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무덤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사람의 기억은 언제나 이미지와 감정의 실타래 속에서 만들어진다. 눈동자에는 수 많은 이미지들이 어리우고 간혹다가 어떤 이미지에는 감정이 둘러 붙는다. 자신이 인상깊게 본 이미지에 좋은 감정들이 둘러 붙으면 그것은 추억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할 때마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행복감을 주고 삶의 의미를 던져준다. 과거의 기억이 오늘날에 추억으로 떠 오르는 것이다. 반대로 충격적인 이미지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둘러 붙는다. 어릴적에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 그 이미지를 중심으로 슬픔과 우울과 분노가 달라붙는다. 이러한 기억의 색깔이 짚어지면 그 기억은 트라우마가 된다. 과거의 기억이 오늘날 현재의 나를 죽이는 결과를 내놓는 것이다. 과거는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매일매일 현재를 살아가지만 곧 과거가 되는 감정과 이미지들의 실타래 속에서 살아간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을까?
과거의 기억은 한참 동안이나 나를 괴롭혔다. 어릴적에 너무 많은 충격적인 장면들이 20세를 넘어서는 동안에서 눈가에 선했고, 나는 이것을 잊으려고 여러번 노력을 했다. 때론 친구들이, 때론 여행이, 때론 영화가, 때로는 아무생각도 없이 잠을 자는 것이 이것을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은 다시 그 지점, 내가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는 지점으로 돌아왔다. 어릴적에 잊을 수 없었던 수모의 기억들, 청소년기에 죽고 싶을 만큼 벗어나고 싶었던 장면들. 그 가운데서 나는 허우적대었고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그렇게 30대까지의 10년은 방황과 회피의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왔다가 갔다가 했다. 구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미래로부터 불어오는 희망의 메아리는 들르지 않았다.
정말로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을까? 죽은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을까?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고, 죽은자가 산자를 도울 수 있다'고 했다. 비정상적인 대통령의 계엄령논의에 탄핵을 외치는 이들은 마찬가지로 '518의 정신이 오늘의 탄핵을 도왔다'라고 했다. 과거에 죽은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버린 사람들이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잊혀져간 시간들이 오늘에 되살아나서 현재를 살렸다. 과거에 희망찬 기억이 없기 때문에 현재는 무너져내린다고 하는 말들 속에서 어떤 가느다란 새싹이 움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정말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과거의 이미지와 감정의 굴레 속에서 나는 오늘날의 내가 살아갈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산자에게 주어진 숙제다. 살아 있는 자들에게 건네는 과거의 손길이다.
겉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은 모두 영혼의 무덤으로 내려 간다.
영혼의 무덤 속에는 내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 그건 아니라고 응답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언어들, 억울하게 아무말도 못하고서는 그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버린 편린들이 쌓여 있었다. 영혼의 무게가 깊게 누르고 있기 때문에 어떤이도 들어올 수 없는 무덤은 항상 가장 맨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영혼의 무덤에는 내가 지금까지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말들이 쌓여 있었다. 과거에 내 뱉지 못했던 말들은 무덤으로 들어가고 반대로 내뱉었던 말들은 영혼의 대기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이따금씩 구름을 만들고 비를 흔날리기도 하고 가끔은 찬란한 광채가 비춰오는 깨끗한 영혼의 대기가 도래학도 했다. 숨겨 놓은 열쇠를 찾아서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처럼 과거에 내가 마주치지 않고 싶었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짙게 눌린 무덤에서 소리가 난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아우성처럼 복잡했던 이야기들의 하나하나 귓가에 속삭인다. 내가 피하고 싶었던 이미지와 감정 사이에서 그 때 내가 듣지 못했던 영혼의 소리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어쩌면 그 모진 세월 고통 속에 휩쌓였을 때 '그건 아니야, 내가 한게 아니야, 그렇지 않아'라면서 '나는 소중해, 내 인생은 소중하고, 누구도 영혼의 자유를 박탈할 수 없어'라고 하는 내뱉지 못한 영혼의 목소리가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나는 트라우마 속을 뒤지면서 영혼의 무덤 속에 잠들어 있는 언어들을 찾아낸다. 죽은언어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삶의 언어에게 생기를 준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영혼의 무덤이 오히려 나의 가장 소중한 언어들을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어느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의 세상 안, 가작 바닥에 무겁게 깔려 있는 영혼의 무덤들이 하나둘씩 열리고 그 어떤 언어보다 찬란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우리는 고통 속에서 산다. 고통을 기억하면서 산다. 그리고 고통을 잊어먹으면서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는 살리려고 하는 언어들을 듣지 못하고 산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영혼은 계속해서 소리쳤지만 그 언어는 내뱉지 못하고 영혼의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 속에서, 잊고 싶은 기억 속에서 나를 대변하는 언어들이 하나둘씩 무덤에서 걸어나와서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건다. '그럴 수도 있어, 잘못하고 실수할 수도 있어, 아무도 책임지지 않지만 그건 누구의 책임이 아닐수도 있어', '아니 다시 시작하면 되니깐 일어서자, 지금 다 무너져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야', '너 혼자가 아니야, 책임을 지고 말하면 되니깐 지금은 슬퍼해도 된다'고. 무덤의 언어들이, 죽은자의 언어들이 삶의 언어로, 산자의 언어로 부활한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지금 나는 지나치는 이들에게서 그들의 영혼의 무덤을 본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언어들이 높은 산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본다. 아무도 대변해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대변해주는 언어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어떤 존재도 이 세상에 그냥 태어난 사람은 없다. 자신이 스스로 바보같다고 말할 때도 그의 언어들은 무덤 속에서도 숨을 쉬고 부활을 날을 기다린다. 나는 어쩌면 그것을 볼 수 있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른다. 무덤의 언어를 듣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살아나는 것을 볼 때가 올 것이다. 맑은 영혼들이 더 새파란 빛을 발하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기뻐하는 날들을 기대하는 것이다. 영혼의 언어가 이토록 찬란한 새벽공기 속으로 우리를 부른다. 이미지와 감정의 실타래 속으로 영혼의 언어가 하나하나 풀어가는 손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