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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14. 2024

테크노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정보기술·미디어와 젠더 Ⅰ: 테크노페미니즘, 여성과 기술의 새로운 앙상블

오늘의 주제
정보기술·미디어와 젠더 Ⅰ: 테크노페미니즘, 여성과 기술의 새로운 앙상블
 
참고 문헌
1. Wajcman, Judy. 『테크노페미니즘: 여성, 과학 기술과 새롭게 만나다』, 궁리, 2009.
- 1장 기술남성적 설계, 2장 테크노사이언스, 재구성되다 (pp.25-88)
- 4장 사이보그 해결책, 5장 은유와 물질성 (pp. 123-193)
2. 금희조 외. 『AI와 더불어 살기』, 커뮤니케이션북스. 2020.
- 08장  AI와 여성 개발자: 기술 산업이 갖는 젠더 불평등 (pp. 237-256)
- 07장 인공지능 젠더 편향성과 포스트휴먼 주체 (pp. 211-236)


0. 들어가기


과학커뮤니케이션 수업을 듣고 있다. 과학이라는 단어가 붙을려면 일단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마셜맥루한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니스를 지나서 장소성과 전술미디어까지 알아보았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에서 많은 갈등은 야기하는 주제인 '페미니즘' 중에서도 특히 '사이버페미니즘'을 다룬다. 주디와이즈만의 글을 기반으로 다양한 테크노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높기 위해서 비슷한 개념들을 경유할 것이다. 페미니즘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 자체가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는 사회가 아닐까? 그럴려면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서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20세기 후반 여성 운동이 있기 전에 과학자, 공학자 혹은 과학기술학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연구주제가 젠더화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젠더란 사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인 반면, 과학과 기술은 사회 관계의
공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_Wajcman, Judy


1. 기술의 남성적 설계


기술은 여성적인가? 남성적인가? 이에 대해서 1~3의 페미니즘의 물결이 연결된다. 먼저 제 1물결에서는 기술이 남성적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지만,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없다. 남성중심적인 언어와 디자인, 생각의 구조를 가지고 만든 기술의 세계에서는 여성은 그 자체로 배제되어 있으며 오히려 여성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따라서 와이즈만은 여성의 교육의 불평등과 구조적 문제를 제기한다. 남성이 설계하는 구조와 상황에서 여성이 과학과 기술분야에 진입하는 해결책을 내 놓는다. 이는 과학은 편견이 없고 객관적인 연구를 지향하며 열려 있다는 전제 아래서 여학생들에게 정당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와이즈만은 여성이 과학자가 되거나 기술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여성이 평등한 권리를 얻을려면 남성을 본받고 남성의 언어를 따라가야 하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


제 2물결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적인 것으로서의 기술을 다룬다. 자연적인 성적 구분론은 남성과 여성은 본질적으로 다루다는 것을 산정한다. 여성의 문제는 여성의 생물학적 특수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별, 성적 지위, 역할 및 기질과 같은 여성의 특수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페미니즘의 혁명이란 곧 생물학적 혁명이며 기술의 발전을 토해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여성이 이렇게 과학기술을 통해서 남성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인공자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산조절의 개선과 임신중절이 자녀 출산력을 통제할 때 가족 이데올로기는 사라진다고 본다. 그래서 오히려 여성들이 과학 안에서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남성적인 기획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어떻게 여성의 해방의 목소리에 기여를 할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낙태나 채외수정 기술의 발전이
과연 여성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는가?



제 3의 물결은 성과 계급 그리고 기술에 대한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임금노동과 무임금을 포함한 여성 노동과 기술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몰젠더성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급진주의자의 생물학적인 성에 대한 관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노동분업은 성적 위계 구조를 만들어내며 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성 억압이 재생산과 가족이라는 영역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위치를 고려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구조화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계급은 비자연적이고 인공적으로 '수행'되어서 결국은 고착화되는 과정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 반대하는 논리도 있다. 남성이 가진 기술권력의 문제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폭로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잠재력을 개방하여 가부장제적인 구조를 해체할 수 있었음에도 비판과 문제제기에만 그쳤다고 주장한다. 기술을 가부장제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지배 연장으로 여기는 페미니즘적인 접근은 테크노사이언스 자체를 가부장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술이 성의 위계질서를 강화하는데 집중되었기 때문에 여성을 수동적이고 기술의 희생자로 여기는 것 역시 여성의 행위성 안에서 잠재력을 개발하지 못하고 간과해버렸다고 비판을 받는다.


