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가 되다 혹은 슈퍼휴먼으로 거듭난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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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대청. 「슈퍼휴먼으로 거듭난 장애인」, 『포스트휴먼 시대의 휴먼』, 2016.
2. 이재준. 사이배슬론에서 포스트휴먼 장애의 특성, 『인문과학연구』 74호, 2022.
3.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장애의 의료모델과 사회적 모델
몇년 전 장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장애학의 도전'이라는 책이었는데, 장애학을 기존에 '의료모델'로만 보았던 기존의 생각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의료모델은 장애를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문제로 간주하고 이를 의학적, 치료적 접근으로 해결하려는 관점이다. 이 모델은 장애를 개인의 결함이나 질병으로 보고, 장애를 최소화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의료적 개입과 치료를 강조한다. 의료모델은 주로 의사와 의료 전문가들이 주도하며, 장애인에 대한 지원은 치료와 재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의료모델에서는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의학적 치료, 재활 프로그램, 약물 치료 등을 통해 장애를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둔다.
반면, 사회적 모델은 장애를 사회적, 환경적 문제로 간주한다. 이 모델은 장애를 개인의 신체적 차이가 아닌, 사회가 장애인을 어떻게 대우하고 어떤 환경을 제공하는가에 따라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사회적 모델은 장애인이 사회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물리적 접근성, 차별 철폐, 사회적 인식 개선 등을 강조하며, 장애인의 권리와 평등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사회적 모델에서는 장애인이 접근하기 쉬운 건물, 대중교통의 편리성, 고용 기회 제공 등 사회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의료모델과 사회적 모델은 각각 장애에 대한 관점과 접근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장애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도 다르다. 의료모델은 개인의 치료와 재활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회적 모델은 사회적 변화를 통해 장애인의 권리와 평등을 추구한다. 의료모델은 주로 개별적인 치료와 관리에 중점을 두며, 장애를 개인적인 문제로 취급한다. 반면, 사회적 모델은 장애를 사회적 차별과 접근성 문제로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변화를 촉구한다. 예를 들어, 의료모델에서는 장애인의 건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의료적 접근이 중심이 되지만, 사회적 모델에서는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법률 개정, 사회 인식 변화, 제도적 지원 등이 중점이 된다.
이 두 모델의 비교는 장애인 정책과 지원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의료모델은 장애인을 치료와 재활의 대상으로 보고, 개인의 결함을 개선하려는 접근을 취한다. 반면, 사회적 모델은 장애인을 권리와 평등의 주체로 보고, 사회적 장벽을 제거함으로써 장애인의 완전한 참여와 통합을 추구한다. 이는 장애인 정책이 단순히 의료적 지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변화와 포용을 통해 장애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의료모델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전문 의료 서비스를 강화하고, 사회적 모델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법적 보호와 사회적 지원을 강화하는 등의 접근이 필요하다.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관점
주변에 경미한 것 같긴 하지만 경계성 장애와 해리성 인격장애 그리고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일을 같이 하다보면 너무 괴로워하고 속이 상해서 하소연을 하곤 했다. 나 역시도 같이 무엇인가를 해보니 복장이 터지고 미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졌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어느순간이 되면 누구나 그렇지만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바뀌는 모습이나 갑짜기 화를 낸다거나 혹은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게 쌓이다 보니깐 나도 모르게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면 담장을 높게 치고, 울타리를 튼튼히 한 다음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눈도 쳐다보지 않고 대화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회사 내 다양성 담론을 맡고 있는 동생을 만났다. 그 동생은 국내에서 최초로 장애와 자폐를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실제 신체적, 정신적 장애들이 일상에서 생활하는 것을 넘어서 비지니스 측면에서 일을 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더욱이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하는 장애들인들은 그 차이에 맞게 다양한 채널과 방법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실제로 다양한 퍼포먼스가 가능해진 상태였다. 내가 열불나는 상황을 이야기하니 그 동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폐가 있는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는 '제조업 기반의 성장형' 조직에서 일하기 때문에 일단 주체로써 인정을 못 받는다. 더욱이 경제주체로 설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정해 놓기 때문에 '장애화'가 진행된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복지의 대상자가 되어 버리고 삶의 희망이나 비전, 동기부여 등은 사라지게 된다. 마치 뇌적체수술을 받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동생은 '다양성'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소위 말하는 '뉴로다양성'의 관점에서 자폐에 맞게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고 신체적 차이에 맞게 그 사람이 더 잘 집중할 수 있는 일들을 연결시켜 준다. 기존의 일잘하던 사람들을 데리고 소위 '성과'라고 하는 것을 내는 사람들이 리더가 되는 시기는 끝났다. 