적 현실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다. 

전술 미디어는 그 외 현실 개입의 다양한 참여 예술계에 걸쳐 있다.


셋째, 문화간섭

대중문화 영역 또한 전술미디어가 중요한 문화실천의 장으로 공유한다. 

문화간섭 혹은 문화행동주의는 신자유주의 시장국면의 전면화에 대응한 대중문화의 브랜드 이미지 저항전술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문화간섭은 자본주의 브랜드 기호와 로고의 제국에서 펼치는 기호의 게릴라전이다. 

처음에는 햄 라디오 이용자들의 대화 혹은 라디오 방송에 간섭현상을 발생시키는 불법 행위를 지칭했다. 여기서 간섭은 기존에 존재하는 권위 와 체제를 뒤틀고 흠집을 내고 재영토화 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문화간섭과 게릴라전의 문 화행동은 기호와 스펙터클의 완벽하고 강고한 현실을 가정해서 벌이는 힘겨운 싸움이다. 


넷째, 대안 미디어

정부와 기업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미디어를 지칭하 며, 주류 미디어와 구분해 독립미디어 개념과 혼용해서 쓰이기도 한다. 

시민미디어, 공동체 (풀뿌리)미디어의 개념이다. 대안이 주류화 하고 권력화 하는 것에 대한 반발 정서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약호를 교란하거나 탈취해 그 권위와 체제를 뒤흔들고 흠집을 내며 재영토화하는 작업으로 단순한 네가티브 캠페인과는 구별된다. 

대중에게 기업 이미지나 제품 이미지의 뒤에 은폐되고 있는 사실을 눈치채게 하는 매스미디어 변혁 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 전자저항의 영역

사이 아방가르드는 (사이버 + 아방가르드) 일상 속에 편재화되어가는 권력에 대한 다수 대중의 문화정치적 개입과 저항표현을 다양한 미디어 기술과 예술을 통해 담아내고 공유하는 미학적 행위나 실천운동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술-예술-사회미학(문화실 천)이란 3자의 절합적 관계론에 의거한 운동론을 주장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실천 양식들을 개발하는 온라인 행동주의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와 예술의 관계는 무엇일까?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면 변화가 일어날까?라는 고민에서 전술미디어는 사회미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미학이란 심미적 체험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해석하여 실천적인 예술활동과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사회는 모두가 공감하는 일종의 '미학적 관점'을 공유하고 이에 따라서 기존에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는 방법으로써 미학'이 바뀌는 일들이 일어난다. 사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심미적 판단력은 주관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은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고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서 새롭게 형성되고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인 관계망과 사회적인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미학'을 재정의하고 변용, 전유, 리믹스할 것인지에 따라서 우리는 공통감각으로써 '사회적인 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술미디어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안언론으로 등장한 '나는 꼼수다'


그 외 새로운 방법 : 디지털 액티비즘

개인화된 정치참여 방식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느슨한 연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운동 네트워크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수직적 위계를 최소화하는 유연한 조직체로서 온라인 중심의 네트워크 운동을 활발히 전개해가고 있는 새로운 액티비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낮은 장벽의 레퍼토리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참여자로 끌어오며, 변화의 가시화는 또 다른 목적 및 양식의 사회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기제가 된다. 



3. 전술미디어의 실천이론적 자원들


그렇다면 이러한 전술미디어가 실제로 돌아가기 위한 이론적인 배경은 무엇이 있을까? 프랑스철학자들에게 이론적인 배경을 많이 얻어 올 수 있다. 장 보드리야르와 질들뢰즈의 이론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가 사람들 사이에 있다라고 믿는 프랑스 사회의 철학적인 대안들을 이론으로 가져올 수 있다. 물론 미디어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을가지고 있는 보드리야드는 매개체로써 미디어가 아니라 비매개체의 발견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드리야르를 통해서 우리는 전술미디어가 타겟하고 있는 기존의 미디어의 문제를 '시뮬라르크'라는 허위적인 존재론을 들춰낼 수 있다. 역시 이광석의 뉴아트행동주의에서 주장하는 전술미디어의 실천이론적 자원들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중매체를 위한 진혼곡의 전조 feat. 장 보드리야르

미디어 냉소주의 : 먼저 장보드리야르는 미디어가 증식하는 실체 없는 이미지, 시뮬라크르와 하이퍼리얼을 소비하는 사회 비판하며면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허구의 존재론을 부각시킨다. 

