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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03. 2024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렌스휴머니즘

로지브라이도티와 레이커즈와일 그리고 휴머니즘 논쟁

[Reading Text]

1. 이종관. 『포스트휴먼이 온다』, 사월의책, 2017.

1. 트랜스휴머니즘과 새로운 인간 존재론 (pp.21-110)

2. Braidotti, Rosi. 『포스트휴먼』, 아카넷, 2015.

1. 포스트-휴머니즘: 자아 너머 생명 (pp.28-68)

2. 탈-인간중심주의: 종 너머의 생명 (pp.78-132)

3.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2장 우주에서 휠체어의 지위 ~ 4장 청테이프형 사이보그 (pp.42-115)




0.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와 사이버사이코


2022년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사이버러너 엣지러너'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이다. 2077년에 인간은 이미 모든 신체의 일부를 '교환'하는 기능주의적인 트렌스휴먼으로 존재한다. 뇌를 바꾸지는 않지만, 뇌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교환할 수 있다. '임플란트'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 혹은 뇌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바꾸거나 이식할 수 있다. 주인공은 데이비드 마르티네즈가 얻은 기계 부속은 시간을 압축적으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기술 '산데비스탄'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늘어난 기능을 뇌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과부하된 정보와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버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이버 사이코'가 탄생하게 된다.


사이버사이코는 사이버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현실에서는 임플란트된 무기를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존재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과 같지만 문제는 그의 정신이 기계와의 혼종성 때문에 사이버세상의 어떤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이버사이코가 되면 인류의 적이 되어서 거의 짐승의 본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경찰들은 사이버사이코가 된 트랜스휴먼을 찾아내어 현장에서 바로 사살해버린다. 극의 후반부로 갈 수록 주인공 데이비드 마르티네스는 여자 주인공 루시 쿠시나다와 사랑에 빠지지만 쿠시나다를 지키기 위해서 결국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산데비스탄 기술을 사용한다. 그리고 여러번 사이버사이코가 되었다가 돌아왔다가 하다가 결국 자신과 똑같은 기술을 쓰는 빌런에게 최후를 맞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루시에게 "너 만큼은 지켜주고 싶었어"라는 비장한 말을 남기고서.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미 트랜스휴머니즘의 세계가 와 버린 것도 같다. 몸에 여러 곳에 철심을 박고 사는 것에서부터 인공신장이나 렌즈를 이식하여 시력을 높이는 것이나, 새로운 치아를 임플란트하여 음식을 씹는 것처럼 우리몸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사이보그'는 아닐지라도 작게나마 사이보그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을 넘어서서 인간이 되는 경계에서 인간으로 다시 회귀할 것인가 혹은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들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갈 것인가에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1. 트렌스휴머니즘이 전제하는 것


트랜스 휴머니즘이 전제하고 있는 물리적 환원주의와 기능주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 처음에는 인간신체의 연장이었던 '도구'가 인간의 존재론의 위상을 차지해버린다. 심지어 뇌까지도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기능'중에 하나가 되면 인간의 뇌를 연구하면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연장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은 NBIC와 같은 분야에서 융합을 통한 인간존재의 극복을 이야기한다. 인간으로 부터 시작된 기술들이 인간으로 다시 모여드는 이른바 '기술의 디아스포라'가 다시 인간 몸과 내면으로 회귀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에서 중요한 개념인 NBIC는 나노기술(Nanotechnology), 생명공학(Biotechnology),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약자이다. 이 네 가지 기술 분야는 트랜스휴머니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NBIC 기술의 융합은 트랜스휴머니즘의 핵심 목표인 인간 능력의 증강, 생명 연장, 지능 향상 등을 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들 기술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노기술은 원자나 분자 수준에서 물질을 조작하는 기술로, 트랜스휴머니즘의 신체적, 의학적 개선에 기여한다. 나노로봇을 이용한 세포 수리, 질병 진단 및 치료, 재생 의학 등을 통해 손상된 조직을 복구하거나, 나노의약품을 통해 정밀한 약물 전달이 가능하다. 생명공학은 생물학적 시스템과 생명체를 활용하거나 변형하는 기술로, 인간의 유전적, 생리적 특성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전자 편집(CRISPR), 인공 장기, 재생 의학, 생물학적 증강(바이오해킹) 등을 통해 유전 질환의 치료, 신체 능력 강화, 생명 연장이 가능하다.



