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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일기

상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프랑스현대철학_스코틀랜드 상식학파의 탄생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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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의 철학적 배경은 다르다. 또한 독일과 미국의 철학은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어떤 경로로 달라지게 되었을까? 지난학기부터 10년전에 다녔던 철학아카데미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철학으로 박사를 하신 존경하는 류종열 선생님으로부터 들뢰즈와 베르그송을 배웠고, 이번에는 에밀 브레이너라는 철학자가 정리한 서양철학사를 공부하고 있다. 에밀브레이너는 프랑스 철학의 관점에서 근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하고 있다. 사실 어떤 배경으로 역사를 기술하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프랑스는 18세기 이후 영혼이 신체에 깃든다는 아이디어가 구체화되어서 끝단으로 가면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까지 간다. 몸에서 하는 모든 것은 이미 실행중인 것이 된다. 내가 만약 산을 생각하면 우리의 생각과 영혼과 몸이 하나이기 때문에 이미 나의 존재는 산 위에 간 것이다.


이런 식의 프랑스철학은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관계‘가 철학의 핵심이 된다. 반면 독일의 철학은 내면에 진리가 있기 때문에 ‘관계‘보다는 오히려 ’성찰‘이 핵심적인 철학의 구심점이 된다. 그래서 지난시간까지 이러한 방식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프랑스철학을 만들었는지, 독일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논의했었다. 오늘부터는 에밀 브레이너의 관점에서 보는 스코틀랜드의 ‘상식학파’라고 부르는 철학자들을 돌아보려고 한다. 영미철학의 핵심은 ‘경험‘을 통해서 지식이나 인상이 인간의 내면에 유입될 때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그래서 분석철학이라고 하기도 하고 경험론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미철학의 핵심은 결국 경험에 입각한 분석철학이다. 이러한 흐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게 바로 오늘 알아볼
스코틀랜드의 ‘상식학파’이다.


여기서 메타인지도 나오고, 지식과 뇌과학의 연관성도 나오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탈리스커를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서 스코틀랜드에 관심이 많은데, 오히려 처음에 알아보는 ‘더갈드 스튜어트‘는 스코트랜드에서 매우 유명한 철학자였다. 유명한 지역이 있을 만큼 말이다. ’상식‘이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이 있고, 그러한 상식이 경제와 사회, 정치와 국가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게 된다. 그래서 제임스밀까지 연결해 볼 것이다. 이러한 글들은 인기가 없다.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꾸준히 공부해 놓지 않으면 역량이 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안보는 것 같지만 미래의 나에 대해서 이런 공부의 결과를 남긴다.


https://brunch.co.kr/@minnation/4343


1. 더갈드 스튜어트의 인간 마음


더갈드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핵심 인물이자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중요한 철학자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는 1753년에 태어나 1828년에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생애 대부분을 학문적 탐구와 교육에 바쳤다. 특히 그는 에든버러 대학에서 수학과 도덕 철학 교수로 재직하며,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학생들에게 학문적 영감을 주었고,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게 될 여러 저명한 인재들을 길러냈다. 스튜어트의 철학적 뿌리는 깊었다. 그는 토머스 리드(Thomas Reid)가 주창한 '상식 철학'을 단순히 계승하는 것을 넘어, 이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킴으로써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사상을 확고히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당시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서 '상식'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Common Sense'를 말한다.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한 것이다.


스콜틀랜드 상식학파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는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철학이다. 핵심 주장은 인간에게는 외부 세계를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본적인 직관과 상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흄의 회의주의가 감각 경험의 한계를 지적하며 지식의 확실성을 의심한 반면, 상식 학파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과 직관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더갈드 스튜어트는 이러한 상식 철학의 중요한 계승자이자 동시에 그 사상을 널리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의 학문적 저술들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철학과 심리학 연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도덕 철학 강의는 단순한 이론적 지식을 넘어, 당시 학생들이 윤리학, 정치 철학, 그리고 초기 형태의 정치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광범위한 교육 활동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스코틀랜드의 듀갈드 스튜어트의 기념비


듀갈드 스튜어트의 주요 저서인 "인간 마음 철학의 개론(Elements of the Philosophy of the Human Mind)"은 18세기 후반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저작 중 하나였다. 이 방대한 저서는 인간의 정신 기능과 복잡한 작용을 심층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였으며, 그의 스승인 토머스 리드의 상식 철학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을 넘어,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적 관점을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스튜어트의 이 저작은 당시의 지성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서구 심리학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된다.


