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혼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Nov 08. 2016

새 하늘과 새땅

하나님나라의 도래

시공간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는

항상 두개의 방점 가운데 방황한


하늘과 땅

시간과 장소


과거와 미래

기쁨과 슬픔


나와 너

하나님과 인간


이런 식의 인식론에서 출발하는

새하늘과 새땅의 연결성은


그 가운데 내가 어디에 있어야할지

자리를 찾는 과정이리라


약간은 다른 의미의, 아니

내가 그렇게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한번 여행을 떠나보듯이 만나보는 것도

인생에는 필요한게 아닌가


너무 큰 진리는 언제나

경험적으로만 만나게 되기에


경험해보는 것들로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20150817_현대기독교연구원
리처드 미들턴_새하늘과 새 땅
구원, 십자가, 성육신, 하나님 나라   


들어가기

이 책은 두가지의 주제를 가진다. 구원과 종말이다.

성육신을 통해서 구원의 근거를 포착하는 것이 바로 고대 기독교 구원론이었다. 이레이우스, 안셀론과 같은 사람들은 성육신을 통해서 구원의 의미를 찾았다.

동시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구원을 포착한 구원론이 있었다. 계상과 현물적 대속과 같은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구원론은 구원에 대한 방법이다.

미들턴이 제시하는 것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구원의 범위는 얼마나 총체적인가이다.

이러한 총체성 이후에 종말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종말론은 구원을 시간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하나님나라 역시도 임한다는 개념에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나라,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나라, 도래할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종말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모두 개인의 구원, 역사의 구원, 우주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구원과 종말론은 결국 한 이야기가 아니라 똑같은 이야기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 이 창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야기한다.


새하늘, 새 땅

신칼빈주의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중심으로 이 책은 풀어가고 있다.

새하늘과 새땅은 기독교세계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원론 극복과 삶의 전영역의 그리스도 주재권이 목표인 복음주의 대중신학으로서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적인 틀은 창조-타락-구속이다.

신칼빈주의 기독교세계관의 주제는 구원을 넘어 창조에 근거한 문화소명과 문화의 진보, 일반은총론과 영역주권론을 아우른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인격적인 부분에서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 비인격적인 영역인 사회제도와 문화, 국가운영에 까지 아우른다.


그리스도의 비전, 이후

그리스도의 비전'이라는 책 이후에 미들턴은 성경드라마에서 추출한 총체적 구원과 변혁적 종말을 향한 신그리스도인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 구원의 총체성과 현세성 그리고 현세적이며, 변혁적 종말론이 뚜렷하게 강조되고 있다.

이 책은 구원에 대한 총체적인 관점을 제안한 저술이다.

이책은 총체적 종말론의 성경적 기초를 밝힌다.

이 책의 일차적 목적은 구약에서 시작하여 창조세계 구속에 대한 신약의 분명한 종말론적 비전에서 절정에 이르는 일관된 성서신학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다.


루터, 카이퍼

루터의 신학의 철저하게 죄성에 근거한 구원론적인 관점이었다.

그러나 세계관 운동은 타락에 방점을 찍거나, 구원론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퍼의 신학은 그래서 정치와 경제, 사회를 중심으로 해서 완전한 확장이 가능한 세계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창조를 강조하게 되면 문화명령에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게 된다.


미시담론, 거시담론

성경의 거시, 미시적 담론으로 기독교세계관을 재구성한 책이 바로 새하늘과 새땅이다.

기독교세계관에 토대를 둔 성서적으로 재구성한 총체적 구원론과 변혁적 종말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창조타락구속의 기세론의 기반위에 성서적 맥락의 사회윤리적 강조점이 두드러지게 표출되어 있다.

이 책은 구원론에서 종말론으로 진행하여, 하나님나라 윤리론으로 종결짓는다.

창조세계의 구속, 만물의 구속, 새하늘과 새 땅의 총체적 구속(폐기가 아니다), 종말론적 비전, 윤리적 함의, 하나님나라의 윤리, 복음의 총체적이고 현세적인 성격, 예수의 메시지의 전인격적이며 사회질서의 갱신을 의미한다.