정보기술은 데이터 처리, 저장, 전송 기술로, 트랜스휴머니즘에서 지능 강화와 인간-기계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인공지능(AI),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가상 현실(VR) 및 증강 현실(AR) 등을 통해 AI를 통해 인간의 인지 능력을 확장하고, BCI를 통해 직접적인 뇌-기계 인터페이스가 가능해진다. 인지과학은 인간의 인지 과정과 뇌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인간의 지적 능력과 정신적 상태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다. 인지 강화 약물, 신경과학적 연구, 심리학적 기법 등을 통해 학습 능력 향상, 기억력 증강, 정신 건강 개선이 가능하다. 이는 인간의 지적 및 감정적 기능을 증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모든 기술은 반드시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기술에 발전이 만났을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 경험하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개발된 기술과 인간이 어느정도까지 최고의 기량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에서 트랜스할 부위와 레벨이 정해진다. 그리고 그 부위가 최고의 기능을 낼 수 있는 레벨로 발전할 때까지 '트랜스포메이션'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일론머스크가 다가오는 AI 지능의 상승에 맞게 인간의 지능을 '뉴럴링크'를 통해서 높이려는 것처럼 인간은 처음에는 다양한 '변명'들을 둘러대다가 결국에는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고 있을 것이다.




2.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모두 인간의 미래와 기술의 역할을 탐구하지만, 각기 다른 철학적 기초와 목표를 가지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을 통한 인간본질의 향상과 융합을 통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 반면에 포스트휴머니즘은 오히려 인간중심주의를 떠나서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코나투스를 강조하고 인정한다. 몇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철학적 기초와 목표 :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을 통해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을 증강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운동은 생명 연장, 질병 극복, 지능 향상 등을 통해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존재 양식을 모색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우월성을 탈피하고, 인간, 동물, 기계, 환경 간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2)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점 :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본질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기술적 발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는 인간이 기계와 융합하거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추구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정된 개념을 거부하고, 인간을 생물학적, 기술적, 문화적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존재로 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며,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하는 존재라고 본다.



3) 기술의 역할과 접근 : 트랜스휴머니즘은 나노기술, 생명공학, 정보기술, 인지과학(NBIC) 등의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간의 능력을 증강하는 데 중점을 둔다. 기술 발전을 통해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강화하고, 생명을 연장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기술의 역할을 인정하지만, 인간 중심의 기술 발전을 넘어 기술과 인간,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방식을 탐구한다. 이는 기술이 인간의 통제 수단이 아니라, 인간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도구로 여긴다.


4) 윤리적 및 사회적 접근 :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 발전의 윤리적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며,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생명 연장,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 등 기술이 공정하고 책임감 있게 사용되도록 하는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윤리적 접근에서 더 광범위한 관점을 취하며, 인간 외의 존재들(동물, 환경, 인공지능 등)과의 윤리적 관계를 강조한다. 이는 생태학적 윤리, 동물 권리, 환경 보호 등을 포함하여, 인간 중심의 윤리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5) 인간과 기계의 관계 :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과 기계의 융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본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인공지능과의 협력, 사이보그 기술 등이 이러한 융합의 예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재정의하며, 기계를 인간의 도구로 보지 않고, 기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존재 양식을 탐구한다. 이는 기계와 인간이 동등한 존재로서 상호작용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중시한다.