상식(Common Sense)의 중요성 강조

스튜어트는 토머스 리드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인간에게 내재된 기본적인 인지 능력과 상식적 직관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구축했다. 그는 데이비드 흄과 같은 당대의 회의주의 철학자들이 지식의 확실성을 의심하고 감각 경험의 한계를 지적했던 것에 강력히 반박했다.

스튜어트는 우리가 외부 세계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특정 근본적인 진리들은 어떠한 의심의 여지 없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상식적 원리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근간을 이루며, 모든 철학적 탐구와 과학적 탐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가장 기본적인 작동 방식임을 강조한 것이다.


경험주의적 방법론 채택과 마음의 해부

스튜어트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귀납법적 방법론을 인간 마음에 대한 연구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외부 관찰(타인의 행동과 표현 분석)과 심도 깊은 내성(introspection, 자신의 의식 경험 관찰)을 통해 면밀히 분석하고, 그 복잡한 작용 방식을 설명하려 했다. 그의 목표는 마음의 현상(phenomena of consciousness), 즉 우리가 의식하는 모든 정신적 사건들을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분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스튜어트는 인간의 마음을 여러 가지 독립적인 "능력(faculties)" 또는 "힘(powers)"으로 세분화하여 분석했다. 주요 능력으로는 외부 세계를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지각(Perception), 특정 대상이나 생각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주의(Attention),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불러오는 기억(Memory), 새로운 아이디어나 이미지를 창조하고 조합하는 상상(Imagination),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추론(Reasoning), 그리고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의지(Will)가 있었다.

스튜어트는 이러한 다양한 능력들이 서로 어떻게 정교하게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복잡한 사고 과정, 다양한 감정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동을 형성하는지 심층적으로 탐구했다. 그의 이러한 분석은 현대 인지 심리학의 능력 구분과 유사한 측면이 많아 선구적인 작업으로 평가된다.


관념 연합(Association of Ideas)의 역할 인정과 한계

스튜어트는 존 로크와 데이비드 흄에 의해 발전된 관념 연합의 원리를 인간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다. 그는 특정 관념들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떠오르는 현상, 즉 연상 작용이 인간 사고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했다.

요즘의 뇌과학으로 보면 '시냅스 세포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관념 연합이 모든 정신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오히려 스튜어트는 상식과 더불어 다른 정신 능력들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하며, 관념 연합이 인간 마음의 전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관념 연합이 특히 학습 과정이나 기억력 향상, 그리고 특정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실용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도덕 철학 및 교육에 대한 심오한 함의

스튜어트의 인간 마음 철학은 그의 방대한 도덕 철학 강의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인간의 정신 구조와 작동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윤리적인 행동을 실천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라고 믿었다.

그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도덕적 감각이나 양심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내재된 능력을 통해 옳고 그름을 자연스럽게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경계하고 보편적인 도덕 원리의 존재를 옹호하는 그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또한, 스튜어트의 철학은 교육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교육 과정을 개선하고, 개인의 정신적 잠재력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교육 철학은 합리적인 교수법과 함께 인격 형성, 즉 도덕적 함양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정리해 보자. 듀갈드 스튜어트의 "인간 마음 철학의 개론"은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중요한 유산일 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학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복잡한 인간의 정신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설명하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통해 서양 철학과 심리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이후 영미철학의 기반이 된다. 외부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 행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서 기억을 만들고 추론에서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관념의 연합을 형성하게 된다. 이로부터 100년이 지나면 '관념의 모험'을 쓴 화이트헤드가 등장하면서 듀갈드의 이론을 발전시켜서 시간과 지속 개념에서 형성되는 개념과 아이디어에 대해서 '과정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2. 토마스 브라운과 윌리엄 해밀턴


토마스 브라운(Thomas Brown)과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걸쳐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철학적 유산을 이어받고 발전시킨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된 상식 철학의 흐름 속에서 인간 마음의 본질과 인식의 한계를 탐구하는 데 깊이 몰두했으며, 각자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스코틀랜드 철학의 지평을 넓혔다. 토마스 브라운은 '인간 마음 정신의 철학에 관한 감독'을 썼고 물질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정신적 현상들의 분석들로써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부피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윌리엄 해밀턴은 칸트주의자로서 스코틀랜드에 처음으로 칸트의 인식론을 들여왔다. 특히 해밀턴은 인식의 한계를 '인식역량'에서 살펴보면서 인간이 외부의 경험을 인식할 때 일어나는 것들을 분석했다.