복음주의 관점의 성서의 보편사적 해석은 미래 천국과 현세의 나라, 개인의 구원과 만물 갱신의 구원, 구속사와 세속사, 창조와 구원이 일치를 꾀함으로써, 개인주의적 복음주의 한계를 탈피하여 그리스도교 신앙과 구원의 세계안에서의 공적차원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공공신학으로서 신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한다.


총체성, 구원

총체성이란 holistic으로 표현하는데, 부분적인 것과 반대의 의미에서 전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분열적schismatic이란 용어의 반대로 통합적integrated라고 할 수 있다.

양극적poliar의 개념에서 dualistic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이에 반해서 총체적holistic, 관계적relational로 끝난다.

총체성은 다의적이다.

통합적 의미로서, 균형적인 의미로서 총체성을 이야기한다.

총체성에도 무게중심이 있다. 개인의 구원을 우선시하는 총체적 복음화 모델로 로잔언약이 있으며, 사회정의에 초점을 두는 총체적 복음화로써 WCC 방콕대회가 있다.


미들턴, 총체적 구원

플라톤주의 이원론적 구원개념에서 탈피하였다.

저 세상에서의 구원에서 하늘나라의 구원으로 변화된다.

세상 밖의 구원에서 영적인 구원으로 바뀐다.

구원의 저 세상성에서 현세적 구원으로 그 관점을 옮기게 된다.


현세성, 구원론

성경은 저 세상에서 구원, 내세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구원은 저 세상의 구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구원이다.

왜 미들턴은 현세적 구원을 강조하는가? 기독교 신앙에서 내세구원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결과 이원론적 구원관에 빠졌다.

현세구원을 강조함으로써 총체적 구원의 논리적 근거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세구원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변혁활동을 약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소망을 지칭하기 위해 하늘이란 말을 계속 사용하면, 지금 우리의 현세적 삶을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도록 변화시키기 위한 정당한 기대에서 우리 관심이 멀어질 지 모른다.

사실 우리 기대의 초점을 내세적 구원에 맞추는 것은 사회적 악에 대한 저항과 이 세상의 구속적 변화를 위해 일하는데 필요한 헌신을 소멸시킬 가능성이 있다.

미들턴의 현세적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세의 기본전제에서 출발한다.

영육, 성속,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이 삶, 구원과 세계를 분리시키지 않으려는데 있다.

믿음은 삶 전체와 관련이 있다.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가는 문제이거나 심판날에 휴가받아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아니다.

구원이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으로 이동하는, 영원한 시간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몸의 부활, 만물의 회복과 갱신이며, 불의한 세계가 의의 세계로 변화되는 샬롬의 세계질서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구원의 대상과 범위는 영적, 초월적, 종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인간과 자연, 우주의 육체적이며, 물질적, 그리고 사회적이며, 문화적 영역이 구속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배제된 것이 아니라 전포괄적이며, 전체적인 것이다.

구원은 창조세계 전체의 구원이다.

현세적 구원에서 현세적인 것과 현재적인 것은 구별된다.

전자는 천상의, 영적인 것과 반대되는 의미의 이세상적인, 지상적인, 세계적 혹은 내재적인 의미이다.

후자는 과거와 미래적인 것의 중간 시간인, 현재하는, 현존하는, 지금의 의미이다.

현세적 구원이란 구원이 세속적이란 뜻이 아니다.

단지 구원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 세계 자체의 구원이란 의미이다.


변혁, 구원론

형상회복의으로서의 구원은 형상회복설에 입각해서 발전과 진보라는 점진적인 구원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물회븩의 구원은 만물의 구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만물, 구원

인류의 역사과정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 과정안에 포함되어 있다.

만유구원론과 만인구원론의 대립 안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창조세계의 문화변혁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관계는 문화구속과 문화의 성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출애급은 하나님의 수속행동이면서 사회, 정치적 변혁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의 변혁적 삶은 하나님의 구원적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희년은 구속적 삶의 윤리를 말한다. 이 규정들은 윤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종교적, 혹은 신학적인 의미도 중요하다_톰 라이트

안식년과 희년은 이처럼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은혜로운 의도, 특히 그들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드려내는 이스라엘의 구속 이야기의 중요한 순간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련의 윤리적, 사회적 관습을 구성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공동체적 관계속에서,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경험한 바로 이 구속의 은혜와 정의에 대한 헌신을 구현하도록 요청받는다.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사회,정치적 정의를 행하신다.