3. 레이 커즈와일, 도나 해러웨이, 로지 브라이도티


지금까지 살벼본 내용을 바탕으로 주요한 학자들의 차이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싱귤레러티의 창시자 레이 커즈와일, 사이보그되기의 전문가 도나 해러웨이, 비인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한 로지 브라이도티의 사상은 철학적 기초와 목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점, 기술의 역할과 접근, 윤리적 및 사회적 접근, 인간과 기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사회적 변화와 혁신이라는 주제로 나누어 비교할 수 있다. 이렇게 나누어보는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STS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는 '경계짓기'릍 통한 다학제간 연구를 할 수 있다. 브라이도티의 비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하려면 먼저 '경계짓기'가 필요한데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먼을 제창한 학자들의 사상을 경계지으면서 이해를 높여보자.


먼저 레이 커즈와일은 기술적 특이점을 통해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을 증강하려는 목표를 가진다. 그는 생명 연장, 질병 극복, 지능 향상 등을 통해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며, 다양한 존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에서 인간 중심적 사고를 비판하며, 생태학적 윤리와 동물 권리, 환경 보호를 강조한다. 그녀는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점에서, 커즈와일은 인간의 본질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기술적 발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인간이 기계와 융합하거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추구한다. 해러웨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정된 개념을 거부하고, 인간을 생물학적, 기술적, 문화적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존재로 본다. 그녀는 사이보그 정체성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브라이도티는 인간의 본질을 탈중심화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한다. 그녀는 포스트휴먼 주체를 강조한다.


기술의 역할과 접근에 있어서, 커즈와일은 나노기술, 생명공학, 정보기술, 인지과학(NBIC) 등의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인간의 능력을 증강시키려 한다. 기술 발전을 통해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강화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러웨이는 기술의 역할을 인정하지만, 기술이 인간 중심의 도구가 아닌, 인간과 비인간 간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도구로 본다. 그녀는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기술과 인간의 경계를 재정의하려 한다. 브라이도티는 기술을 인간의 통제 수단이 아닌, 생태학적 상호작용의 한 부분으로 본다. 그녀는 기술과 자연, 인간의 관계를 재정의하여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윤리적 및 사회적 접근에서, 커즈와일은 기술 발전의 윤리적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며,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생명 연장,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 등이 공정하고 책임감 있게 사용되도록 하는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해러웨이는 윤리적 접근에서 인간 외의 존재들(동물, 기계, 환경)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녀는 생태학적 윤리와 동물 권리, 환경 보호 등을 포함하여, 인간 중심적 윤리를 넘어서려 한다. 브라이도티는 생태학적 윤리와 포스트휴먼 윤리를 강조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모색한다. 그녀는 포스트휴먼 윤리를 통해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추구한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서, 커즈와일은 인간과 기계의 융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인공지능과의 협력, 사이보그 기술 등을 예로 든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재정의하며, 기계를 인간의 도구로 보지 않고, 기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존재 양식을 탐구하려 한다. 그녀는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브라이도티는 기계를 인간의 도구로 보지 않고, 생태학적 상호작용의 한 부분으로 본다. 그녀는 인간과 기계, 자연의 관계를 재정의하여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커즈와일은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개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며, 생태계의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는 생명 연장과 생물학적 한계 극복을 위해 기술을 활용한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며,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공생을 추구한다. 그녀는 자연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지향하며,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자연과 기술의 융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브라이도티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존재 양식을 모색한다. 그녀는 생태학적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성을 추구한다.


사회적 변화와 혁신에 있어서, 커즈와일은 기술을 통한 혁신과 변화를 통해 사회를 발전시키려 하며,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그는 기술적 특이점을 통해 급격한 사회 변화를 예측한다. 해러웨이는 기술뿐만 아니라 문화적, 철학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 구조를 모색하며,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서려 한다. 그녀는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사회적 경계를 재정의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려 한다. 브라이도티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비판하고, 생태학적 상호작용과 포스트휴먼 윤리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모색한다. 그녀는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며, 지속 가능성을 강조한다.