토마스 브라운 (Thomas Brown, 1778-1820)

토마스 브라운은 듀갈드 스튜어트의 가장 재능 있는 제자이자, 그의 뒤를 이어 에든버러 대학에서 도덕 철학 교수로 강단에 선 학자였다. 비록 그의 생애는 42세로 비교적 짧았지만,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과 영향력 있는 강의는 당시 스코틀랜드 학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브라운의 철학은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기본적인 전제, 즉 인간의 직관과 상식적 신념을 옹호하면서도, 이를 더욱 세련되고 심층적인 방식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그는 특히 관념 연합(Association of Ideas)에 대한 분석에 주력했다. 더갈드 스튜어트가 관념 연합을 마음의 부차적인 기능으로 간주했던 것과 달리, 브라운은 이 원리가 인간의 인지 과정, 즉 감각 경험의 형성, 기억의 작동, 그리고 사고의 흐름에 있어서 훨씬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각적 인상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복합적인 관념을 형성하며, 특정 관념이 다른 관념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고 정교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그의 탐구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초기적인 시도로 평가받으며, 후대의 연합주의 심리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브라운은 당시 지배적이던 '능력 심리학(Faculty Psychology)'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전통적으로 마음을 지각, 기억, 추론 등 여러 독립적인 능력들의 총합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브라운은 이러한 능력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통일된 마음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음의 본질이 분리된 조각들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실체임을 강조하며, 마음의 통합적이고 상호 연결된 측면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관점은 마음을 정적인 구조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현대 심리학의 접근 방식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의 사상은 이후 제임스 밀(James Mill),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해밀턴 (William Hamilton, 1788-1856)

윌리엄 해밀턴 경(Sir William Hamilton)은 19세기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마지막 거장이자, 동시에 스코틀랜드 철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에든버러 대학에서 논리학 및 형이상학 교수로 재직하며, 당시 유럽 대륙, 특히 독일의 철학적 흐름을 영국 학계에 소개하고 통합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상식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이마누엘 칸트의 비판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자신의 인식론에 접목시키려 했다.

해밀턴은 인간 지식의 상대성과 본질적인 한계를 매우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상식 학파의 전제를 유지하면서도, 그 인식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정신적 능력의 유한한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즉, 우리는 현상(phenomena), 즉 우리의 경험에 나타나는 대로의 대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noumena)는 인간 지식의 영역 밖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칸트의 현상-본체 구분을 상식 철학의 맥락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인식의 한계가 진리의 경계선"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인간 지식의 불완전성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시작임을 역설했다.

또한, 해밀턴은 무조건적인 것(the Unconditioned)이라는 개념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인간 이성이 본성적으로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나 개념을 사유하려 하지만, 우리의 유한한 정신 능력으로는 그러한 무조건적인 것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궁극적인 실재나 절대적인 진리는 인간의 제한된 인지 능력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 지식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당시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과 독일 관념론 사이의 지적인 교류에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해밀턴의 사상은 특히 미국의 프린스턴 학파(Princeton School of Theology)와 같은 신학적 흐름에도 영향을 미쳐, 신의 존재가 이성적 추론보다는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되기도 했다.


토마스 브라운이 인간 마음의 내부 심리적 메커니즘, 특히 관념 연합의 중요성과 마음의 통합성에 집중하여 상식 철학을 세련되게 확장했다면, 윌리엄 해밀턴은 인식론적 한계와 칸트 철학의 비판적 요소를 상식 학파에 통합함으로써 인간 지식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철학자는 모두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론으로 시작된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들은 인간의 직관과 상식적 믿음의 합리성을 굳게 믿었으며, 인간 마음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려 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그들이 집중한 철학적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 방식은 분명한 차이를 보였으며, 이러한 차이점은 19세기 스코틀랜드 철학이 단순히 고정된 흐름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하며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는 활기찬 학문적 전통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이 모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풍부한 유산을 형성하고, 이후 서양 철학사의 전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브라운의 실험실


3.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영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법학자, 그리고 사회 개혁가이다. 여기서 벤담을 다루는 것은 상식학파, 그리고 영국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내면에서 어떻게 지식의 수준을 만들어 가는지를 보기 위함이다. 벤담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라는 윤리 및 정치 철학을 정립한 인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가 인간의 내면에서 지식을 형식화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벤담의 사상은 이후 서양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리주의라는 이름은 머릿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들, 경험할 것들의 총량을 계산한다는 아이디어이다.