보드리야르는 소비 과정에 있어서의 주체의 상실을 지적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생산된 물건에 대해서 미디어적 마비가 와서 상품의 기능을 따지지 않고 해당 물건이 상징하는 위세와 권위, 즉‘기호’를 소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보드리야르는 <대중매체의 진혼곡>(197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은 방영 예정표에 신경 쓸 것도 없이 각 시민에게 텔레비전을 제공할 것” 이것을 해석하면 우리는 매개체(미디어)라는 개념 자체를 증발시키고, 관료적인 모형들에 의해 걸러지지 않는 직접적인 의사소통 과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대안이다. 

보드리야르는 대중매채의 진혼곡에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정한 혁명 매체는 담벼락과 벽보, 유인물 또는 삐라, 발언이 행해지고 교화되는 거리 즉각적인 게시문이며, 주어지고 되돌려지며, 말해지고 응답되며,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항상 변화하며, 상호적이고 서로 반대되는 모든 것이다. 이 점에서 거리는 모든 대중매체를 대신하고 전복하는 형태이다.



전술, 전유, 표류 그리고 상황의 구축을 통한 일상 삶의 전복 feat. 세르토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드 세르토는 현대도시는 개념도시(conceptual city)와 그 속에 사는 이용자(user)의 일상생활(daily life)의 힘의 관계로 이뤄진다고 보았다. 

개념도시라고 하는 개념은 ‘발전’을 특권화함으로서 건축가, 도시계획가에 의해 합리적이고 기능주의적 조직화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미 건축이 그 자체로 미디어의 편향을 담고 있듯이 차별적 구획과 분절, 재배치를 통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략(strategy)을 실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개념도시와는 다르게 일상생활은 개념도시의 질서에 수동적으로 지배되지 않으며 이용자가 아주 일상적인 차원에서 재전유, 왜곡, 변형, 재가공하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전술(tactic)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세르토는 특별하게 걷기의 수사학(walking rhetorics), 보행자의 발언 행위(pedestrian speech acts)에 집중한다. 특히 걷기는 일종의 ‘발화’ 행위이자 일상적 실천 중 하나이며, 보행자로 인해 공간의 질서가 실체화되기 때문에 걷기를 통해서 도시는 일종의 이야기가 생긴다고 할 수 있다. 

“보행자가 ‘어떻게’ 걷는가는 도시를 뒤틀고 파편화 하며, 도시의 부동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만든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걷기는 걷는 사람이 공간 배치(topological)체계를 전유(appropriate)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걷기에는 가로지르기, 이리저리 표류하기, 혹은 즉흥적인 행위(지름길이나 우회로를 창조하기, 금지 구역 가기 등 움직들의 수사학적 이동은 도시 계획의 분석적이고 고유한 의미의 행동이다. 


포스트미디어와 리좀_feat. 질들레즈와 펠릭스 가타리

전술미디어의 두번째 차원은 미디어 이후의 새로운 미디어의 세계를 열었던 들레즈와 가타리의 연구에서 시작된다. 

포스트미디어 운동은 욕망 해방 운동과 소수자운 동에서 자유라디오가 가진 폭발적인 잠재력과 위상을 높게 평가하고 소수자가 창의성을 발휘하는 지역 밀착형 소규모 운동을 제안한다. 

포스트미디어 시대는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의 테크노 인프라가 만들어지는 시대에서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미디어 시대의 도래를 매체 존재 조건의 변화에서 찾았을 뿐 아니라 인간 주체화 형식에 미치는 질적 변화와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포스트미디어는 들레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리좀적 다양성'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수목형 체계 : 다양하게 분기하는 선들이 하나의 중심으로 귀착, 중심에 가까운 것과 먼 것 간에 위계가 발생하며, 주변의 잔가지나 곁뿌리들을 줌심에 동일화하고 그것과 포개는 메커니즘이 작동, 그 잔가지나 곁뿌리들은 중심과의 관계에서 의미화 되고 그 중심을 통해서 주체화 된다. 