4. 트랜스휴머니즘의 문제점


트렌스휴머니즘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히틀러와 다르지 않다. 히틀러가 우생학을 공부하며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가장 최고점을 지향했던 것처럼, 니체가 초인을 부르면서 '황금 사자'들이 세상을 빛나게 만들 것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트랜스 휴머니즘은 현재 인간의 불충분함이 하나의 '장애'이거나 '변종'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인간이 가져야 했던 아름다운 신체와 강인한 정신을 모든 사람이 가지려고 하는 욕망에서 발전했다. 미래는 열려 있으니 새롭게 발전하면된다는 진보의 논리가 아니라 '원래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정상화의 논리' 즉, 보수의 논리가 트렌스 휴머니즘이다. 인간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측면일 수 있으나,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서는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적 전제, 우생학적 기반이 짙게 깔려 있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세상에는 2가지의 존재가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즉자적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자신을 떠나서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 '대자적 존재'이다. 요즘에는 대자적 존재를 '메타인지'라는 방식으로 표현도 하지만 여전히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떠나서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겨진다. 대자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기자신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상해볼 수도 있고 자기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돌아볼 수 있다. 이렇게 대자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 결국 스스로와 비슷한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기까지 자신의 존재의 굴레에서 묻어나오는 구조를 자연스럽게 실천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인간이 탈존적으로 자신을 벗어나서 다른 방식의 인간을 창조하거나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 자체를 떠나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자체는 메를로퐁티가 이야기한거처럼 인간의 삶이 체화되어서 각각의 장기와 신체로 존재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인간을 일종의 기계로 인식하고, 각 부위에 품번을 매긴다음 다른 것으로 깔아끼우는 것은 형태상으로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기존의 인간존재가 아닌게 된다. 여기에서 브라이도티나 해러웨이가 말하는 경계를 허물고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존재들로 통합될 수 있는 장이 열리기도 할 것이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문제는 경계를 허무는 작업들이 가져올 '예상하지 못한 효과'이다.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이 인간이 아닌 상황에 자신을 놓아 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스스로를 바라보는' 탈존적 인간은 탈존한 상태도 역시 인간자체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탈존한 상황인식에서 자신의 신체나 정신을 교환하려고 한다. 그러니깐 컴퓨터나 로봇이라고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의 일부분을 교체하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거시적 단위로 끌어올리면 포스트휴머니즘이 된다. 인간과 함께 어울려 사는 동물과 환경 그리고 로봇이나 새로운 종류의 존재와 경계를 허물기를 통해 함께 만들어가는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탈존적 존재로서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탈존적 존재로 계속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분리된 혹은 통합된 인식론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은 마치 사이버펑크의 엣지러너에서 등장하는 사이버사이코처럼, 서서히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남아있는 신체의 기능이 폭주해버릴 것이다. 사이버사이코는 그래도 자신의 정신이 거주할 '사이버네틱스'라는 공간이라도 있었지만 인간에게는 실제로 그런 공간조차 없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이번에도 소외받는 것은 인간 자신이 된다. 인간 자신만이 자신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자신이 아닌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아닌 것처럼 애완동물에게도 자신이 이해한 인간의 존재만큼 영혼과 정신을 부여하고, 코딩과 네트워크로 만들어진 AI에게도 자신의 영혼을 다한 사랑을 줄 수 있다.