벤담은 비록 모든 쾌락을 단순한 수량으로 환원하여 계산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지만, 그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칙은 법과 도덕, 그리고 사회 정책을 평가하고 개선하려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상식학파에서 생각해보면 벤담은 인간의 내면에서 '지식'이 어떻게 합리적인 계산을 하게되는지를 밝힌다. 뇌는 가장 효과적이고 효용이 높은 선택을 하게 되어 있고, 어떤 상황이든 '최대 다수'에게 효용을 주는 방식으로 선택한다. 그런 방식이라면, 개인의 선택과 사회의 선택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벤담의 공리주의의 핵심이다.


Ok0YXfb_y_q2q6tBi5BkYf8QNSQowqdqWcHePqIP3w8377RedQilJg71m2LpBxCUREQEwX_P6cyEW94ZuY9fjg.webp 제레미 벤담의 초상화


공리주의의 창시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벤담의 철학적 핵심은 바로 공리주의이다. 그는 모든 도덕적, 법적, 정치적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척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에 있다고 보았다. 이 원칙은 그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다. 벤담은 자연이 인간을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주권적 군주"의 통치 아래 두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모든 행동은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경향에 의해 동기 부여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행복을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감소로 정의했고, 이러한 쾌락과 고통은 양적으로 측정하고 계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벤담은 이를 위한 방법으로 '쾌락 계산법(Hedonic Calculus)'을 제시했는데, 쾌락과 고통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다산성(또 다른 쾌락을 낳을 가능성), 순수성(고통이 섞이지 않을 가능성), 그리고 범위(영향을 받는 사람의 수) 등을 고려하여 행위의 결과를 측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벤담의 공리주의는 양적 공리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법과 사회 개혁에 대한 기여

벤담은 공리주의 원칙을 추상적인 철학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실제 법률, 정치, 사회 제도 개혁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려 했다. 그는 당시의 영국 법률과 제도가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며, 특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한다고 비판했다.

그의 주요 저서인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은 법과 도덕의 근본 원리를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제시하며, 법률 제정의 목적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데 있음을 역설했다.

벤담은 법이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성문법의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판례 중심의 복잡한 보통법(Common Law)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법률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법률의 체계적인 코드화(Codification)를 주장했다.

또한, 벤담은 효율적인 사회 통제와 재사회화를 위한 건축물인 파놉티콘(Panopticon)을 고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원형 감옥의 형태로 중앙 감시탑에서 모든 수감실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감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의 통제 효과를 얻으려는 시도였다.

비록 파놉티콘이 실제로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이는 벤담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공리주의 원칙을 실제 건축 및 제도 설계에 얼마나 철저하게 적용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영향과 비판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는 이후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 의해 질적 측면이 보완되고 발전되는 등 후대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은 자유주의, 사회 개혁, 형법 개혁, 민주주의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형법에서 위법 행위를 판단하고 처벌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 공리주의적 관점이 반영되기도 한다. 또한, 정부의 역할과 복지 정책에 대한 논의에서도 벤담의 사상은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벤담의 공리주의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특히 양적 쾌락만을 강조하여 쾌락의 질적 차이를 간과한다는 비판, 그리고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권리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된다. 예를 들어, 사회 전체의 행복 증진을 위해 특정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들은 이후 존 스튜어트 밀이 질적 공리주의를 통해 보완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1200px-Panopticon.jpg 벤담이 기획한 '판옵티콘'으로 1인 감시체제이며 오늘날 AI감시체계인 '빅브라더'의 원형이 된다


4. 맬서스와 리카도의 경제학에서의 상식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활동한 영국의 대표적인 고전 경제학자들이다. 경제학 고전에서 많이 등장하는 이들은 당시 영국 사회가 직면했던 인구 증가, 식량 공급, 부의 분배 등 핵심적인 경제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하며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았다. 스코트랜드의 상식학파의 전통에서 보자면 인간이 인지영역에서 시작된 변화에 대해서 단순히 인간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와 국가에 적용했다는 점을 받아서 미래에 대한 인구추산과 리카도의 차액지대론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인간이 행동하고 판단하고, 선택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수준을 넘어서 추론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 (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

맬서스는 그의 저서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이 책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하며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맬서스 이론의 핵심은 인구와 식량 공급 사이의 근본적인 불균형에 있다.

