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패미니즘과 교차성 패미니즘 사이에서
1. Haraway, Donna J. 『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책세상, 2022. 사이보그 선언: 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 (pp.15-112)
- 반려종 선언: 개, 사람 그리고 소중한 타자성 (pp. 113-182)
3. Haraway, Donna J. 『종과 종이 만날 때』. 갈무리. 2022
4. Haraway, Donna J.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친족 만들기(김상민 역). 『문화과학』, 97호, 2015/2019.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사이보그 되다"의 핵심 내용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다섯 가지 핵심 내용은 해러웨이가 사이보그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 철학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담고 있다.
경계 허물기: 헤러웨이는 인간과 기계, 자연과 문화, 육체와 정신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이보그는 이러한 경계를 초월하는 존재로, 이는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정체성의 유동성: 사이보그는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될 수 있는 유동적인 정체성을 지닌다. 이는 정체성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과 변화를 수용하는 태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의 재구성: 헤러웨이는 사이보그를 통해 전통적인 페미니즘의 틀을 확장하려 한다. 사이보그는 여성성을 포함한 모든 정체성의 유동성과 복합성을 인정하며, 기존의 억압적인 구조를 재고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술과 인간의 통합: 사이보그는 기술과 인간의 통합을 상징하는데, 이는 기술이 단순히 도구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경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중심적 주체: 사이보그는 중심적 권위나 주체성을 거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모든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지배 구조를 비판하고,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을 인정하며, 주체성을 다원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반영한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 인간-동물과 기계의 경계, 비물질과 물질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기존의 '경계짓기'의 영향력 아래 잠자고 있던 정체성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자신의 옷을 찾아 입고 밖으로 나가려는 정체성들은 문을 열자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서 이전에 자신이 입던 옷이 이제는 트렌드를 놓쳤다기 보다는 계절에 맞지 않고 기후와 환경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자신의 몸이 이전과는 다른 몸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때는 아예 옷이 필요 없을 때도 있었다. 피부가 아예 사이보그화되어서 물질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허물어진 경계에서는 정체성도 허물어지기 마련이고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여성과 남성'의 경계짓기를 하던 태초의 '유전자 가위'를 아예 역사속에서 지워버리는 사이보그가 나타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이보그 페니미즘이라고 해러웨이의 작업을 명명한다면 그것은 젠더정체성이 기술과 사회적 구성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특히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제는 '사이보그'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자 사이보그와 남자 사이보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단지 젠더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연과 기계의 분할도 의미가 없고, 동물과 인간의 분할도 의마가 없을 것이다. 초월적인 혼종적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다. 사이보그는 자신이 갖다 붙인 새로운 팔과 의족이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자신의 의식과 몸에 붙어 있고 존재하던 것들이 새로운 구성이 되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입게 된다.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 사이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종'이라는 정체성의 낡은 경계에 갖히지 않고 '사이보그종'으로 원래 자연은 분할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철학자 리차드 로티의 '거울'을 생각나게 한다. 원래 그랬다. 자연은 나누지 않았고 모든 것이 혼종적이었다. 장소뿐 아니라 시간이 혼종적이었고 스스로 만든 '주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등장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기존의 자본주의가 만든 자본의 경계, 소유의 경계다 모두 자연의 거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혼종적이다. 그 어느것 하나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애써 지우려고 했고,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애써서 타자의 얼굴의 빛을 강조하면서 드러냈다.
혼종적 존재는 경계를 초월하고,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다양성을 포용한다. 더욱이 기술과 생물학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인공장기나 사이보그 기술을 자신의 몸에 탑재한 사람들이 생긴다. 이는 뉴럴링크를 만든 일론머스크의 생각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일론머스크는 AI가 똑똑해지는 만큼 인간도 똑똑해져야 하기 때문에 사이보그화에 도전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근 뉴럴링크는 인간의 뇌에 4000개의 센서를 심는데 성공했고 그 센서들은 초소형 수신기에 집합되어서 주변의 기계들과 IoT기술로 연결되었다. 말그래도 인간의 혼종적인 존재론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던 비물질들이 물질과 연결되면서 실제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단순히 생각만으로 기계들을 움직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이미 우리는 해러웨이가 보았던 시대를, '사이보그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해러웨이는 페미니즘의 3번째 물결에서 정동하면서 2번째 물결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바로보면서 자신은 이미 혼종성의 다양화된 정체성의 사이보그가 된 느낌이다. 성적지향, 인종, 계층을 넘어서 동물과 자연의 경계, 기계와 인간의 경계도 허물어버리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결국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서 다양성과 복합성을 강조하는 3의 물결을 타고 있는 것 같다. 해러웨이는 기술발전이 노동과 경제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면서 이간이 만든 기술이 결국 젠더화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고 여성의 노동을 어떻게 특별한 정체성의 맥락으로 전락시켰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특별한 맥락에서 혼종적인 정체성이 처한 막다른 골목을 보여줌으로써 가부장적 사회의 흑인여성의 문제라던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를 들쳐낸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교차성에 대한 접근은 물론 새로운 형태의 '사이보그 정체성'을 제안한다. 교차성은 하나의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정체성의 경계들과 만나고 연결되면서 복합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이런 방식으로 보자면 복합적인 차별과 억압이 보이고 구조적 불평등이 교차되는 정체성의 교차로에서 빼곡히 차 있는 역사의 교통체증을 볼 수 있다. 결국 정체성 간에 교차되는 부분에서 교집합으로써 고유한 목소리가 등장하고 이러한 고유한 목소리는 '흑인 여성 페미니즘'이나 '퀴어이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른바 정체성 정치의 한 장이 열린다. 그런데 이에 대한 비판지점이 있다.