그러한 신적 정의로운 행동은 다름 아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다. 구속과 정의에 대한 내용이다.

자기 목숨을 타인을 위해 내어주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이타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타인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이타적 대리행위를 통해 죄를 속죄한다.

개인적인 신앙고백 없이 구조악의 구속이 가능한가?


미들튼, 드라미

미들튼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성경을 통해서 드라마로 나타난다.

구약에서 구원은 출애굽의 구원과 현세번영적의 구원, 심판과 종말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출애급은 하나님의 구원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에서의 구원은 부활을 통한 우주적 통치로서 구속과 만물의 회복의을 구속으로 이야기한다.


미들턴, 구원이해

미들턴의 총체적, 현세적 구원은 다른 구원과 어떻게 다른가?

복음주의 맥락의 개인구원의 모델과 촟에적 구언은 어떻게 다른가

종교사회주의, 사회복음, 해방신학의 변혁적 구원과는 어떻게 다른가?

죄의 초인격성을 말한다.

구조악의 구속으로 확장된다.

인격적 구원, 내면적 구원을 넘어선다.

구원은 역사화되어 역사안에서 구원이 실현된다.

구원의 역사적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기독교구원론, 분류

법유형은 배상설, 만족설, 형벌대속론으로 속죄, 죄사함, 칭으로서 구원을 이야기한다.

진리 유형은 존재론적 합일의 구원으로서, 모범으로서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유형은 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자 그리스도, 역사안에서 해방으로서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구원이론, 흐름

성륙신론적 구원 incarnation

성례전적, 교회론적 구원 sacramental, ecclesiological

인간학적, 도덕적 구원 anthropological, moral

역사의 구원, 역사안에서 구원 in history

자연의 구원 ecologial


칼빈주의, 문화변혁

포용적 신칼빈주의의 문화변혁적 구원론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관점은 창조와 구원, 구속사와 세속사,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하거나 일치시킨다.

세속문화, 불신앙의 비기독교인에 대한 배타성과 제산속되를 강조하는 전통적 칼빈주의와 뚜렷한 관점의 차이가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두흐름은 다음과 같다.

카이퍼+바빙크 vs. 스킬더+반 드루넨


새하늘, 종말론

미들튼의 종말론에 대한 성경 본문 분석을 통해서 왜 이 책이 종말론과 구원론에 대한 이야기인지를 살펴보자.

세계 폐기의 종말론과 세계 변형의 종말론을 알아보자.

현세적 문화의 결과물과 미래의 천국의 연속성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종말론의 역사에 대한 종합과 미들튼의 종말론의 위치도 고려해봐야 한다.


민네이션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나 친근하게 들어왔던 이야기이다.

기아대책이 이야기하는 공동체의 비전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새하늘과 새땅이 이 공동체에 임했다고 전제하고 시작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개인구원과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도 새하늘과 새땅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죄가 먼저가 아니라 구원이 먼저가 아니라 창조가 먼저라고 한다면, 우리의 회복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일어나는가? 다시 말하면 회심이라는 요소는 요한웨슬레나 무디의 경우처럼 19세기 부흥운동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는데 미들턴의 이야기에서는 그럼 그러한 각주들이 필요없게 되는 것인가?

창조를 강조했을 때, 우리의 회복은 어떤 것으로의 회복인가? 창조 당시의 회복인가? 그렇다면 파괴된 회복이 필요한 인간은 어느정도에 다다랐는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이러한 강의들이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교회라는 것이 차지하는 위상이 이제 더이상 진리의 발생장소가 아니라 진리의 통과장소라는 시대정신의 반영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라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빈곤과 전쟁과 살인과 거짓과 같은 윤리적인 것에까지 이르게 된다.


참고 1_미들턴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토론토에 있는 ICS(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에서 가르쳤다. 현재는 뉴욕 로체스터에 있는 Roberts Wesleyan College에서 성서학을, Northeastern Seminary에서는 성서와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브라이언 왈시와 공저한 Transforming Vision: Shaping a Christian World-View(『그리스도인의 비전』, IVP 역간) 외에도 The Liberating Image: The Imago Dei in Genesis 1(Brazos Press) 등이 있다.


