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만나게 된다면
이것을 본 베드로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님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이여서
이 거룩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잡을 고기를 끌어올리자, 시몬과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할 것 없다. 이제부터는 너는
삶을 낚게 될 것이다."
그들은 배를 해안으로 끌어올린 뒤에
그물과 모든 것을 배와 함께 버려두고
그 분을 따라갔다
그 분을 따라갔다
메시지_누가복음 5장
현대에는 두려움을 느끼는 요소가
자연이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
정신이상자나 구걸하는 사람들이다
숭고의 의미가 초월에서 삭제된 후
미적인 삶의 행복이 주는 안정감을 해치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두려움은 곧 자아 안으로 도피처를 만든다
칸트가 이야기한 미학의 근본은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것들이었다
인간의 숭고함이란 그 숭고함을 느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했다
반면, 비판학파에서 아도르노는
나를 벗어난 타자의 극치, 자연에서 두려움을 찾았다
두려움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일종의 공포라고도 할 수 있다
우울과 멜로가 나에게 일어나는가라는
1인칭과 3인칭의 차이라면
두려움과 공포도 같은 느낌의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
두려움은 나에게 임하는 1인칭의 것들이고
공포는 3인칭의 대상이다
종교성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타자가 기반이 된다
라캉의 이야기처럼 대 타자는
언제나 일반적으로 나보다 큰 존재이다
인간이 진정한 공포를 느낄 때는
진정한 두려움을 느낄 때는
1인칭과 3인칭이 하나가 되고
2인칭으로 내게 다가올 때다
더군다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란 대타자
내안에 계신 1인칭과 자연에서의3인칭이
너와 나'의 관계로 다가올 때
우리는 이것을 거룩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거룩은 두려움과 공포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베드로는 2인칭의 하나님과 만나
자신의 전부를 보게 되었다
거룩함이란 2인칭의 어떤 것이다
어쩌면 2인칭은 함께 있음 자체이다
진리는 경험적이라서 선언하는 것은
초월한 존재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다만 경험한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리라
그러므로 2인칭의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말을 걸오 오신다면
우리의 두려움은, 나의 두려움은
곧 거룩함으로 바뀌고
인간을 객관적으로 보는 진리의 시선과
시간을 영원으로 보는 창조주의 관점이
오늘 내 안에서 흐르고 넘쳐서
새로운 나를 만든다
두려움 다음에 찾아오는
거룩함의 부르심은
곧 나를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으로
부르시는 음성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동일한 음성으로
오늘 내가 비로소 내가되는 방식으로
2인칭의 하나님과 만난다
그 길을 따르라
제자는 자아실현의 가장 상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