질문 1. 경계를 허무는 해러웨이의 논의는 교차성에서 정체성정치나 고유한 억압을 안보이게 만드는 트로이의 목마가 아닌가? (트로이의 목마 메타포를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해러웨이가 보여준 경계허물기가 정체성 정치나 고유한 억압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고유한 억압의 가시성을 약화시키는 것 말이다. 경계를 허무는 접근들은 개별 정체성들이 경험하는 고유한 억압의 판 자체로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과 같은 각기 다른 억압의 형태들이 단일한 '사이보그' 정체성으로 통합되면서 특정 그룹의 고유한 경험과 차별이 보이지 않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는 효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로 더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도 한다. 정체성 정치의 약화는 실질적인 불평등을 은혜함으로써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오히려 '사이보그로 만들어진 트로이의 목마'가 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퀴어축제'에 가려진 계급갈등과 자본주의 문제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가 일어나는 것과 복합적인 정체성을 인식함으로써 '액체근대' 이후에 유동적인 정체성의 시대를 여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책임'지지 못할 경계허물기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른속도로 무너져내리는 댐의 균열과 같은 것이 아닐까?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형태의 기술적 불평등과 억압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지만, 그 때 다시 새로운 '종'의 기원이 만들어짐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으로 문제의 근원이 옮겨가 버릴 위기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 2. '사이보그' 혹은 새로운 '정체성'을 판단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물론 해러웨이는 할 수 있는데 만약 지식이 부족하거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할때 여성 혹은 해러웨이 자체가 엘리트주의적인 접근을 하게되는거 아닌가?
3의 물결의 정동을 느끼고 감수성의 바다에 빠지려면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도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경험도 있어야 한다. 감성이라는 것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데 그 이야기는 사건들의 연속적인 이음새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감성이 다르다는 것은 단지 생각을 달리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의 '해석'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해러웨이와 같이 크리스퍼 가위로 자르고 다시 붙일 수 있는, 정체성에 금을 내고 그것을 다시 단단한 벽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을 위에서 바라보고 하나의 탑으로 만들어가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복잡한 인간과 자연, 기계와 비물질의 경계를 허물어트리고서는 '이제 여러분이 주체이니깐 마음대로 만들어보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복잡한 자동차를 분해해놓고 '이제 여러분 앞에 다양한 재료들이 있으니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새로운 자동차를 만들어보세요!'라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헤러웨이의 사고는 리좀적 다양성이 아니라 오히려 엘리트주의로 점철된 '수목적 단일성'과 같은 느낌이 든다. 의식의 역사를 공부한 해러웨이의 생각에 탑재된 남성화된 엘리트주의가 교차성과 혼종성을 뿌리로해서 수목적 단일성을 실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의식'의 중요성, 다시 말하면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의식'의 뿌리는 단단히 보이지 않는 땅에 고정시켜 놓고 그 위에 퍼져있는 것들은 새롭게 '리좀적 다양성'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해러웨이처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얼마나될까? 그러니깐 추천사에서 해러웨이를 극착하면서 그런 글을 읽어본적이 없다는 캐리울프의 고백이 해러웨이라는 뿌리를 기반으로 열리는 '사이보그화'의 열매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더욱이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탑재한 채로, 가부장주의의 정체성만 벗은 느낌의 좀비화된 사이보그의 관점에서 엘리트주의적인 방식으로 의식의 고차성을 유지한 채로 새로운 물결을 만들거나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20세기 지식이 높은 미국의 여성 교수'라는 정체성에서 유전자 가위를 들고서 기존의 정체성의 벽들을 허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이러한 정체성이 없다면 다른 정체성들도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짓기가 이미 진행되었고 그 경계짓기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하는 '학문적인 생각' 즉, 크리티컬한 생각은 특정 계급에서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녀의 글은 '미국의 화이트벨트에 사는 초등학교 졸업 수준의 지식을 가진 백인 노동자'가 읽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고차원적인 능력이다. 그런 능력으로 교차성을 목도하면서 그 중에 필요한 정체성의 가닥을 잡아서 새로운 혼종성의 사이보그를 만들어내는 것이 '일부 사람'만 가능하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허물고자 했던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는 허물 수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남아 있는 '화이트칼라'가 만들어 놓은 지식의 계층성은 더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헤러웨이의 책을 대학원 정도수준은 되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해러웨이 자신도 마냥 '특이하고 혁신적인 방식의 글쓰기'를 자랑하거나 (물론 자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찬송을 받는 것으로 기뻐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마음대로 써 놓고 알아서 이해하라라고 하는 것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아버지가, 회사의 대표가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라고 하는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감수성이 없다'라는 식의 가벼운 속삭임으로 현상을 뒤로 밀어 놓지 않을려면 결국 더 쉬운 글쓰기와 더 주체성의 고유함을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와 자신도 서 있는 곳에서 떠다닐수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필요로하지는 않을까?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해러웨이의 글을 모두 읽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이런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해러웨이가 의도한 효과였을까라는 의문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