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_리추얼의 종말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대답을 할 때
우리는 공통적으로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을 떠올린다
개인의 의식들과 공동체와 함께했던 의식을 합쳐서
자신의 영혼의 무게를 찍고
거기서부터 나오는 다양한 감정들을 휘감아서
나는 '그 때 이런이런 일을 했고, 이런 감정을 통해'
이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사람은 대게 자신이 참석했던 행사와 의식을
통해서 자신 안의 상징의 공간을 만들어 간다
상징의 공간이 생기면 굳이 언어가 없어도
어떤 기호나 표지판을 통해서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언어들을
자동적으로 상상력의 공간에 띄워놓는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계속해서 사물을 응시하고
무엇인가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상상력의 공간에
상징의 기호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의 배치들이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정체성의 근간이 된다
간혹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자신안에 해석되지 않은 상징들
자신 안에 결론으로 지어지지 않은
상징들이 어지럽게 난립할 가능성이 높다
누구나 일상에서 실재의 연속을 산다
실재의 연속은 끊임없이 기호를 생산해내고
기호가 상징이 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기호가 상징이 되는 과정을 알아차리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차람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은
신비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징의 체계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효과를 낼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실재는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상상력의 공간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상징들을 끌어오려고 할 것이다
미디어적 전회가 이미 최종시즌까지 마무리된
세계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징들의 빈곤이 아니라 상징들의 과잉으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상징의 체계들이 가득하다
상징의 과잉은 곧 정체성의 과잉을 뜻한다
머지 않아서 정체성의 과잉은 실재의 소멸을 가져올 것이다
너무 많은 상징의 체계가 상상력을 가득 메우고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키코모리나 오타쿠와 같은 일본식 단어들이
우리 삶에 만연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상징들의 체계에서 실재의 세계로 나가는 것
세계의 비참과 마주하고 세상의 혼란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해체되는 기존의 상징의 체계들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다시 자신의 상상력으로
정리하는 일이다
경험이 전부는 아니지만 경험을 가지고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행동의 동기를 가늠한다
더욱이 그런 행위가 공동체와 함께할 때
내가 알아차리면서 만드는 상징체계들은
나 혼자만 아는 언어가 아니라 다른이들과 함께
알아차리는 언어가 된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무리를
'공동체'라고 부른다
리추얼의 종말이란 결국 공동체의 종말이고
자기자신으로 무한하게 퇴보하는
상징의 감옥이 되고 만다
함께 만들어가는 상징의 체계가 적절하게
상상력의 공간도 확장하면서 또한 매일매일
새로운 실재도 만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처럼 이렇게 복잡하고 미묘하고
예측할 수 없는 타자가 계속해서 들어오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