5. 포스트휴머니즘의 문제점


포스트휴머니즘의 모든 부분을 다룰 수는 없지만 브라이도티가 이야기한 포스트휴머니즘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논의해볼 수 있다. 사실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머니즘은 '리좀적 다양성'의 실천에 가깝다. 더욱이 리좀적 다양성을 방해하는 요소로써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더 나아가 인간중심주의는 너무나 쉽게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질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을 통해서 비판을 받은 부분이 브라이도티에게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가장 쉬운 비판은 '책임성'에 관한 문제이다. 리좀적 다양성이 가지고 있는 중앙집권화를 반대하고 책임지는 대상의 분배는 현실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아나키즘의 확산이 일어난다. 특정한 정체성을 담지하지 않은 것들이 어떤 공동체나 조직에서는 '해결할 사람이 없어지는 난해함'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책임져야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다보면 들뢰즈의 사상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인간존재의 무의식화는 결국은 '인간 자체'가 없어져야할 존재가 되어 버린다. 리좀적 다양성은 기존의 담론을 허물기에는 좋지만, 탈영토화가 아닌 재영토화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다음으로는 들뢰즈의 사상에서 인간은 '물질성'으로 부터 시작해서 '추상성'으로 자라나는 기계이다. 어떻게 보면 수직적으로 물 속이나 땅 속에 있던 요소들이 몸을 입고 자라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물질들이 지구의 지층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다가 배치가 되고, 리좀이 되면서 다양한 재영토화가 일어나고 결국에는 추상적인 기계가 된다. 기관없는 신체에서 신체없는 기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사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 모티브를 얻는 것이기도 하다. 물질이 기억을 가지게 되는 속성을 말이다. 마치 규소의 결합체인 반도체가 트렌지스터 안에 1과 0의 이진법으로 기억을 새겨 놓은 것처럼 인간은 반도체들의 결합으로 두뇌를 가지게 되고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과 같은 착각을 가지게 한다.


그런데 이미 이러한 생각을 하는 가운데 처음 물질 자체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작은 세포에서 태어난다고 하지만, 그 세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어머니의 자궁이 있어야하고 이것은 계속해서 어머니의 어머니를 찾아떠나는 여행이 된다. 물질자체로 환원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탈존적 인간론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리좀적 다양성이 가지고 있는 기원과 그 적용에 대한 문제는 포스트휴머니즘에서 다시 도래한다. 동물과 식물과 연대하는 다양한 정체성에서는 우리가 이미 연대한다는 것 자체가 지배종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대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수평성을 깨뜨리고 위계질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중심이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 다시 중심에서 여기로 모여라라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꼴이 된다.



친한 친구가 한 말이 있다. "만약 애완동물의 처우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애완동물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목줄을 끊고 잭런던의 책 '야성의 부름'에서 벅처럼 자유를 향해서 나아가라고 해야하지 않는가?"라는 말이었다. 여전히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도래하지 않는 것은 애완동물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지배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은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 중에서 유일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지배하고, 흩어버리기도 하면서 또 자유를 선포하거나 누군가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은 같은 수목적 일원론에서 나온 것 같다. '인간'이라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면서 '인간을 부정'하고 싶은 욕구말이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우리가 브라이도티의 주장이나 해러웨이의 주장을 아예 모르고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고 있어야 한다. 혼종성이나 비경계성, 다양성과 복잡성이나 평등한 상호작용을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조지 레이코프가 이야기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인식론적 프레임을 씌우는 일이다. 물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는 메를로퐁티의 몸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몸 자체로 '존재되기'가 실현되어야 하지만 이미 사상의 시작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점'이 가진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참고_천개의 고원, 6가지 개념


S_지층, 성층작용Strates, stratification


자연 또는 질료를 다루는 면에서 이중분절이 먼저라는 점을 제시한다. 질료와 형식, 내용과 표현이라는 이중성은 한 몸체에서 두 갈래인지 두개의 다른 법칙인지는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전자들의 경우는 경험의 총체에서 파악하는 것인데 비해 후자들의 사고는 분할과 절단된 이원성이라는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연역하는 것이다. 지구라는 단위의 총체는 사물들의 다수의 형태들을 만들어 왔고 또한 총체 속에서 움직임을 계속하는 다양한 변용태들을 표현해왔다. 그 지구는 지층들을 형성하듯이 추억처럼 사물의 층위와 정도를 구별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또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면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동력(권능)을 지층과 더불어 표현해 왔다.


