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의 '이중과제론'을 읽고
담론의 세계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지식의 장을 여러곳 돌아다녔다. 경영학에서 나오는 다양한 전략툴과 퍼실리테이션 지식을 가지고 강연을 하고 조직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모든 것의 시작은 철학이라며 철학을 순수하게 배워보자는 마음에 현대철학부터 시작해서 중세철학으로 넘어가고 있다. 실상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은 과학기술이기 때문에 과학사회학이라는 학문에도 뛰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원래 나의 본질, 내가 바꾸고자 하는 영역에 대한 깊이는 당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소위 말하는 실용학문에만 너무 몰입하다보니 본질을 잊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철학과 경영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만큼 반비례해서 정치학과 정치철학에 대한 깊이가 점점 옅어져 버린 느낌이다. 그러다가 창비에서 나온 '이중과제론'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창비에서 2009년에 발행한 '창비담론총서'가 바로 그것이다. 창작과 비평의 줄임말고 백낙청 교수의 주도로 시작된 계간지가 발전하여 오늘날 창비 출판사로 이어지고 있다. 1966년부터 시작된 창비의 담론적 질서를 만드는 작업은 문학을 기본으로 하되 정치철학과 사회학을 넘나는 연구로 이어진다. 백낙청 교수의 사단이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이 시대를 진단하고 그에 맞는 대안을 내 놓는 작업들이 '창비담론총서'에 담겨 있다. 이들이 내놓은 담론의 이름은 '이중과제론' 혹은 '분단체제론'이다. 분단체제론이 먼저이기는 하지만 분단이 이미 체제라는 시스템으로 굳어지면서 그 시스템에서 나오는 다양한 '효과들' 때문에 한국사회와 북한사회가 변화해간다는 이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단체제론을 만든건 근대화에 적응에 대한 문제, 근대화를 극복하는 문제에 대한 체제적인 대안이다.
정치철학의 장에서 글을 조금 쓴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칭찬하거나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는 사람들 마다 분단체제론에 숟가락을 얹거나 반대하거나 하면서 등장했다. 분단체제론에 근거해서 한반도에서 식민성의 문제를 다룬다던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가져오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동아시아에서의 한국을 다룬다. 혹은 페미니즘과 근대성의 관점에서 한국사회가 극복하지 못한 근대성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을 살펴보고, 녹색당론이나 농적 순환사회 그리고 87년체제까지 나아간다. 이렇게 '담론'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글들은 '담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항상 그 담론의 구조 속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다. 담론의 성격에 정확히 대응하지 못하면 글을 못 쓴다고 하거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거나,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이야기를 듣게 된다.
뉴라이트라는 담론의 대결
물론 이러한 담론의 차원에서 등장한 그룹이 요즘까지 문제가 되었던 뉴라이트 그룹이다. 뉴라이트는 말 그대로 새로운 좌파라는 이름처럼 기존의 분단체제론에 대한 반기를 들면서 '선진화론'을 주장한다. 선진화론은 식민시대부터 시작해서 이승만, 박정희를 거쳐서 현재까지 대한민국을 발전시킨 토대가 바로 '자유민주주의'라고 본다. 더 정확히는 자유시장경제라고 본다. 그리고 이것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민주화를 사용하지만 민주화는 조건에 따라서 등한시될 수도 있는 문제가 된다. 후에 더 살펴보겠지만 이들의 논리는 최근 윤석열정부까지 이어지고 있고 '자유'라는 말 속에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 그리고 국가전체주의가 들어있다. 그래야만 성장한다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담론이다. 그래서 이들은 기존의 '진보'라고 하는 분단체제론에 반기를 들고 선진화론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세력들과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조금 더 살펴보자. 뉴라이트의 선진화론은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계승하려는 입장이다. 뉴라이트라고 말하는 이들은 이승만 정부의 건국과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선진화'란 이러한 대한민국의 성공 모델을 더욱 발전시키고 심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진화론은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을 '반 대한민국적 역사 인식'과 '진보 세력의 비합리적인 주장'에서 찾는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식민지 근대화론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이는 '근대성'을 받아들이면서 인프라의 개발이 자본주의 발전의 씨앗이 되었고 이를 통해서 대한민국이 선진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국 전쟁을 북한의 남침으로 규정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북한의 위협에 대한 안보 의식을 강화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며 자유시장 경제의 원칙을 강조한다. 여기서 연결되는 것이 바로 분단체제론과의 싸움이다. 더욱이 이전에 운동권이 주장했던 민족모순론이나 계급모순론을 '공산주의'로 치부하면서 되도록이면 쉽게 넘어설 수 있었으나 그들이 보기에는 공산주의의 정도가 옅어진 분단체제론은 '시스템'적인 접근을 해야만 이길 수 있는 담론이었다. 따라서 반 미국정서도 아니고 계급에 대한 비판도 아닌 분단체제가 가져온 남북한의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선제타격론'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게 된다.