앞으로는 다양성을 얼마나 이해하고 상황과 사람에 맞게 세분화해서 리더십을 실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동생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니깐 내가 화내던 그 사람이 더 잘하는 일이 있을 테지만, 그런 일을 못 만났고 못 찾아서 헤메이고 서성대다가 자기도 잘 못하는 일에 동원되어서 허우적 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계속 낯설은 상태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때문에 화를 내거나 불안해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전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살마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안도 하고 존중도 하는 곳이라면 그보다 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안정감 있게 일을 하고 또 성과를 내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도 회복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전에 내가 생각했던 프레임을 다 갈아치우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애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모두 갈아치워야만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페미니즘으로 만들어진 공감대와 감성을 가지고 소수자 혹은 장애인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이 느끼는 어려움과 힘듦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본다. 백인남성의 우월한 아이언맨 만들기에 동원되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져내리기도 한다. 지난달에 실제로 뉴럴링크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만으로 뉴럴링크에 접속해서 물건을 움직였다는 뉴스를 보았다.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까? 내면적으로 '장애학의 도전'이 시작된 것을 느꼈다.
패럴림픽과 사이배슬론이나 같은 관점이 아닐까?
패럴림픽과 사이배슬론은 장애인 스포츠의 두 가지 중요한 축으로, 각각의 목적과 특성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패럴림픽은 신체적, 감각적, 지적 장애를 가진 선수들이 참가하는 국제 스포츠 대회로, 1960년에 처음 개최되었으며,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여름과 겨울로 나누어져 있다. 이 대회는 육상, 수영, 휠체어 농구, 휠체어 테니스 등 전통적인 스포츠 종목들을 포함하며, 장애인 선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고, 사회적 인식과 포용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패럴림픽은 장애인 스포츠의 가장 큰 축제로 자리매김하며, 참가 선수들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경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는다. 이를 통해서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도전하고 인간의 정신적인 승리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세계적인 제전이 되었다.
반면에, 사이배슬론은 기술과 스포츠를 결합한 독특한 형태의 대회로, 2016년에 첫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로봇 보조 장치,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전동 휠체어, 의수, 의족 등의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일상 생활 능력을 평가하는 경기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경기는 참가자가 뇌파를 이용해 컴퓨터를 제어하는 능력을 겨루며, 로봇 의족 경기는 장애인이 로봇 보조 장치를 착용하고 주어진 코스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완주하는지를 평가한다. 사이배슬론의 목표는 장애인들이 첨단 기술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탐구하고, 기술 발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2023년에는 사이배슬론 국제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이주현 선수가 서울시 명예시장으로 임명되기도 할 만큼 사이배슬론에서 다뤄지는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두 대회 모두 장애인들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접근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 패럴림픽은 전통적인 스포츠 경쟁을 통해 사회적 통합과 포용을 촉진하는 반면, 사이배슬론은 기술 혁신을 통해 장애인들의 일상 생활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를 통해 패럴림픽은 장애인 스포츠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사이배슬론은 미래 지향적인 기술 발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패럴림픽은 세계적으로 큰 규모로 개최되며, 수천 명의 선수와 수많은 국가들이 참여하는 반면, 사이배슬론은 비교적 소규모로 진행되며, 특정 기술 분야에 중점을 둔 경기를 치른다. 패럴림픽은 선수들이 장기간의 훈련과 준비를 통해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사이배슬론은 기술 개발자와 연구자들이 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실험하고 적용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한편으로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접근이 아니라 여전히 의료모델에 근거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패럴림픽의 경우에는 종목 자체를 두고 장애인들이 일반인과 똑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려고 하지만, 사실 그 종목들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일반인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극복해야할 스포츠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스포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구성'의 방식에서 보면 스포츠도 일종의 '사회적 구성'의 결과이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특성을 반영한다면 그 자체로 다른 스포츠 방식이 발명되고 도입되어야 하지만 사이배슬론과 비교했을 때는 오히려 더 인간적인 것, 차이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생긴다.