왜 고고학이 아니라 지질학인가에 대해서, 고고학은 추억의 층들을 파고 들어가 지층이 만든 내용을 주목하면서, 층위가 다르거나 다른 솟아난 지층에 등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아울러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두 저자는 층위의 문제가 아니라 배치물의 문제로 바꾸어 보았다. 지층에는 단층 현상도 있고, 마그마가 솟아올라 정상이 아닌anomalie 층으로서 새로운 층위를 형성하기도 하듯이, 삶의 영역에서 상식적 관습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에 단절(봉기, 저항, 항쟁)도 있어서 상식을 넘어서 양식도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하나의 길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표현의 솟아남(전복, 혁명)이 있으며 베르그송의 표현 방식으로 고등양식도 있다.



A_배치물Agencements


지구라는 측면과 달리 삶의 총체성에서 여러 배치물들을 지층과 달리 영토를 지니고 있다. 배치물은 영토를 즉 지구 환경을 탈코드화한다. 즉 생태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배치물들은 유기체, 환경, 개체의 행태를 넘어서는 내용과 표현을 생산해낸다. 손이 이동의 수단을 넘어서 도구를 다루듯이, 혀가 먹는데 사용에서 발성의 포현으로 전환하듯이, 표현에는 기호체계가 나오고, 내용에는 실행의 확장이 있다는 것이다. 변용태의 실행이 있다는 뜻과 같다. 표현에는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나듯이(언어, 기표), 내용에는 활동성의 확장(도구, 컴퓨터)이 일어난다. 배치물들이 탈영토와 확장으로 도주선을 만들며, 또는 전쟁기계로서 탈영토화의 여러 선들을 만든다. 여기서 생명체의 배치물에서는 새로운 생성으로 리트로넬로 이상으로 여성되기, 동물되기, 광물되기에도 이른다.


우선 겉보기에 지층(추억)도 배치물(실체, 신체)도 탈주선의 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서 선(계열)들의 경향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추억들이 관습과 습관에 따라 정해진 길을 가는 측면이 있는데 반해서, 새로운 길을 뚫고 다른 길을 마련하고자 하는 흐름(연속성)은 여전히 내재해 있다. 전자는 가는 길과 방향이 정해져 있어서 예측과 실행에서 반복이 용이한 편리에 따른다는 점에서 홈패인 공간을 간다.(톨의 방식) 이에 비해 후자는 물결이 퍼지듯이 여러방향으로 도는 예측불가능하고 범위를 정할 수 없이 흘러간다는 점에서 매끈한 공간으로 퍼져간다.(결의 파동) 전자가 건전한 도덕과 질서라는 측면에서 중요시한다고 보면, 후자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통일된 단위의 진행처럼 여긴다. 이에 비해 후자는 특이성을 지닌 자의 별종의 행동으로 여긴다.



R_리좀Rhizome


이 특이자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체이며, 리좀이다. 또한 1227년에서 제시하듯이 노마드이며, 1914년에서 해명하듯이 위계를 이룬 계급이 아니라 무리, 즉 인민이다. 이들은 전자처럼 대열의 뒷꼭지만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판이라는 진동을 달리 바꾸려 하면서, 촟체적 흐름의 진행을 강도와 속도를 지니고 진행한다는 점에서 정념과 파동이다. 이런 운동방식에는 항상 자연의 내재성과 끈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파토스의 실행에 닮았다. 게다가 패인 공간에서 선의 운동이 편집증의 징후를 남기는 것과 달리, 파동의 확장에서는 방향이 전혀 다를 수도있고 비슷한 방향이라도 가지치기(각도)와도 전혀 달리 이어지고(접속) 솟아난다(창발)는 점에서 분열현상이라 할 수 있다.


리좀의 흐름은 다양하다. 패인공간의 선을 달리기도 하며, 절단이 있고(갈라치기), 층위라는 점에서 파편화의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 다양체로서 겉으로 드러나지 안은 내재적 욕망과 정념을 지니고 있기에 표면의 길과 배치되는 경우가 달리 가로지르는 위험도 있다. 게다가 리좀에는 본성적(자연적) 권능의 힘이 항상 현재에 닿아 있어서 권력에 대항하여 흐름을 만드는 탈주선의 길도 있지만, 파시즘에서처럼 단순 파괴로 돌아서서 죽음의 선으로 갈 위험도 있다.


