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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07. 2024

서사가 만들어내는 정체성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를 읽고

이야기는 반드시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행했던 사건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둘이 연결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성을 찾아가는 특성이 있어서, 사건안에 있는 장소와 시간성이 자신과 연결되는 것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story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일련의 사건의 연결이지만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거대한 이야기이든 작은 이야기든 서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스토리를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어서 말하는 사람까지 이야기 안에 초대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거나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어볼 때는 반드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친구들이 있다.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설명하는데,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그런. 그런 친구들과는 쉽게 친해질 수가 없는데, 그 친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혹은 할 건지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한 마디로 모른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친한 친구가 되면 될 수록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또한 서로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서 함께 정체성을 만들어 가기 때문에 더욱 친해질 수 밖에 없다. 사실 내가 '그런' 친구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꺼려지고 힘들어한다. 살아온 삶이 때론 부족하고 때론 부끄러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을 나누면 더 부끄러워지거나 더 누추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시간 나의 이야기의 문은 '잠김'상태였다. 누구에게나 열지 않았고 그것을 나의 자랑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처럼 소심하거나 주저하는 사람들을 보고 '소극적인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일수였고, 나는 그 딱지표를 떼느라 긴 시간 애를 먹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딱지를 발행해주는 사람들은 멀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 딱지를 떼지 않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 친구들을 만나면서 나는 어떤 '공백'이나 '해방감' 그리고 '자유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에 빈 곳으로 들어온 그 '친구'들은 언제나 나의 내면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주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마음 가득 행복한 이야기를 듣고 잠들었던 때가 생각난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나는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했었다. 다른 사람보다 민감함을 가지고 태어나서 수치심도 자주 느끼고 불안감은 100배정도 더 잘 느낀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보다 늦게 자고 누구보다 빨리 일어났다.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 행동과 시선들의 연결이 끊임없이 '무한한 정보'로 내면에 들어왔기 때문에 어느순간 자칫하면 성인 ADHD 혹은 다중자아를 가진 분열증까지 갈 것 같았다. 그 때 구원처럼 찾아온 것이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나의 분열된 공백들을 매섭게 쪼개어가는 정보들을 몰아내고 하나하나 의미를 꿰어내어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세상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미우라아야꼬의 '양들의 언덕'


22살때였다. 한참 군대갈 준비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아는 선배로 부터 딱 한 단어로 쓰여진 앞표지가 있는 책을 선물 받았다. '경인에게'라는 단어밖에 없었고 책 표지를 보니 '미우라 아야꼬'의 '양들의 언덕'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전까지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했기 때문에 '소설'과 같은 장르는 딱 질색이었고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마구마구 정보를 먹어치웠다. 그러다보니 불안하고 또 배고프고 힘들었는데도, 그 상태 자체를 즐기고 나를 만났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벗어날 수가 없던 터였다. 그런데 그 책을 선물받고 보니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조금씩 더듬으며 작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던 것이 어느덧 지하철을 내리는 것도 잊어 버릴만큼 그 이야기에 잠겨 버렸다. 


로이지는 말그대로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려버린 술주정뱅이 막나니였고, 그의 아내 나오미는 청순함과 순수함의 결정체로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었다. 로이지는 항상 나오미를 기다리게 하고, 다른 여성과의 밀회를 즐기면서도 술을 끊지 못했다. 나오미는 언제나 그런 남편을 기다리면서도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몰래 나오미를 흠모하는 다케야마 선생님이 자신의 속마음을 작가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투명하게 알려준다. 이렇게 나오미와 로이지의 이야기에 빠져든 나는 단 순에 그 이야기를 읽어버리고서는 지금까지 20년이나 그 이야기에 기대여서 일종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나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만들어낸 이야기일지라도 그 안에 자신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에게 나를 투사해서 공감을 얻거나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 있다


이야기는 항상 처음에 시작할 때부터 끝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이야기를 펼치는 사람은 언제나 마침내는 그 마지막 장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내면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경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 때문에 '나는 누구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끊임없이 쏟아지는 데이터들의 연결들이 무한의 정보로 다가오는 시대에 '이야기'는 언제나 현재로 부터 구원을 만들어내고 데이터와 정보가 넘쳐나는 시간대와 '시차'를 만들어서 우리를 다른 시공간으로 데리고 간다. 그래서 어쩌면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구원이면서도 선물처럼 내용에서도 우리에게 공간을 선물해주고 시간을 비틀어 버리는 신기한 마법이다. 


이야기가 끝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고, 이전의 장소와 시간과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옮겨갈 수 있다. 단순히 소설을 이야기로 보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연결이 모두 '이야기'라고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를 쓰고 있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연결이 끊어진 것처럼 보여도, 마르셀푸르트스트와 같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떠나는 여행은 과거를 구원하고 현재와 연결시킨다. 자신의 내면에서 계속 연쇄하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적다보면 깨닫는 것은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고 자신이 결국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주체성을 찾아낸다. 