그는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 법칙을 제시했다. 즉, 아무런 제약이 없다면 인구는 25년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1, 2, 4, 8과 같은 급격한 속도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반면,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 증가에 그친다고 주장했다. 토지의 비옥도와 경작 기술의 한계로 인해 식량 생산은 1, 2, 3, 4와 같이 완만한 속도로만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러한 인구 증가와 식량 생산 증가 속도의 불일치는 결국 인류가 식량 부족과 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고 맬서스는 보았다.

그는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를 막기 위한 두 가지 형태의 억제를 제시했다. 첫째는 '긍정적 억제(positive checks)'로, 인구 과잉으로 인한 식량 부족이 결국 기근, 질병, 전쟁 등으로 이어져 사망률을 높이고 인구를 자연적으로 조절하는 비극적인 현상들을 말한다.

둘째는 '예방적 억제(preventive checks)'로,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출산을 억제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맬서스는 특히 만혼(늦은 결혼)이나 금욕 생활과 같은 '도덕적 억제(moral restraint)'를 강조했다.

또한 빈곤층에 대한 무분별한 복지 정책(예: 빈민법)이 오히려 인구 증가를 부추겨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 정책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맬서스의 예측이 현대 사회의 농업 기술 발전과 인구 통계학적 변화(선진국의 출산율 감소)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론은 자원의 유한성과 인구 문제의 중요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환경 경제학이나 지속 가능성 논의에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데이비드 리카도 (David Ricardo, 1772-1823)

데이비드 리카도는 애덤 스미스의 뒤를 이어 고전파 경제학을 체계화하고 심화시킨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독학으로 경제학을 공부해 성공적인 증권 중개인에서 당대 최고의 경제학 이론가로 자리매김했다.

리카도의 주요 경제 이론들은 당시 사회의 부가 어떻게 분배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고 있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분배론이다. 리카도는 경제학의 핵심 과제가 사회 구성원들, 즉 지주, 자본가, 노동자 사이에 생산된 소득(지대, 이윤, 임금)이 어떻게 분배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지주의 지대(rent)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자본가의 이윤(profit)은 점차 감소하며, 노동자의 임금(wage)은 장기적으로 생존 수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고 예측했다. 이러한 분석은 그가 당시 영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곡물법'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또한, 리카도는 차액지대론(differential rent)을 통해 토지의 비옥도 차이가 지대 발생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했다. 인구가 늘고 식량 수요가 증가하면, 더 비옥한 토지뿐만 아니라 덜 비옥한 한계 토지(marginal land)까지 경작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이때, 가장 덜 비옥한 토지의 생산비가 곡물 가격을 결정하며, 이보다 비옥한 토지에서는 추가적인 수익, 즉 차액지대가 발생하여 토지 소유자인 지주에게 귀속된다고 보았다. 그는 지대가 사회에 아무런 생산적인 기여를 하지 않는 불로소득이며, 이는 결국 자본가의 투자 의욕을 저하시켜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리카도의 또 다른 중요한 기여는 국제 무역에 대한 비교우위론(theory of comparative advantage)이다. 이 이론은 오늘날에도 국제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원리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한 국가가 모든 상품 생산에서 다른 국가보다 절대적인 생산 우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각국이 상대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상품(즉, 기회비용이 낮은 상품)에 특화하여 무역하면 양국 모두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이 이론은 자유 무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며, 국제 분업과 특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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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서스와 리카도의 관계 및 공통점과 차이점

맬서스와 리카도는 단순히 동시대의 학자를 넘어, 런던의 지식인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교류하며 치열하게 논쟁하고 서로의 이론에 깊이 영향을 주고받았던 절친한 친구이자 학문적 동료였다.

공통점 : 두 사람 모두 고전 경제학파의 핵심 인물로서,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두 사람 모두 사회의 장기적인 경제 동학과 자본주의 시스템의 작동 원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맬서스의 인구 증가와 식량 생산의 한계라는 비관적인 전망은 리카도의 분배론과 차액지대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맬서스의 인구 압력이 식량 가격을 상승시키고 덜 비옥한 토지까지 경작하게 만든다는 상황은 리카도 지대 이론의 핵심 전제가 되었다.