페미니즘의 3물결과 기술

제 1의 물결 : 접근에서 형평성으로 전환, 참정권 문제에 대한 접근

제 2의 물결 : 가부장적인 것에서 기술로 / 성, 계급, 그리고 기술적 접근

제 3의 물결 : 위치성, 교차성을 강조하는 퀴어 페미니즘(제3물결) 태동


도나 헤러웨이


2. 과학기술과 여성의 관계


기술이 남성적으로 편향되었다면 그래서 여성이 배제되고 희생자가 되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대안을 만들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3가지의 방식으로 그 대안을 살펴볼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성을 회복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사이버페미니즘은 사이버상에서 새로운 혼종적인 존재론을 제시한다. 이에 반해서 테크노사이언스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페미니즘을 연결하여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다양한 관계맺기를 통해서 '신유물론'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현상들을 '횡단'하고 새로운 '행위자'들을 통해서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를 다시 구성한다. 이를 통해서 현실의 실제적인 의미와 변화를 바꾸어 놓은 역할을 하고 있다. 주디 와이즈만은 이러한 과정에서 테크노사이언스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일단은 여기서 3가지를 비교해보자.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에코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남성들의 지배되면서 배제되거나 무시당해왔따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적인 것이라면 모성과 부드러움 그리고 자연처럼 유유히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여성성의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러한 여성성에 해를 가하는 남성성은 과학을 구성하는데 있어서도 본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과학기술은 본질적으로 남성에 의해서 남성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환경을 파괴하고 여성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남성의 본성은 결국 전쟁과 같이 약육강식을 강제하고 싸우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남성성이 기술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신체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뺏어갔다. 그래서 결국 과학기술이 태아 감별 기술이나 낙태수술을 통한 남아선호사상, 유전공학이나 생식공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에코페미니즘을 통해서 과학기술은 디스토피아를 부정하고 과학기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의 한계 : 이미 발전된 사회에서 과학기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실현되기 어렵다. 또한 기술을 설계한 주체가 남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술이 나쁘다는 것은 기술결정론인데, 기술설계자가 남성이라고 보는 것은 단일한 집단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이버페미니즘(cyberfeminism)

사이버페니즘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디지털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디지털혁명을 통해서 젠더를 해체하고 가부장제적 권력 구조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사이보그라는 새로운 종은 기계와 인간이 혼종된 완전히 새로운 타자를 상정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도 아닌 새로운 주체와 타자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이보그 프로젝트와 같은 사이버스페이스를 가정하고 만들어 내는 기술들은 사이버스페이스를 보다 가상적이고 젠더의 현실적인 의미를 교란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이버페미니즘의 한계 : 사이버페미니즘은 말 그대로 '사이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을 낙관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전망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으며 젠더차이는 없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기술을 물신화하는 것 역시도, 위험을 내제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의 양면성을 함께 보지 못하고 긍정적인 면만 봄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을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테크노페미니즘(technofeminism)

테크노페미니즘은 에코페미니즘과 사이버페미니즘을 넘어서는 제 3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에서 보인 비관적 숙명론과 테크노페미니즘에서 보이는 유토피아적 낙관주의를 극복하고 여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기술변화가 어떻게 복잡한 방식으로 관계맺는지를 탐구함으로써 제 3의 길을 만들 수 있다고 제시한다.

여성과 기술의 관계 그리고 여성이 기술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임노동, 가사노동, 재생산 영역을 탐구하면서 대안을 만들고 있다.