더욱이 그 글들을 시작할 수도 있고, 끊어낼 수도 있고, 마무리하고 끝을 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를 살고 말하는 이들'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내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야기와 타자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집중했던 시기에 알게된 폴리쾨르는 나에게 이야기를 통해서 타자를 찾아내고 그에게 시간을 불어넣어주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그동안 내 안에 알게 모르게 붙어 있었던 감정과 이미지들이 하나로 만나서 그 사람이 걸어가는 발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 타자의 이야기를 밝히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도 밝히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서 글을 쓸때, 이야기를 쓸 때이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마치는 주체성을 찾아가는 여행이 되어 버린다.  


사느냐 이야기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과거에는 이야기와 서사가 정보와 분리되지 않았었다. 내가 들은 정보는 항상 누군가와 연결된 이야기의 일부였고, 이야기는 언제나 끝도 없는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사는것과 죽는 것을 굳이 나누고서는 정보에 파묻혀 산다. 그러니깐 어쩌면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만들어가고 있는 이야기를 말로 할 것인가의 문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이야기가 더 이상 진행되지도 않지만 그 이야기를 말로도 글로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은 '생존'하는가 아니면 '이야기'하는가 사이에서다. 


나는 사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10년전에 한 소설가의 강연을 들으러갔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강연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분하게 만들고 골려먹는 친구들을 향해서 마음속으로 외쳤다고 한다. '다 써버릴 거야, 너네가 어떻게 했는지!'이렇게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로 남겨진 사건들은 그 안에서 다양한 감정과 정보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읽는 사람과 만나서 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놀려먹던 친구들은 영원히 박제되어서 이야기에서 나올 수 없고 그 이야기가 끝나고 시작하고 전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과거을 읽어내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부지런히 쓰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렇게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항상 손을 가만히 두지 않고 쓰기 시작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A'로 만들어서 어떤 말을 했는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써 놓고, 나에게 아름다운 경험을 주는 사람들은 한없이 가볍고 빛나는 언어로 '그들의 그림자'를 기억하고자 써 놓았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나의 기억에서는 멀어졌지만 언제나 내가 그 이야기를 펴고 읽기 시작하면 다시 그들이 부활하여 과거를 밝혀주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공명시켰다. 그래서 이야기는 나를 치유해주기도 했고, 때론 분열시키기도 했으며 눈을 멀게 만들기도 하고 가슴을 뛰게 해주기도 했다. 



이야기에 둘러쌓여서 살아왔다


부모님은 해남 땅끝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곳은 언제나 이야기의 신전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모든 이야기들이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고, 과거의 이야기가 어느정도 미래의 이야기까지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동네 오빠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고랑에 빠진 이야기, 학교 갈려면 10킬로나 걸어야 했기 때문에 가면서 친구들과 싸운 이야기, 서커스단이 해남읍내에 방문해서 모든 청년들이 몰려가서 들은 이야기, 한때 홍수가 나서 마을 전체가 잠겨버려서 사람들이 힘들었던 이야기. 이렇게 이야기의 신전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라고 그래서 아주 어릴적부터 이야기를 듣고 상상을 했다. 내가 만나보지도, 대화를 해보지도 않은 존재들이었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 내가 참여하면서 만들어간 이야기는 항상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이야기는 항상 좋은 이야기만 있는게 아니니깐.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물리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의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낯설다. 더군다나 나 역시도 그렇게 생명을 다할텐데 그럼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들도 해본다.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작은 이야기들의 연결을 이야기한 하이데거의 그림자가 죽음을 몰고 나에게 다가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생성의 빛을 한나아렌트가 가지고 이끌어가기도 하는 나의 내면. 어쨌든 나는 항상 이야기에 둘러 쌓여 있고, 또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서사, 이야기, 사건이 만들어내는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사의 종말, 이약의 위기'가 자연스러운 세상 같다. 그래서 그 회복약으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갈망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것을 욕망과 자본과 적절하게 섞어서 제공하는 온라인 플랫폼의 콘텐츠를 보면서 사람들은 마치 감기약을 먹듯이 끊임없이 자신의 눈으로 이야기를 먹고 마신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만든다고 한다면 이것도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 나에게 가장 큰 이야기는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였고, 예수님이 살아온 이야기였으며 앞으로 더 많은 인류가 공감하게 될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에 잠기기는 하더라도 다시 나와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면 좋겠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고 마음을 쏟고 또 아파하거나 힘들어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다. 부족하고 빈약하고 소심하고 연약해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주체가 된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살아내는 삶이 도래하면 좋겠다.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는 사이에 누군가의 이야기는 그의 마음 속에 데이터로 분해되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도 마음 속에 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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