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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술일기

사평역에서

곽재구

by 낭만민네이션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_사평역에서

_창작과비평사, 1983년




덜컹거리는 창문 넘어로

빗방울이 손을 긋는다


막차에 간신히 얻어 타서

빗물을 털어내고 앉은 자리


유리창마다 빗발치는 빗방울이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오랜전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어느새 곤한 잠이 들었고


몇은 뭐가 그리도 바쁜지

화면을 쓸어내리면서 고개를 숙인다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해 무감각해진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야만 버틸 수 있다는 듯이


사람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었다


막차가 서울역에 도착하고 있었고

어머님이 챙겨주신 과일들이


흔들흔들 선반에서 덜컹거린다

내일은 쉴새없이 눈알을 돌리고


감정이 담기지 않은 낱말들을

쏟아내야 하는 사람들의 한숨이


오래전에 내려서 바닥에 꾸정물이 된

빗물들의 미래같다


낯설은 대도시의 삶도 한 순간인데

우리의 인생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이제막 내릴 준비를 해야하는데

하염없이 졸고 있는 젊은이의 뒷모습이


서울역 플랫폼에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 소리에 화들짝 놀란듯이


내일을 다시 재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리웠던 순간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 놓고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진다


민네이션_서울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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