참고 2_
“기독교세계관과 개혁신학과 아브라함 카이퍼”  


특별히 영어권에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world-life view”라고 부릅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세계관, 인생관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관은 크게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세계관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성경신학적 반성입니다. 이 전통에 따르면 피조세계와 인간사 안에는 다양한 영역들이 있는데(농업, 수학, 물리, 경제, 교육,법, 문학, 신학 등) 그 영역들은 각자의 고유한 주권들이 있다는 것이고, 이 주권들의 최상층부에 하나님의 통치로 압축될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인간사(인간존재)의 어느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제외될 한 치의 땅도 없다!”라고 한 것은 바로 신앙과 학문의 필연적 연계성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것이 이른바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수상이었으며 정치가이며 “반-혁명당”(여기서 반 혁명당이란 프랑스의 대혁명이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극대화한 운동이었다고 판정하였기에, 그런 세계정신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反혁명당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을 창당하고 당수노릇도 한 아브라함 카이퍼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자신이 조직신학을 가르친 신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개혁 신학적 입장은 북미로 건너가 꽃을 피우게 되는데, 특별히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드의 칼빈대학교(Calvin College)와 캐나다 토론토에 나중에 설립된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of Christian Studies)를 중심으로 기독교세계관이 학문적 기반을 갖게 됩니다. 이 운동은 신학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을 강하게 주창하는 운동입니다. 여기에 철학자들로서는 앨빈 플랜팅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리처드 마우, 제임스 스미스, 역사가로서는 조지 마스덴, 지질학자 데이비스 영, 천문학자 하워드 반틸, 신학자이면서 인문학자인 엘 월터스,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윤리학자 헨리 스톱, 루이스 스메디스, 철학적 미학자 칼빈 씨어벨트, 올트하우스 등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 이들의 이름을 들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이들 모두는 미국 기독개혁교단(CRCNA,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가 배출한 걸출한 학자들입니다.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또 다른 사람들로서 구약학자 바돌로뮤 그리고 세계관 운동에 좋은 책들을 써낸 폴 마샬, 브라이언 월쉬 그리고 아래 책의 저자인 리처드 미들턴이 있습니다. 물론 한국 사람으로서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거점인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총신대 신국원 교수, 한동대 최용준 교수가 있고, 서강대 강영안 교수와 합신대의 송인규 박사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철학자로서 강영안 교수와 송인규 교수와 신국원 교수가 한국의 기독교학문 연구회(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산하 기관)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어쨌든 리처드 미들턴의 저서는 아브라함 카이퍼적 전통의 기독교세계관을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일반 성도들을 위해 쉽게 풀어쓴 책이라고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아래는 출간된 미들턴의 저서에 대한 나의 추천단평입니다. 번역은 나의 제자 이용중 목사가 했습니다.    


참고 3_리처드 미들턴의『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왕국은 역사의 끝자락에 새롭게 될 이 “땅”에 도래한다는 리처드 미들턴의 주장은 풍문에 의한 종말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교계에 가히 혁명적이고 전복적입니다. 저자는 역사의 끝에 있을 일들(종말론)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커다란 개혁신학 전통의 기독교 세계관을 통하여 유려하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성경의 나선형적 역사관은 단순히 최초 창조로의 회복이 아니라 구속적 회복으로서 창조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함의하고 있는바, 인간의 삶 전체가 예배이며 종교라는 미들턴의 신념은 그가 제시하는 종말론의 절정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신학의 모든 분야에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탁월한 저작입니다.  


참고4_재세례파

재세례파(再洗禮派) 또는 재침례파(再浸禮派, Anabaptist, 그리스어: Αναβαπτιστές)[1]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 개혁을 따른 기독교종파를 가리킨다. 그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현대의 개신교 교파들로는 아미시파, 후터라이트, 메노나이트 등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120여만 명의 교인들이 있으며, 대한민국에도 재세례파(재침례파) 교회가 한 곳 있다.[2] 이 문서에서 재세례파라 함은 주로 16세기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유아세례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도 무효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교파들은 침례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무효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다수 기독교 교파에서는 세례가 죄의 용서[3]와 구원[4]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일생 한 번만 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이에 반대한 것이다.