테크노페미니즘은 과학기술학과 페미니즘을 접합한다. 특히 과학기술학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을 접목하여 기술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맺어진 네트워크의 결과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젠더 권력 관계에 집중하면서 네트워크 과정에 관여하지 않는 주체들 모두가 공통의 임장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통해서 젠더와 기술과학이 상호구성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3. 테크노사이언스와 STS


1990년대가 지나면서 페미니스트들은 디지털 기술이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연구하였다. 특히 낙괁거인 관점에서 미래를 바라본 페미니스트들은 사이버그와 같은 상상물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술결정론을 넘어서 기술변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단느 이론을 가진 STS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술이 가진 문제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STS입장에서는 아주 편하게 가져다 쓰는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이론을 통해서 기술과 사회는 상호적으로 작동하며, 시스템과 네트워크는 이종적인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종적이라는 것은 다양한 종류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연구되는 것을 말한다.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은 기술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은 실재로는 네트워크로 연결망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들이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일종의 연결망을 만든다. 특히 ANT이론은 인간과 비인간에게 동일한 행위자 지위를 부여하여 비인간적인 물질에 대해서도 존엄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존재들이 가진 '본질'보다는 네트워크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소멸에 있어서 '관계'과 '과정'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를 라투르는 관계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으로 보고 모든 실재가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적 실천들로부터 창발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ANT와 같은  STS는 기술 설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집단이나 네트워크를 연구함으로써 여성과 기술에 대한 연구도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비판도 받는다. 특히 네트워크에서는 '여성'자체가 배제되다는 것을 간과했다고 본다. 구성주의 과학기술학에서 행위자는 네트워크를 만들고, 전략을 따르고, 합의에 도달하는 행위자는 '남성'이라는 'man'으로 표현된다. 이는 ANT에서 행위를 하는 기본적인 주체는 대표성을 가지지 않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사회에서 대표성이 바로 덧입혀진다. 따라서 네트워크 구축과정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배제의 효과들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 네트워크는 젠더 정치를 포함해야 하며 이를 사회기술적 네트워크 개념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테크노페미니즘이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테크노페미니즘은 바로 이러한 부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헤러웨이는 인종이나 계급, 젠더 범주에 대하여 기술과학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학의 실천 속에서 구성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서 와이즈만은 더 나아가서 젠더와 기술과학이 상호구성된다고 제안하면서 이러한 관점이어야만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에 새로운 실천을 더하 수 있다고 주장한다.



https://yunaxxzz.tistory.com/35


4. 테크노페미니즘과 젠더이론이 만나게 되면


그렇다면 우리는 페미니즘의 전통적인 이론을 만든 이들의 논의를 돌아봐야 한다. 특히 주디스버틀러의 개념을 돌아보고 이것이 어떻게 테크노페미니즘과 연결되는지를 보아야 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을 주장한다. 수행성이라는 것을 영어로 'performaty'라는 개념으로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으로 만든 성은 원래 그랬던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결국 젠더는 존재(being)이 아닌 행위(doing)로 굳어진 것이다. 이것은 주디스버틀러에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이분법적인 생물학적 성의 구분이 사회적인 성의 구분까지 장악하는 것을 반대하는 개념이 바로 수행성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주디스버틀러의 '되기'나 '하기'는 들뢰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하나의 물질에서 구성되어 지속되고 반복을 통한 차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수행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행성은 쌓이고 축적되면서 '존재' '되기'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축적되는 과정이 바로 사회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리는 포스트모던적 세상에서 해체 이후에 새롭게 생성하기의 영역에 와 있기도 하다. 수행은 이런방식으로 보면 경로의존성을 가진다. 이전에 했던 방식이 제도화가 되면서 또 새롭게 구조화를 재생산하고 그 재상산의 구성은 다시 수행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작용해야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버틀러가 이야기한 '가부장제'는 축적된 경험이 제도화되고 보편적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폭로되면 젠더 수행성의 방식도 달라진다. 그러면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하는 N개의 존재방식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N개의 존재방식은 언제나 소수자이며, 뚜렷한 경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주디스버틀러와 같은 젠더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공간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이버스페이스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새로운 젠더수행을 통해서 자아와 신체의 관계가 바뀌게 되고 현실에서 전통적인 젠더 역할이 역전될 수 있도록 새로운 수행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만들어지고 이것이 다시 '피지털'영역으로 확장되어서 현실세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전망이다.