그럴려면 북한을 더욱 더 깊은 악의 축으로 정의해야 한다. 분단의 원인 제공과 함께 현재 한국이 '선진화'로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분단 문제에 대한 뉴라이트의 시각은 북한 체제의 비정상성에서 분단의 근본 원인을 찾는 것으로 이어진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 주체사상 체제가 비합리적이고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통일이 지연되고 있으며, 통일은 북한 체제의 붕괴 또는 남한 주도의 흡수 통일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주장을 펼친다.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전제로 하며, 대북 압박과 자유민주주의 확산을 통한 통일을 지향하는 방식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극우적 교회'와 연합이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사실 대부분의 보수적 교회들은 북한만 나오면 빨갱이와 공산주의라는 것 밖에는 모른체로 뉴라이트의 선진화론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면서 바로 적대감을 드러낸다.
분단체제론이란 무엇인가
백낙청교수를 중심으로 제시된 분단체제론은 한국 사회의 분단 현상을 단순히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라, 남북한 사회 전반에 걸쳐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하나의 '체제'로 파악한다. 체제로 굳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나름대로 '확대재생산'되는 시스템이다. 그것을 어떤 학자는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잡기도 한다. 분단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고착화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가끔 이러한 친구들을 만나는데 모든 것은 '분단' 때문이며 분단이 모든 것을 삼키고 있다라고 본다. 분단체제는 남북한이 적대적으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각 체제가 분단 상황을 통해 존속하고 재생산되는 '적대적 공생' 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
분단체제론은 분단의 고착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통일과 민주화의 과제를 새롭게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통일을 위한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분단체제의 점진적인 해체와 극복을 목표로 하며, 현실에 입각한 전략적 접근을 강조한다. 이는 통일이 민족적 당위론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제적 특성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분단체제론은 남북한 주민들 사이에 외형적인 분단뿐만 아니라 '마음의 분단'이 존재하며, 이것이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서는 단순히 물리적인 통일을 넘어, 상호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심리적 통합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이는 분단체제 아래 형성된 남북한 사회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어지면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남북연합'과 같은 과도기적 형태를 제시한다. 분단체제의 급격한 붕괴로 인한 혼란을 피하면서도, 통일을 향한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된다. 즉, '먼저 평화, 나중에 통일'이라는 기조 아래 단계적 접근을 선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는 분단체제론이라는 현상인식에 더해서 분단극복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발전하게 된다. 더 나아가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면 세계체제론과 같은 측면에서는 주변부와 중심부의 구분이 있고, 그 주변부인 한국을 절반으로 가르느냐 일본을 절반으로 가르느냐의 관측도 가능해진다. 남북경험이라던지 햇볕정책도 이러한 담론의 질서에 넣어 보면 어느단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이 분단체제론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분단 문제를 분석하고 통일 방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특히 1980년대까지의 기존 이론들이 가졌던 당위론적 한계를 극복하고, 현실의 복잡한 분단 양상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체제' 개념의 모호성이나 분단 고착화 용인 우려 등의 비판도 존재한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2025년이지만 2007년에 그동안의 분단체제론의 의미는 더 발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선진화론이 판을 치고 그것을 수습하려 했던 문재인 정부를 지나서 다시 더 극우로 발전하는 윤석열 정권은 모든 것을 무효화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책을 들고 있는 두 손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분단체제론의 시작은 이중과제론