리좀은 하나의 단위처럼 보이지만 다양체로서 총체이며, 다양한 변용태들과 다양한 변이들을 생성하고 환경과 영토를 넘어서 새로운 삶의 영역(추상기계)을 만들어 갈수 있다는 점에서, 권능의 발현 지역(지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총체성의 연관 속에서 창발을 실행한다. 지방과 온지구 사이의 내재적 연관, 즉 생태적 연관을 공감, 공명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고, 겉보기에는 불연속적인 다양한 변용태와 변이가 내재적으로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C_고른판, 기관없는 몸체_Plan de consitance, Corps sana oranes


리좀이 펼친 다양체의 결들이 표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무엇인가? 이제 표면은 톨들의 집합이 아니라 결들의 진도와 파동이며, 그 파동 위에서 흘러가는 변용태들과 변이들이 있다. 이들은 물결위에 나뭇잎이 흘러가듯이 물결의 파동은제자기 운동을 한다. 이런 결을 고른planomene평면이라 부르자. 고른 평면 위를 가로지르는 현실태로서 개체 또는 개인이 내재성과 연관없이 활동하는 측면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심층과 연결이 끊어진 것으로 물위를 떠 있는 낙엽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고른 평면 안에 있으면서 그 위를 속도를 지나고 변용태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변용태의 원형적인 것을 기관없는 신체라고 부른다. 이 변용태는 추억의 집합이 아니라 기억총체로서의 현실태이다.


고른면과 기관없는 신체는 양면성이다. 안과 겉이다. 양태적 측면에서 기관없는 신체가 능동적이고 고른면이 수동적이다. 고른 판위에서 능동성으로서 기관없는 신체는 연결접속을 증대시키고 창조성으로 나아간다. 이를 저지하는 수동적 측면이 있고, 또는 이를 방해하는 암적 존재가 있다. 타성이 있고, 권력에 포섭된 전쟁기구들이 있다. 전쟁기계는 연합의 공감을 통해서 확장해 나간다. 예술, 발명, 과학(생명, 생태), 철학(역동)에서 이루어진다.   



D_탈영토화Deterritorialisation


이제 이 능동성이 생산하는, 실행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탈영토화이다. 표면에서 탈영토화의 효과는 다양하다. 우선 재영토화에 흡수되는 수동적일 수 있으며 기표작용적 체계에 흡수된다. 또는 재영토화를 가로질러 스스로 내재성을 포함하고 의식적 차원에 머물면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데 주체적 기호체계의 경우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상대적을 넘어 절대적일 수 있는데, 탈영토화의 길이 열려 있다.


이런 절대적 탈영토화는 우선 리좀의 흐름에서 배치물들 사이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탈주선을 행하면서 다양체들을 표현하는 것인데 실행의 장도 열려 있다. 또한 그리고 심층의 내재성과 연결되어서 강도 있는 솟아오름도 있는데, 이 분출은 운동에너지로만 충만한 것과 같아서 내용들(배치와 선들)과 연관없이 탈영토 자체가 새로운 대지 또는 새로운 우주를 만든다. 고원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런 운동은 선으로도 우너으로도 아니며, 회오리 즉 나선운동과 같은 것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의 근원운동을 이렇게 보았고, 우리가 추측하기에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욕망운동도 회오리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로 상대적 힘과 제한적 절대적 권능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M_추상적인 기계들(도표와 문)Machines abstraites(diagramme et phylum)


그러면 표면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엇인가? 이 위에서 실행되는 사건들은 어떤 초월적이고 완전한 이데아가 있어서 실해오디는 것이 아니라, 내재성의 욕망들이 분출되어 실행되는 것이며, 즉 추상적 기계들이 있다. 상대적과 절대적 배치들에서도 추상적 기계들이 있다. 추상적 기계들은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점들이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형식적이지 않은 기능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추상적인 기계는 질료-기능들의 다져진 집합(위상과 문) 즉 추상적 상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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