이제부터는 위에서 논의한 내용들을 기반으로 비판적인 해석과 나름대로의 대안을 그려본 것이다. 사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약간 두려운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 논쟁'은 '진따남 논쟁'이나 '이대남 논쟁'에 휘말리는 것이 너무 쉽기 때문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이게 이렇게 큰 문제로 다룰 것인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는 철학아카데미에서 배웠던 줄리아크리스데바의 경계선을 좋아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보다는 '모성'과 '아브젝시옹'이라는 것이 잠깐씩 생물학적으로 등장했다가 생명의 탄생 이후에 다시 '사랑하는 존재'로써 '주변화되기'를 보여주는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매우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조금은 뒤로하고 오늘 읽는 텍스트를 가지고 몇 가지의 이야기를 해보자.


젠더편향성이 만들어내는 편향적 미디어와 콘텐츠


미디어는 편향을 만들어낸다는 마셜 맥루언의 이야기를 기억하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편향에 영향을 받은 대중이나 특정한 계층, 대상에 대해서 고민했었다. 그러나 산업의 관점에서 미디어를 생성하는 사람들, 심지어 미디어 생성이나 콘텐츠 생성의 주체들이 가진 편향이 고스란히 미디어에 전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편향에 의한 편향'이라고 할 수 이러한 '확증편향'과 같은 상황은 미디어를 일정한 알고리즘과 데이터로 생성하는 AI시대에는 더욱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비판적 성찰'능력이 아직은 없는 AI 기술은 계속해서 편향된 미디어와 콘텐츠를 무한대로 생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테크노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성개발자'들의 부족 혹은 부재는 AI 연구가 시작되는 현장에서 바로바로 나타났다. 코딩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리눅스'나 '비주얼베이직'과 같은 도스 디자인에서 보이는 검은색화면과 하얀 글씨는 그 자체로 '개발자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의 성비가 비슥하거나 더 많았다면 개발의 결과가 이렇게 무뚝뚝한 형식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려면 사실 '여성은 아름답고 감정적이며 우뇌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라던지 '여성은 섬세하다'라는 편경을 탑재하고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만약 1957년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AI연구에 대한 관심이 한참일 때 그 당시의 여성들의 관점에서 AI가 개발되었다면 그 시대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상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입각한 '여성적 언어'로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고민은 만약에 여성들의 분포가 AI산업에서 압도적으로 많았다면 이런 방식의 디자인이나 운영방식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인터넷과 같은 기술의 개발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술로 만들어졌고, '남성적'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전쟁이나 군대와 같은 환경에서는 '거대한  목적을 가진 국가적 사업'을 치룬다는 의미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기술이어야만 하고 효율적이기 위해서 투박한 UI와 운영방식을 만들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이 정당화 되는 꼴'이 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현상이 남성적이여서 이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으로 상부구조를 남성들이 차지해서 과잉대표된 결과인 것일까? 여성들이 정당하게 대표되어서 성비가 맞는 상황에서라면 다른 결정, 다른 방식의 목적, 다른 형식의 디자인이 도입되었을까? 이런 고민들이 시작된다.


테크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트로이의 목마'가 아닌가?


한편으로 여기에 여성이 참여하여 '테크노 페미니즘'을 실현한다고 한다면 다른 방식의 구성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도 '편향적'이다. 왜냐하면 젠더 차별적 요인을 극복한다는 명분아래서 여성의 비율이 높아졌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겪는 기술의 형태와 미디어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오히려 '평등과 형평'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젠더'라는 요소를 빼고 차별화요인만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깐 '젠더 차별화' 혹은 '테크노페미니즘'은 오히려 페미니즘의 '트로이의 목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젠더이슈는 결국 다양성과 형평성을 통한 배제를 배제하는 것인데 '젠더 차별화'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성을 '젠더 이슈'의 당사자로 묶는 순간 '여성'이라는 기표 아래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차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AI 개발 산업계에서 여성의 비율을 늘리자는 의견은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이라는 '집단'으로 구성되는 순간 '다양성'의 측면에서 여성은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다. 그럴려면 '젠더'가 아니라 오히려 '젠더리스'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본다.