발생 배경
재세례파의 역사는 그 사상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근원이 일원이냐 다원이냐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소수이기는 하나 재세례파야 말로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역적으로 구분하면 '스위스 형제단' (Grebel, Manz), 네덜란드 및 프리시안 재침례파 (Menno Simons, Dirk Philips), 그리고 남부 독일 재침례파 (Hübmaier, Marpeck)로 구분할 수 있다.  


역사학자와

사회학

자들은 더 나아가 급진적 재침례파와 평화주의 재침례파로 나눈다. 급진적 재침례파는 "새 예루살렘"을 땅 위에 건설하기 위해 폭력 동원을 인정했다. 급진적 재침례파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

뮌스터 반란

이다. 그에 반해

신약성서

에 근거한

비폭력주의

를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은

메노나이트

(Mennonites)의 기원이 된다. 다시 말해, 원래 메노나이트의 기원은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신부

인 메노 시몬스(Menno Simons)가 두 부류의 전통적인 재세례파인 평화적인 오비파(Obbenites)와 급진적인 호프만파(Melchio Hoffman)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어떻게

그리스도인

이라 자부하는 자가 영적인 무기는 내려두고 세속적인 것을 취하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합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평화주의

자인 오비파 쪽으로 가입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이후에 그곳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의 추종자들을 그의 이름을 따서 메노나이트라 부르게 되었다.

[5]

메노는

신약성서

의 가르침에 따라, 폭력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였다.

[6]


탄압


한 번 받은

세례

(특히

유아세례

)를 무효라고 주장하는 교리로

로마 가톨릭교회

 및 다른

개신교

로부터 이단으로 배척되어 수많은

순교자

들이 생겼다.

1525년

 스위스의 가톨릭 지역과 그 다음 해에는 취리히의 의회정부가 재세례파를 이단과 반역죄로 사형에 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수천에 달하는 순교자가 발생했는데 처형 방법도 잔인하였다. 이들의 침례를 희화하여 산채로 물에 빠드리기도 했으며, 그밖에 화형에 처하거나 사지를 절단하는 예도 흔히 있었다. 1523~66년 사이 네덜란드에서 1만3000여명이 희생 되었다는 조사도 있다. 이런 극심한 박해속에 재세례파는 극단적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종교적 극단주의가 활개를 치기에 이르렀다.

[7]

1930년

에는

나치

의 탄압을 피해 후터라이트(재세례파의 일파)공동체인 부르더호프 공동체가

영국

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현재는“재세례파(재침례파)가 21세기 개신교가 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8]

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리


전쟁

, 다툼, 폭력을 반대하는

비폭력주의

종교

와 국가의 분리

평등

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제자도(

그리스도

의 제자로서의 삶)의 실천

유아세례

반대거룩한 삶과 형제애의 실천믿음을 통한 구원의 강조  


문학작품 속의 재침례교도


볼테르

의 대표 소설인

캉디드

에는 주인공 캉디드를 도와주는 착한 재침례교도 이야기가 나온다. 캉디드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구해 네덜란드에 갔을 때 사람들은 캉디드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교황이

적그리스도

라고 생각하오?" 라고 질문한다. 캉디드가 이에 우물쭈물 대답하지 않자 그들은 욕을 하며 캉디드를 쫓아내는데 이때 캉디드를 도와주고 빵과 돈을 준 사람이 재침례교도 자크다.

[9]

 볼테르는 이 작품에서 가톨릭교회 신부들을 타락하고 부패한 인물로 묘사하지만 재침례교도는 착하고 선한 인물로 묘사했다.  


참고 5_신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는 3세기 이후,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기초로 전개해 오는 사상 체계로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스토아 학파 등 고대 여러 학파의 사상을 종합화하기 위에 성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데아계-현상계(現象界)라고 하는 플라톤적 2원론을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전자를 세분화하여 전 존재를 계층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특색이다.


신플라톤주의의 학파로서의 존재는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제(帝)에 의한 이교도(異敎徒)의 학원폐쇄령과 함께 막을 내리지만, 사상 자체는 중세·근세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르네상스시대에 있어 플라톤주의 부흥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실제 내용은 신플라톤주적 색채를 진하게 갖는 것이다.  