분단체제론은 한국이 근대화를 접하면서 양분된 분단에 대한 이해이다. 그래서 분단 자체에만 집중하거나 체제화에만 몰두하다보면 우리의 논의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 시작은 바로 '근대화'이다. 근대화는 모더니즘으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지식과 지배체제가 등장한 한반도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흔히 말하는 내생적 근대화라던지 외세의 의한 근대화라는 개념들이 난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근대화에 대한 이해가 어떤가에 따라서 시대와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근대를 받아들이면서 잘 받아들였는지 오역이나 남용은 없었는지와 다르게 근대를 극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역량이 부족해서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번역의 문제와 해석의 문제가 실천론과 다르게 놀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 분단체제론은 어떻게 보면 동전의 양면이다. 근대극복이라는 측면과 근대적응이라는 두 가지 과제이기는 하지만 두 가지의 우선순위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나누어서 생각하기에는 하나로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관통하는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연결이 아니라 분절이 된다. 그 주제는 바로 두가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이다. 근대화가 낳은 두 명의 자녀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였다. 이둘의 싸움에서 혹은 공생에서 새로운 체제들이 나오게 되고, 그체제를 만들어내는 논리인 '담론'이 생성된다. 그러니깐 근대성은 이 둘의 경쟁이었고 그 중에 한 쪽이 강조되면 사회주의나 전체주의가 나타나거나 시장자유주의가 나타나거나 사민주의가 나타난다. 이분야에서 공부를 하면서 셰리버만이 지은 '민주주의가 우선한다'가 이러한 생각을 더해준다. 정치가 우선하지 않고 '경제나 시장'이 우선하게 될 경우 그에 대한 '이중운동'으로 사회주의나 전체주의국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에 친화력 있는 근대성이 반대편의 민주주의와 대립하면, 그 때 자본주의에게 패배한 민주주의가 페미니즘과 만나게 되면서 페미니즘은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전투를 시작한다. 현재 일어나는 페미니즘과 정체성정치의 핵심은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전투이다. 그러니깐 페미니즘을 그 자체로 보면 이 전투는 맥없이 무너지거나 지지부지하게 끝나거나 이겨도 이긴게 아닌게 된다.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이야기하려면 반대편의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같은 도화선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접근은 분단체제론을 이야기한 백낙청 교수를 위주로 창비의 많은 교수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한 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대립항으로 이해하지 않고 사회를 다르게 이해하는 방식도 충분히 존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담론의 세계에서는 중간은 없고 어느 한 쪽에서 옹호하든 반대편에서 돌을 던지던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10년 주기론
1987년체제는 민주주의의 승리같았다. 87년의 승리를 6공화국 헌법으로 만들면서, 정치가 우선하고 민주주의가 우선하며 자본주의를 드디어 꺽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10년이 지나면 1997년의 IMF체제가 등장한다. 전투의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한국에서 독재라는 전두환의 유산으로 무너져 버렸으니 더 큰 다른 동네 형을 데려온 샘이다. 그것은 전세계를 휩감고 있었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화신이었다. 여기서의 전투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단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전투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로 전쟁을 걸었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외국인투자가 빠져나가고 아시아의 용이라고 하는 국가들이 하나둘씩 자본주의의 화력 앞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한국에 찾아온 IMF는 전세계의 흐름에 맞게 구조조정을 하면서 자본주의 체제 이식에 들어간다. 이른바 '비정규직의 일상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 더 지나면 이러한 공격은 한국이나 동아시아를 넘어서 전세계로 진행된다. 2007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에 전세계 금융권은 패닉에 빠진다. 그 잘나가던 미국에 그나마 남아 있던 시민적 덕성과 민주주의의 보류로서 사회제도와 복지제도가 무너져내린다. 언제라도 돈이 있는 사람이 가장 최후의 승자라는 거을 보여주듯이 자본 친화적인 사람은 이 시가에 돈을 더 벌게 된다. 마치 1997년 우리나라에서도 국가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때 오히려 최상위 부자가 더 생긴 것처럼 말이다. 큰 흐름에서 보면 이는 어쩌면 10년마다 체제경쟁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2017년이 되면 다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촛불'이라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근혜정권에 대한 공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전에 쌓여 있던 자본주의의 만행으로 벌어진 일들의 축적이었다.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다시 돌아가보자. 조금 더 세상을 넓게 보면 분단체제론에 연결된 '동아시아론'이 보안다. 동아시아론은 한국 사회의 분단 문제와 근대화 경험을 동아시아라는 더 넓은 지역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이론적 시도이다. 단순히 지리적인 동아시아를 넘어,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된 하나의 '사상적 공동체' 또는 '대안 체제'로서의 동아시아를 상정한다. 이 이론은 서구 근대성(자본주의, 제국주의, 국민국가 체제)이 동아시아에 이식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식민주의, 냉전 분단, 군사 독재 등의 폭력적 경험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동아시아가 단순한 서구 문명의 수용자가 아니라, 이러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문명적 대안을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고 본다. 그래서 이어지는 맥락은 아시아중앙은행이나 엔화나 위안화 심지어 한화로의 통합에 대한 논의이다.