이번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부분은 다양하게 글에 들어 있다. "기술적 발전이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비전보다 성별 위계 구조를 강화하는 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부상하는 디지털 경제 속에서 모든 징표들은 여전히 과학과 기술에 대한 남서으이 지배가 계속되고 있으며."(p242) 라던지 "남성성과 기술을 동일시하는 가치체계가 대중에게 전파되었다"라는 부분은 주디 와이즈만이 2009년에 발표한 '테크노페미니즘'의 내용을 가지고 왔다. 이러한 부분을 보면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성비'가 문제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더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구분법은 '여성이 남성과 다르고 여성이 성별위계에 상위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성별 위계구조를 강화시키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가설을 가지고 있다. 과연 그러한지는 사실 알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 '가정'으로 그 반대의 역사를 규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성성'이라는 단어 역시 '여성성'이라는 것을 전제하면서 구분한 것이기에 더욱 논의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평으로 맞춰놓고 시작하다는 의미에서는 한시적일 수도 있지만 수평이 되고 난 후에는 다른 방식의 기준과 운동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젠더의 주류화'가 이루어진 이후의 세상을 그려보고 그 세상을 역으로 지금으로 가지고와서 그 세상에서 필요한 법과 제도, 철학과 방법을 실현하는 것은 어덜까? 이른바 '잠정적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현실에서는 이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100%는 아니더라도 일부분이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이다.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하나는 기술철학의 관점에서 '가치로의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성 프레임워크'이다.





가치로의 전환


'호모파베르의 미래'(손화철, 2020)에서는 기술에 대한 윤리와 방향성에 대해서 3가지의 주요한 흐름을 이야기하다.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기술철학자들은 기술발전에 대한 배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하이데거나 자크엘륄과 같은 철학자들은 기술의 발전 자체를 인간성과 인류문명을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했고 기술 발전에 반대해서 이전과 같은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 것은 제안했다. 2세대 기술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랭던위너는 기술은 다양해서 하나로 기술에 대한 철학을 정할 수 없기 때문에 기술을 각각 체험에 보고 그에 대한 '경험으로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술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떻게 경험하고 바꾸어갈 것인지를 그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기술의 사회적 구성'논의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장의 논의와 연결해보면 AI 관련 산업에서 젠더이슈는 구체적인 산업의 맥락에서 경험들을 분석해보고 그에 대한 편향을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어떻게 보면 이번 장의 흐름과도 유사할 것으로 생각된다.


기술철학의 3세대는 '가치로의 전환'을 이야기한다. 특히 AI의 윤리와 연결해서 기술발전에 대한 두려움을 걱정하면서 경험에 따라서 대응하는 것을 넘어서 '발전'을 시작할 때 아예 '가치 체계'와 '핵심가치'를 정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술의 발전의 방향이 생기고 핵심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기술을 더 발전시킬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발전시킬 것인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023년 7월 일론머스크는 'X.ai'를 창립하면서 '인공지능이 추구해야할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드림팀을 꾸민바도 있다. 그렇다면 '젠더 주류화'를 넘어서 이제 모두가 수평적으로 운동장을 누린다면 여성개발자와 남성개발자의 구분법을 넘어서 '가치'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AI 산업에서 추구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해보고 그 가치를 위해서 산업을 재편하고 법제화를 하며 개발환경을 꾸리는 것이다. 핵심가치를 예로 든다면 '자기주체성, 재미, 다양성, 만족감, 공동체성, 감각적, 예술적'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다양성 프레임워크


국내 게임회사 중에서 조직문화가 획기적으로 유명한 '스마일게이트홀딩스'에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Diversity and Inclusion'팀이 있다. 이른바 '다양성과 포용'팀이다. 얼핏 보면 회사내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서 차별이나 배제를 없애고, 모두가 서로를 포용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팀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실리콘벨리에서 주요한 의제가 되었던 '다양성'은 최근에 '다양성 프레임워크 2.0'버전까지 발표되었다. 물론 과학에 있어서도 영국 왕립과학회가 다양성 프레임워크를 발표했지만 미디어와 콘텐츠에 있어서도 다양성 프레임워크가 적용되고 있다.