역사


학파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살펴 보면, 학조(學祖) 플로티노스에서 제2대 학두 포르피리오스를 거쳐 이암블리코스(4세기 중엽)까지는 로마에 그 중심을 두고 있었으나, 그 후에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의 동방세계로 중심이 옮겨졌다. 특히 전자의 경우, 그 곳에 존속하던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하는 아카데미아가 그대로 신플라톤학파의 학원(學園)화가 되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의 학풍은 프로클로스(410-485, <신학원리>나 플라톤의 주해서를 다수 저술했다), 시리아누스, 다마스키오스, 심플리키오스로 계승되어 갔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은 여성 철학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 교도에 의해 학살된 히파티아, 시네시오스, 히에로클레스 등에 의해 4-5세기에 걸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다른 한편, 서방 세계에서도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적 조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마크로비우스(400년경의 사람. 신플라톤주의의 관점에서 키케로의 <공화정에 관하여>에 수록되어 있는 <스키피오의 꿈>을 해석하였다), 마르티아누스 카펠라, 칼키디우스(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라틴어로 번역, 주해를 거쳐 등장하였다) 등의 인물들이 4-5세기에 걸쳐 등장하여 그 사상적 흐름을 이어갔다.  


다만 그들의 움직임이 동방의 경우와 달리 구조화된 학파를 형성한 것은 아니었으나 서방 세계에서 기독교와 점차 결합되어 갔다. 이에 대해 동방의 경우 쇠퇴 일로에 있던 이교(異敎)에 대해 이론적 지주를 주려는 경향이 엿보였으며, 이교의 제신(諸神)이나 신화를 플로티노스의 사상 체계 속에 엮어 넣어 재해석하려는 의도를 보이며 신비주의적 경향을 심화시켜 나갔다.


사상


플로티노스를 예로 들면 신플라톤주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주에 존재하는 세계를 이데아계와 현상계로 2분(二分)한다. 그리고 이데아계는 '1자(一者)', (토·헨), '누스'(지성 내지 정신), '프시케'(영혼)의 3원리(三原理)로 설정된다.


이 '1자'에 관해서는 '선(善)한 것' '단순한 것' '자족적(自足的)인 것' 등 갖가지 표현이 사용되고 있으나 그것은 명확한 규정이 불가능한 것이며 단지 "그 무엇이 아닌가"라고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존재의 궁극적(究極的) 원리라고 되어 있다.


이같은 '1자'의 발상은 일괄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형태의 현실계의 이면에는 파편적이며 불규칙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을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보편적인 법칙을 이끌어내는 '1'('多'에 대한 '1')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3원리는 각각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1자'로부터 유출(流出)되어(에마나티오) 생겨난 것으로서 그 움직임이 연속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로 포착되고 있다('一者'→'누스'→'프시케'). 즉, 불(火)은 열(熱)을, 얼음(氷)은 냉(冷)을 발산하고, 인간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이 물건(物)은 성숙하고 충실해지면 자기와 동형(同形)의 물건을 산출하려고 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충실해진 '일자(一者)'로부터 '누스', 다시 '누스'에서 '프시케'가 산출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프시케'에는 '이데아계'(英智界)와 그 그림자인 '현상계'를 연결하고 양자를 매개하는 기능이 있다. 또 이와 같은 '일자'로 부터의 산출·유출과 동시에 우주만물이 일자로의 환귀(還歸) 과정이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체계는 플라톤적인 '이데아계(英智界)'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운동·생성(生成)의 견해와 스토아적인 통일된 하나의 생명체·유기체로서의 우주를 보려고 하는 관점 등을 도입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플라톤적 2원론(二元論)이 갖는 모순(상호간에 따로 존재하는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어떻게 결합하여 관련을 맺게 할 것인가)의 한 가지 해결책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또 '1자' '누스' '프시케'의 3원리는 인간의 의식 내 사고(思考)의 반영(反映) 내지 산물로 생각되고 있다. 즉 현상계의 다양성이 의식 내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가는 단계를 3원리는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3원리는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內在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결국 이와 같은 체계를 구상함으로써 초월적 절대자와 유한적 존재인 인간의 신비적 합일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3원리는 초월적인 실체로서 생각하게 되어 절대자('토·헨', 그 밖에 갖가지 명칭으로 불린다)를 정점으로 하는 존재의 계층단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려움과 거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