리좀형 체계 : 뿌리줄기 식물이 성장하는 형태적 특성에 착안.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기 유형으로 일자적 중심을 제거, 관계에 따라 어떤 것의 본질이 달라진다 고 보는 사유방식을 의미. 리좀적 체계는 단일한 중심이 되지 않는, 탈중심적, 탈위계적, 수평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리좀적 체계에서는 어느 부위가 본질적이며, 어느 부위가 부차적인지 한 눈에 구분되지 않는다.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 체계인 동시에 무엇과 마주치고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전체의 규모와 의미가 변화하는 가변적 체계이다.



전술미디어와 다중의 행위_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하트는 '제국', '다중', '공통체', '어셈블리'라는 시리즈를 통해서 자본의 전지구화가 만들어내는 제국적인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리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를 이론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있다. 사실 '다중'이라는 개념은 multitude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대중과는 다르고 인민과도 다르다. 

제국주의를 넘어 제국(Empire, 지구화된 현대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권력)으로 바뀌는 현실에서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G8 등과 같은 국제기구와 다국적 기업들이 과거와는 다르게 새로운 양상의 제국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까지 영토 논리에 종속되어 왔던 국민국가 중심의 국제질서는 새로운 제국에 의해서 종식되고, 탈영토화한 제국적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제국의 시대에 새로운 정치 주체인 다중(multitude)의 출현은 새로운 희망을 준다. 특히, 스피노자 철학의 역량의 존재론 (ontology of potentia )에 근거하여 역량을 만들어내는 주체로 등장한다. 

인민(people): 주권에 의해 부과되는 통일성과 환원의 논리를 대표

대중(masse): 원자적 개인의 수동성과 무질서 표현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가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는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고 믿었다면 다중은 어떠한 배제나 우열도 전제하지 않은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개념 “다중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복수적이고 다양한 상태로 남아 있다. 다중은 독특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독특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 전지구적으로 이뤄진 ‘지도자 없는 사회운동’의 투쟁 순환 : 한국의 촛불-대중을 정치적 주체인 다중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의 촛불집회는 모두 “우발적인 사건을 통해 대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일정하게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운동 형태에 기초하여 사회질서의 근본적인 재조직화를 발생시키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리좀적이고 다중적인 운동으로 주목하고 있다. 


헨리젠킨스의 컨버전스 컬처와 텍스트 밀렵꾼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만남과 결합을 뜻하는 컨버전스컬처(convergence culture) 안에서 수용자들은 과거의 일방향성 미디어를 소비할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지점을 젠킨스가 발견하여 능동적 수용자 개념을 제시한다. 

오늘날 수용자는 미디어를 통해 컨텐츠에 직접 참여하고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함. 컨텐츠를 처음 기획한 사람의 의도를 넘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파생적인 컨텐츠나 문화로 재생산되어 새로운 시너지를 핸다고 볼 수 있다. 

능동적 수용자(active audience)가 대중문화에서 재생산한 그들의 2차 창작의 잠재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능동적 수용자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팬텀'문화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능동적 수용자들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하는 텍스트 밀렵꾼(textual poachers)이며, 이 밀렵은 텍스트에 대한 반역이 될 수 없는 하나의 대안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2차 창작을 중시하는 능동적 수용자의 수가 늘어나고 작품을 향유하는 데 있어 그 세력권이 커질수록 문화컨텐츠 산업은 이들을 존중하고 그들만의 독자적인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4. 전술미디어 개념의 비판적 독해와 진화