동아시아론은 특히 백낙청 교수가 제기한 '분단체제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분단이 단순히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가로지르는 '거대 분단 체제'의 일부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한반도 분단 문제의 해결이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협력 체제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 이론은 동아시아 각국이 제국주의, 식민주의, 냉전 등의 공통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며 형성된 특유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단순히 경제적 통합을 넘어선 역사적 화해와 문화적 교류를 통해 평화와 공존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타적 민족주의나 국가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지역적 연대를 모색한다.
결국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보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는 '근대성'의 동시 희생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론은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동아시아적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로서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라는 개념의 모호성, 중국 등 강대국의 패권주의적 경향, 역사적 갈등 극복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실현 가능성에 대한 비판과 한계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여기서 비판점까지 다루지는 않겠지만 동아시아공동체로써 다양한 구상들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담론이 세계에서 등장하는 대안들은 결국 분단을 극복하는 지역주의적 접근으로 동아시아 공동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변혁적 중도주의론?
이중과제론을 넘어서 분단체제를 해체하기 위한 해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변혁적 중도주의론이다. 변혁적 중도주의론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면서도, 기존의 이념적 대립을 넘어서는 실천적 '중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특히 한국의 분단체제가 고착화된 상황에서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변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넓은 사회 세력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낼 필요성을 강조한다. 급진적인 혁명론이나 무비판적인 현상 유지론을 모두 지양하면서 소위 말하는 '중도'의 포지셔닝 전략이다. 진보가 아니라 중도라는 거대한 포지셔닝은 극우를 몰아내고 기존의 비교적 점진적인 진보가 중도로 이동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진보세력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단기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혁을 목표로 하되, 이를 위해 사회 전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주체들을 포괄하는 '중도적' 실천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도'는 단순히 중간 지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통합의 공간을 의미한다. 지금 이재명정부의 포지셔닝은 변혁적 중도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계층과 담론을 포괄하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국민들에게 보여주면서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하는 것 말이다. 지금까지는 이재명정부의 지지율과 개혁 드라이브가 잘 먹히는 것도 같다.
변혁적 중도주의는 백낙청 교수가 '분단체제론'을 기반으로 제시한 통일 및 민주화 전략의 핵심이다. 분단체제라는 특수한 현실에서, 진정한 변혁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다수의 지지와 참여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과도한 이념적 대립을 지양하고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이중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방법론으로서 기능한다. 민주주의의 심화와 통일의 진전을 위해서는 특정 이념이나 세력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며, 사회 전반의 합의와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이는 '국민 대통합'을 통해 사회적 에너지를 모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변혁적 중도주의론은 기존의 이념적 스펙트럼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고유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제공했다는 의의를 가진다.
이중과제론의 전과 후
이중과제론이 등장하기 전에는 87년체제가 있었고 민족모순론과 계급모순론이라는 측면에서 진보진영이 NL과 PD로 나뉘었다. 그런데 90년 이후에는 백낙청 사단의 분단체제론과 최장집 교수의 제자들이 제시하는 민주화 이후의 '경제민주화'가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이중과제론에서 보통은 '민주화와 통일'을 과제로 보지만 오늘 내가 정리한 부분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이중과제론을 써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깔려 있는 원인은 결국 '근대에 대한 적응과 극복'이었다. 사실 '탈근대'라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사회가 발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담론적 차원에서는 탈근대와 근대의 싸움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으로 보인다.
그런의미에서 '변혁적 중도'는 오히려 자본과 민주주의를 연결하여 대안을 찾는 것으로 보면 이재명정부의 정책기조가 명확하게 보이기도 한다. 아주 오랜만에 '담론'차원에서 접근해 보았다. 사실 이렇게 많은 글을 쓰려고 하는건 아닌데 그래도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 창비에서 발행한 이중과제론과 87년체제론 그리고 신자유주의대안론 등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슬슬 '본질'에 집중하면서 나름대로의 대안들을 담론의 질서에 자리를 잡아보려고 한다. 나는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 이중과제 전의 대안인가 후의 대안인가? 이런 고민들을 시작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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