아울러 사이배슬론 역시 기술의 발전을 추구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윤리적인 문제를 장애인들이 마치 '영웅'이 되어서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장애를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고정시킴으로써 장애는 기술로 충분히 극복될 수 있으며 장애를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미 전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트랜스휴머니즘이 추구하는 것처럼 트랜스한 인간으로 가기 위해서 이미 한참 정상인보다 떨어져 있는 tansed된 사람들을 trans한 상태로 만들어 놓은 시혜적인 방식의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것 같다.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바꾸어야할 우리의 인식은 너무나 많다.
장애가 아닌 신체가 손상된 사람이라는 표현
장애를 일부러 피하기 위해서, 장애화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손상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손상된 신체는 행위자 네트워크에 따라서 다양한 상호작용을 기계와, 다른 사람과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오히려 장애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도 같다. 손상되었다는 표현, 그리고 그 손상 때문에 변형되었다는 인식은 오히려 '돌연변이'와 같은 정상성을 이미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상적이지 않게 신체를 가지게 된 것은 '손상'되었던 어떤 사건 때문이고 이 사건은 극복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 등장하면서 그 극복은 혼자 하는게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와 함께 한다는 논리가 어쩐지 어색하다.
더욱이 이 글을 읽으면서 '고도의 훈련된 지성'을 가진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을 필자 스스로는 감지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읽는 사람을 '이해력이 손상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식의 변화를 통해서 사회적 장애모델은 장애를 '차이'로 인식하고 그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들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손상된 신체'는 이미 브라이도티도 말하는 '조에'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변형된 신체를 변형되기 전의 기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그 논리는 사이배슬론이 가지고 있는 논리를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정상과 비정상의 논리에서 여전히 비정성이긴하지만 그렇게 표현은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더 심각한 의료모델에서 '손상'이라는 단어를 가져온 것은 아닌가?
인정욕구와 지위이론 사이에서 '사랑'
헤겔로부터 시작된 인정욕구에 대한 논의는 낸시 프레이저와 악셀호네트의 논쟁에서 꽃을 피운다. 페미니즘 논쟁이나 성소수자 혹은 소수자 문제, 장애화의 문제는 결국 '인정'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느껴진다. 장애와 관련된 문제를 접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낸시프레이저는 간단하게 말하만 '지위'이론을 통해서 소수자와 차별받는 존재들에게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전까지는 정체성정치와 인정투쟁과 같은 문화의 문제였다면 '지위모델'은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그 존재를 법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회복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낸시프레저의 사상을 기반으로 장애의 의료모델과 사회모델을 보자면 이것은 일종의 '프레이밍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장애'라는 방식이 어떻게 프레임지워지고 또 재사용, 재가공되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장애학의 도전'이라는 말처럼 사회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순서로 변혁의 정치를 시작해야할까?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편 악셀호네트는 사회학자 허버트미드의 논의를 빌려와서 사회적인 존재로서 '목적격 자아'와 개인적인 존재로서 '주격자아'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지점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미 사이보그는 미래와 맞닿아 있다
어떻게 보면 '사이보그다 되다'의 두 작가는 주격자아와 목적격자아가 서로 화해를 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이보가 되다'라는 제목처럼 사이보그가 되었지만 그 자체로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그 과정을 공개하는 것으로 화해를 사회적으로 선포한 것처럼 보인다. 악셀호네트의 대안은 서로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을 제안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상대방에 대한 공손과 존중을 아끼지 않고, 존엄이라는 인간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어보고 관심을 가지고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 먼저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비로소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권리부여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법적권리가 먼저 주어지면 그것은 정체성정치로 바로 이어져서 사회적 갈등이 권력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그 다음이 바로 '사회적 연대'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지위를 인정받고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연대를 이루는 과정을 주장한다. 이로써 악셀호네트는 갈등이 넘쳐나는 사회의 회복적인 대안으로 사랑, 권리부여, 사회적 연대라는 수순으로 변화의 스토리를 완성한다.