다양성 프레임워크 1.0에 따르면 성별이나 국적, 인종에 따라서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고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누리도록 하는 프레임워크다. 물론 여기에는 성적 지향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다양성 프레임워크에 따르면 성차별이나 여성배제가 없도록 설정된 개발환경을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다양성 프레임워크를 적용한 디즈니계열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벌스에서는 주인공들이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거나 주인공도 다양한 인종이 배역을 맡게 되었다. ('캡팀마블스'에서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며 다른 남자 조연들보다 훨씬 힘이 쎄다. 몇 년전 회자가 되었던 인어공주 배역에도 흑인이 캐스팅이 되어서 국내외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다양성 프레임워크 2.0이 발표되면서 이제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성별, 인종, 국적을 넘어서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다양성의 문제도 다루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를 넘어서 자크라캉이나 칼 융과 같은 심리학자들이 구분해 놓은 인간 내면의 의식과 무의식, 집단 정체성과 욕구와 같은 부분에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프레임워크가 발표된 것이다. 심지어 사회적인 장애가 있는 것도 다양성의 측면에서 포용의 대상이 되며 당연히 이것을 질병으로 여기지 않은 분위기가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성별에 따른 차별을 요구하는 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고 오히려 다양성의 측면에서 페미니즘을 넘어서 '인간 존업성'과 '형평성'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히 '편향' 자체도 다양성의 측면으로 볼 수 있는가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편향과 지향을 구분해야 하는 기준이 필요하고 다시 '가치'의 문제가 대두된다.




편향의 종말


글을 읽다가 보면 결국 '편향'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 젠더 이슈를 다룰 때마다, 정치 이슈를 다룰 때마다 편향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해결되지 않는다. 마셜 맥루한이 이야기한 것처럼 매체는 인간 감각을 편향적으로 만든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온갖 종류의 편향을 강화하는 미디어의 홍수 즉 '노아의 홍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것처럼 노아의 방주를 타고 겨우 표류하기에도 힘든 환경에서 편향을 넘어서 혹은 편향을 종말시키는 것은 너무 어렵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향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것 같다. 편향을 깨는 방법으로 메타인지의 확장도 생각해볼 수 있다. 나외의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회와 국가, 다른 존재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 '포스휴먼적인 마인드'가 장착되면 그래도 편향을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더욱이 '다름에서 같음을 찾아보는 과정'으로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와 공존'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가치를 먼저 정하고 다양성과 포용성의 테두리를 만든다면 이러한 '다름'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가장 급선무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중세시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신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신은 무한하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들과하는 항상 같은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거리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인간을 정의하는데 있어서도 편향이 들어가지 않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철학적 원리들이 중세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감정 독재'(강준만, 2013)에서는 50가지 편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편향을 없앨 수는 없지만 편향에 대한 메타인지를 갖는 것이 AI개발자들에게 이루어져야 하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편향을 가지지 않고 개발할 수 있는 교육과 문화가 만들어 져야 한다. 더욱이 개발환경에서 알고리즘에 따라서 학습하는 병렬분산처리 전에 편향에 대한 학습을 AI가 진행하게 하는 절차를 마련해서 '튜링테스트'로써 AI스스로 편향적 알고리즘을 검사할 수 있는 방법들도 대안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_‘감정 독재’와 싸우는 법 _005