전술미디어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미디어 전술가들의 전유와 같은 전술미디어 실천 기법의 구사만으로는 자본주의 지배 권력과 맞서는 데 여전히 변화의 부족이라는 회의감을 가졌다. 반영구적 실천의 인프라를 세우거나 장기적 전망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실천적으로 협소한 운동 스케일이 장차 장벽 이 될것이며, 미시정치와 소집단의 활동 경향이 비판적으로 보였다. 전술미디어 태동 자체가 자본주의 대안 구성의 획일성과 위계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반대로 탈중심성과 지역성등을 문화실천의 주된 조직 원리로 삼았다는 점은 분명 역사적 의의 존재 하지만 이런 장점이 부메랑이 되어 휘발성과 국지성을 부추기고 있다. 또한 디지털 발달에 따라 대중의 문화실천과 저항정신의 소비자본주의적 혹은 제도권내 포획과 포섭이 더 쉽게 관찰 된다. 그러나 신권위주의 국면 ‘비상국가’ 체제에서의 촛불 시위 등 문화실천의 경험은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어 부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본주의가 전면화되고 상징질서가 지배하는 경 제 법칙의 이해가 더 확장되어도 그 속에서 앞서 보았던 전술미디어의 다양한 계들이 전자 적이고 물리적 장에 여전히 기동성과 유연성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5. 전술미디어 속 뉴아트행동주의


전술미디어는 일상 생활 속에서 미디어를 통해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개념이다. 개념이 있다면 당연히 이것을 실천하는 행동가 혹은 활동가가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에 있어서 아방가르드와 사이방가르드가 피지털적으로 합쳐진 피티털 문화예술활동을 뉴아트행동주의라고 한다면 우리 주변에서 최근에는 더 많은 이들이 뉴아트행동주의를 통해서 전술미디어를 실천하고 있다. 현장예술가, 공동체 미디어 활동가, 온라인 시민운동가,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 문화운동가, 문화평론가, 시인, 뮤지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술미디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지만 피지털커먼즈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활동들이 단지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시렞로 공동의 자원이 되고, 이를 통해서 공통의 것이 재생된다는 방식으로 활동해야 한다. 이렇게 재생산 논의까지 들어오게 되면 결국 뉴아트행동주의는 사회운동과 만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칭하기도 한다. 


더욱이 테크놀러지의 정치학의 관점에서 테크놀러지는 우리가 고민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개념과 프레임을 만들어낸다. 미쉘 푸코의 말을 떠올리면 '지식'은 '권력'에 의해서 생산되는데 그 전달수단이 바로 테크놀로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테크놀로지를 쓴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다양한 방법과 방향성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자저항'과 같은 방식으로 테크놀로지의 프레임을 깨부수거나 전유하거나 리믹스하거나 모방하거나, 매쉬업을 하는 등의 행동이 필요하다. 


테크놀로지의 저항적 맥락화는 여전히 유효하다. 


반사적 저항 유형으로써 자본주의 확산의 진원지인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매체를 부수거나 컴퓨터를 못 쓰게 만드는 러다이트식 ‘거부의 전술’의 방법도 있다. 혹은 이보다 더욱 복잡한 저항 수준인 ‘선택적 거부의 전술’을 택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하이테크 수용을 통해 저항행위를 구사하는 ‘수용의 전술’을 택하여 아예 기술적으로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어서 저항하는 방법도 있다. 물리적 저항과 전자적 저항의 동시성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현재 전술미디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전자저항의 방식으로 과거로부터 배운 인사이트를 가지고 새로운 전술을 만들어야 한다. 그럴려면 테크롤로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다양한 학문과 경험들을 융합하여 피지털커먼즈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0. 나오기


생각이 꿈틀 거린다. 기존의 경로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움직임이 읽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들의 리듬으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전술미디어의 다양한 방식은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한말'이다. 이제는 우리는 '하는 말'로써 전술미디어를 다루어야 한다. 리좀적 다양성을 미디어의 줄기와 연결해서 새로운 생각나무를 만들어야 한다. 대안미디어, 전자저항, 문화간섭과 같은 뉴아트행동주의의 방식이든 혹은 이것을 넘어서는 방식이든 인간의 존엄과 다양성을 확장시키면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전술을 꺼내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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