나는 사랑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서로에 대한 사랑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화해가 필요하며, 그 화해의 깊이 만큼 다른 이들과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되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충분히 더 사랑할 수 있고 더 깊이있게 서로를 알아갈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사이보그가 되다의 작가들은 '사랑이 식어버리고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 자아'를 가진 이들에게 사랑의 언어로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나를 한 번 봐주세요!'라고 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진정한 인간일 때 우리 가슴 속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는지를 들어보라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진정한 인간일 때 서로 나누지 않고 서로 비교하지 않고 서로 허영을 부리지 않고 상호보완적인 존재로서 미래를 다시 그려나갈 수 있다고 말이다.
낸시프레이저의 사상의 핵심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프레이저는 경제적 재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를 주장했다. 이는 사회 정의의 핵심 요소로, 빈부 격차를 줄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정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 프레이저는 문화적 존중과 인정이 경제적 재분배만큼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정체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사회 정의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소외된 집단의 문화적 인정과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변형적 정의(Transformative Justice): 변형적 정의는 기존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레이저는 단순히 경제적 재분배나 문화적 인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사회적 구조와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진정한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프레이밍의 정치(Politics of Framing): 프레이저는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접근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프레이밍의 정치' 개념을 통해, 어떤 문제가 공적 논의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는지, 그리고 어떤 문제가 배제되는지를 분석했다. 이는 사회적 쟁점이 설정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중점을 둔다.
케어의 정치(Politics of Care): 프레이저는 돌봄 노동(care work)에 대한 재평가와 인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여성들이 주로 담당하는 돌봄 노동의 사회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공정한 보상과 지원을 주장했다. 이는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데 기여했다.
악셀호네트의 인정투쟁
악셀호네트는 프랑크푸르트 3세대 학파이다. 1세대는 호르크하이머와 마르쿠제, 아도르노였고 이들이 고민한 것은 자본주의로 망가져가는 1차원적 인간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1세대는 인간의 타락은 사실 ‘이성의 도구화’에 있다고 보았고 이러한 이성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 ‘이성을 도구로 해서 분석하는 일들’을 진행한다. 도구화된 이성을 비판하는 움직임의 핵심에 2세대 비판학파인 하버마스가 있다. 하버마스는 새로운 이성의 개념을 유동적으로 창조하는데 다름 아닌 ‘의사소통합리성’이다. 공론장에서 만들어지는 이성의 창조성을 제시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체제와 생활세계의 대립에서 점점 체제에 전복되어 가는 생활세계를 구하기 위한 이성의 창조 방식을 ‘의사소통합리성’으로 설명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3세대 학파들이 등장하는 데 클라우스 오페와 악셀호네트가 바로 주인공이다. 특히 악셀호네트는 사회구성에 대한 하버마스의 구성이 너무 ‘거대한 담론’이라서 구체적인 사회적 문제들을 다룰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사회심리학자 미드의 이론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 구성 이론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정과 무시의 대안으로서 ‘사랑’, 지위와 정체성의 구성으로서 ‘권리부여’, 새로운 사회적 구성체들의 대안으로서 ‘연대’이다. 인간의 내면에 살아 있는 ‘사랑’의 본능을 사회로 끌어내는 방식은 권리부여이고, 그 권리부여를 받은 사람들의 연대에서 ‘미래의 조건’들을 현실화 시키는 기획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악셀호네트는 먼저 낸시프레이저가 야심차게 구분한 재분배와 정체성, 지위 이론의 테두리를 허문다. 원래부터 사회는 구분될 수 없는 방식으로 인정투쟁을 해 왔고, 낸시프레이져의 구분은 어느시점에서 맞지만 통시적인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있던 것들의 구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거대담론으로 나누어 버리는 하버마스의 방식을 동일하게 가져오는 낸시프레이저의 이론은 오히려 아무런 사회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결과에 다다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헤겔의 인정투쟁에 대한 해석, 마르크스의 재분배이론에 대한 다른 방식의 대안, 지위와 절차보다 더 중요한 주체의 문제를 가지고 낸시프레이저와 악셀호네트는 여전히 싸움중이다.