01 왜 대학 입시 제도는 3년 10개월마다 ‘성형수술’을 할까? 행동 편향 _019
02 왜 스포츠 심판들은 결정적 순간엔 휘슬을 적게 불까? 부작위 편향 _025
03 왜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은 우리의 적이 되었는가? 통제의 환상 _031
04 왜 사람들은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은 복권’을 계속 살까? 몬테카를로의 오류 _038
05 왜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가? 사후 확신 편향 _045
06 왜 내 문제는 ‘세상 탓’ 남의 문제는 ‘사람 탓’을 하는가? 기본적 귀인 오류 _051
07 왜 취업에 성공하면 ‘내 실력 때문’ 실패하면 ‘세상 탓’을 하는가? 이기적 편향 _056
08 왜 우리는 누군가를 한 번 밉게 보면 끝까지 밉게 보는가? 인지 부조화 이론 _061
09 왜 해병대 출신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할까? 노력 정당화 효과 _067
10 왜 어떤 사람들은 조립 가구를 더 좋아할까? 이케아 효과 _073
11 왜 우리는 “가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하는가? 손실 회피 편향 _078
12 왜 기업들은 ‘무조건 100퍼센트 환불 보장’을 외치는가? 소유 효과 _083
13 왜 ‘옛 애인’과 ‘옛 직장’이 그리워질까? 현상 유지 편향 _089
14 왜 헤어져야 할 커플이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가? 매몰 비용 _095
15 왜 지나간 세월은 늘 아쉽기만 한가? 기회비용 _101
16 왜 우리는 감정으로 의견을 결정하는가? 감정 휴리스틱 _107
17 왜 머릿속에 잘 떠오르는 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가용성 편향 _113
18 왜 검사가 판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 정박 효과 _118
19 왜 선물 하나가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자기이행적 예언 _123
20 왜 지식인 논객들은 편가르기 구도의 졸이 되었을까? 확증 편향 _130
21 왜 소개팅에 자신보다 멋진 친구들과 함께 가면 안 되는가? 대비 효과 _135
22 왜 부자 친구를 두면 불행해질까? 이웃 효과 _141
23 왜 큰 부탁을 위해 작은 부탁을 먼저 해야 하는가? 문전 걸치기 전략 _147
24 왜 결혼식과 장례식은 간소화될 수 없는가? 상호성의 법칙 _153
25 왜 임금님은 벌거벗은 채로 거리 행진을 했을까? 다원적 무지 이론 _159
26 왜 “우리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 영향을 받는다”고생각하는가? ‘제3자 효과’ 이론 _165
27 왜 38명의 목격자는 한 여인의 피살을 외면했는가? 방관자 효과 _170
28 왜 프로젝트 팀의 인원이 10명을 넘으면 안 되는가? 사회적 태만 _177
29 왜 우리는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자”고 하는가? 허위 합의 효과 _182
30 왜 어떤 낙관주의는 죽음과 실패를 불러오는가? 스톡데일 패러독스 _187
31 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할까? 과신 오류 _193
32 왜 치킨 가게가 3만 개를 넘어섰을까? 생존 편향 _199
33 왜 우리를 사로잡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위험한가? 이야기 편향 _204
34 왜 어떤 기업들은 절대 시장조사를 하지 않을까? 사회적 선망 편향 _209
35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본 지 2초 만에 모든 걸 판단하는가? 블링크 _215
36 왜 마시멜로의 유혹을 참아낸 아이가 나중에 성공했나? 만족 지연 이론 _221
37 왜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승자는 재앙을 맞는가? 승자의 저주 _227
38 왜 ‘프로야구 2년차 징크스’가 일어날까? 평균 회귀 _233
39 왜 인터넷에 ‘충격’, ‘경악’, ‘결국’, ‘헉!’ 낚시질이 난무하는가? 맥거핀 효과 _239
40 왜 싸우다 불리해지면 “너 몇 살이야?”라고 하는가? 주의 전환의 오류 _244
41 왜 ‘조용필 열풍’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는가? 침묵의 나선 이론 _249
42 왜 ‘움직일 수 없는 무자비한 곳’이 일순간에 바뀔 수 있는가? 티핑포인트 _257
43 왜 공중도덕을 지키자는 계몽 캠페인은 실패하는가? 넛지 _262
44 왜 발이 넓은 마당발의 인간관계는 피상적인가? 던바의 수 _269
45 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 최악의 어리석은 결정을 할까? 집단사고 이론 _274
46 왜 개인보다 집단이 과격한 결정을 내리는가? 집단극화 이론 _279
47 왜 휴대전화 전쟁에서 일본은 한국에 패배했나? 갈라파고스 신드롬 _285
48 왜 정치와 행정은 사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인가? 공공 선택 이론 _291
49 왜 어느 소방대원은 상습적인 방화를 저질렀을까? 파킨슨의 법칙 _296
50 왜 “한 명의 죽음은 비극,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인가?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의 법칙 _301




https://raeng.org.uk/policy-and-resources/diversity-and-inclusion-research-and-resources/measuring-progress/diversity-and-inclusion-progression-framework



https://sggpaper.tistory.com/entry/113%ED%98%B8-%ED%85%8C%ED%81%AC%EB%85%B8%EC%82%AC%EC%9D%B4%EC%96%B8%EC%8A%A4-%EC%8B%9C%EB%8C%80%EC%9D%98-%EC%82%AC%EC%9D%B4%EB%B3%B4%EA%B7%B8-%EC%9D%B8%EA%B0%84%EB%93%A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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