신은 네 글자를 말했다
벌써 10년도 지난 이야기이지만, 에이미멀린슨은 테드강연에서 우리 사회의 '장애'에 대해서 말한다. 그녀가 처음 태어났을 때 의사는 그녀의 다리를 보면서 "이 아이는 앞으로 걷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장담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이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에이미 멀린슨을 태어나자 마자 장애를 극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재활훈련을 하고 트랜스휴머니즘의 관점에서 탄력있는 다리를 선물해주고 주대회에서 나가서 운동선수가 되게 만들었다. 16년이 지난 어느날 누군가 에이미 멀린슨 앞에 찾아왔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16년간 모은 에이미 멀린슨의 사진과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용서를 빌었다. 알고보니 그는 처음 에이미 멀린슨이 태어날 때 부모님에 이야기한 산부인과 의사였다.
여기까지 읽으면 '역시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열정을 보여주어야 해!'라고 할 수 있지만, 에이미 멀린슨은 말한다. "오히려 나에게 장애가 있었던게 아니라 그 의사에게 장애가 있었다"라고 말이다. 지금도 어느사전이라도 장애라고 하는 disable이라는 단어는 깨지고, 상하고, 손상되고, 망가지고, 으깨진이라는 뜻으로 나온다. 에이미 멀린슨이 10년전에 이야기한 것이지만 지금도 그렇게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에이미 멀린슨은 오히려 장애를 다시 정의한다. "장애란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고, 사람들을 존중할 수 없으며, 자기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이다. 그리고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강연을 마친다.
Let's play with me
옛날에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아이들에게 오직 4글자만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Let's play with me"라고 말이다. 신이 정말 내려와서 사람들을 만든다면 요한 하이징가의 호모루덴스처럼 모두와 놀이하고 이야기하고 대화하지 않을까? 인간의 허영이 극에 달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장애'의 정의를 몇 백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진리처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놀기'를 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닐까? 아니 그 안에 장애가 굳어져 버린 것은 아닌가. 물론 장애학의 논리를 비틀어서 이렇게 장애를 가진 것을 너네가 말하듯이 인정하고 그냥 놔두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싸움
생각해보면 장애에 대한 공동체적 접근을 대안으로 삼는 일반적은 '상호관계를 통한 사회적 모델의 성취'와 다르게 자유주의 모델을 가지고 '개인적인 장애의 극복'으로 패럴림픽이나 사이배슬론의 열정은 그 자체로 다른 접근을 하고 있기도 하다. 오히려 트랜스휴머니즘이나 포스트휴머니즘의 논리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는 '자유주의 모델'과 '공동체주의 모델'이 서로 싸우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공동체적으로 장애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또한 차이로 인식하는 방식이나, 자유주의적으로 장애를 정의하고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보이는 '경쟁'중심의 신자유주의 모델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차이로 인정하기 이전에 '차이'를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차이에 대한 접근이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차이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더욱이 '자본주의' 하에서 성과, 성장, 효율, 효과성과 같은 가치들이 여기에 가미되면 다 많은 문제와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도 있는 자연스러운 자본의 논리에서 장애에 대한 생각은 더더욱 사람들을 불안감과 리스크에 대한 노이로제에 빠지게 만드릭 때문이다. 생각에 생각에 생각에 꼬리를 물고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먼저되어야 하는 것도 같다.
https://brunch.co.kr/@minnation/1442
https://www.ted.com/talks/aimee_mullins_the_opportunity_of_adversity?language=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