맬서스가 인구 증가로 인한 보편적인 빈곤을 불가피하게 보았다면, 리카도는 이러한 현상이 지주 계급의 부를 증대시키고 자본가의 이윤을 감소시켜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이 정체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둘 모두 당시 영국 경제의 큰 쟁점이었던 곡물법(Corn Laws)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맬서스는 곡물법이 식량 가격을 높여 빈곤을 심화시키고 인구 압력을 가중시킨다고 보았고, 리카도는 곡물법이 비효율적인 생산을 조장하고 지주에게만 이득을 주며 자본가의 이윤을 감소시켜 국가 전체의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차이점 : 주요 연구 초점: 맬서스는 주로 인구 증가의 법칙과 그로 인한 사회적 빈곤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리카도는 생산된 부가 지대, 이윤, 임금으로 사회 계층 간에 어떻게 분배되는지에 대한 이론적 분석에 더욱 집중했다.

이론 전개 방식: 맬서스의 『인구론』은 현실 관찰과 경험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다소 서술적이고 귀납적인 성격을 띠는 반면, 리카도의 이론은 가정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추론과 모델 구축을 통한 연역적인 성격이 강했다. 사회적 전망: 맬서스는 인구와 자원의 불균형으로 인한 필연적인 빈곤과 재앙을 예측하며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반면, 리카도 역시 자본가의 이윤 감소와 궁극적인 경제 정체 상태를 예견했지만, 비교우위론을 통해 자유 무역이 국가의 전반적인 부를 증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맬서스와 리카도는 각자의 독창적인 이론을 발전시켰지만, 그들의 학문적 교류와 상호 비판은 고전 경제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들의 논쟁과 이론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제학 교육과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현대 경제 문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이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기본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다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 생각의 경로, 그 마음의 길을 알아보기 위한 방법은 마음이 실체가 된 행동과 실제적인 삶의 결과,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인 '국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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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임스 밀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은 영국의 철학자, 역사가, 경제학자이며, 특히 공리주의의 주창자인 제레미 벤담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다. 그는 또한 유명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아버지이자 엄격한 교육자로서, 아들에게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영재 교육을 시킨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공리주의의 강력한 옹호자

제임스 밀은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열렬히 지지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벤담이 제시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원칙을 사회, 법률, 정치 시스템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밀은 모든 인간의 행동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에 의해 동기 부여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가장 큰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충실히 따랐다. 즉, 쾌락과 고통은 그 질적인 차이보다는 양적으로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법과 제도를 설계할 때 이러한 쾌락 계산법을 적용하여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그의 저서 『정부론(Essay on Government)』 등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그는 대의 민주주의가 공공의 이익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정치 체제라고 주장하며, 정부의 역할은 시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다.


연합주의 심리학의 선구자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를 심리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작 중 하나는 **『인간 정신 현상에 대한 분석(Analysis of the Phenomena of the Human Mind)』**이다. 이 책에서 그는 **연합주의 심리학(Associationist Psychology)**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 태어날 때 백지 상태(tabula rasa)와 같으며, 모든 지식과 관념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한 감각 관념들이 **연합(association)**의 원리에 따라 복합적인 관념을 형성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빨간색, 딱딱함, 동그라미라는 단순 관념들이 반복적으로 함께 경험되면 '사과'라는 복합 관념이 형성된다는 식이다. 그는 이러한 연합의 원리가 생각의 흐름, 기억, 그리고 심지어는 정서와 의지까지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제임스 밀은 **"불가분적 연합(inseparable associ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여러 단순 관념이 너무나 빈번하고 강하게 연합되어 마치 하나의 관념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행동이 타인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 자신의 쾌락과 강하게 연합되어 이타적인 행동이 자신의 행복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벤담의 공리주의가 이기적인 쾌락주의라는 비판에 대해, 이타적인 행동도 결국은 개인의 쾌락 추구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심리학적 설명을 제공하려던 시도였다.


교육과 사회 개혁에 대한 열정

제임스 밀은 단순히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사회 개혁과 교육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였다. 그는 교육이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고 공리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에게 그리스어, 라틴어, 수학, 철학, 경제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엄격한 조기 영재 교육을 직접 시켰다. 이는 그의 연합주의 심리학에 대한 믿음, 즉 적절한 환경과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인간의 정신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록 이러한 교육 방식이 존 스튜어트 밀에게 정신적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서양 사상사의 거목으로 성장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제임스 밀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대의 민주주의 확대 등 다양한 사회 정치적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동인도 회사에서 고위 관리직을 역임하면서도, 공리주의 원칙을 식민지 통치 및 행정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영향과 한계

제임스 밀의 사상은 그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들은 아버지의 공리주의와 연합주의 심리학을 계승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발전시켰다(예: 쾌락의 질적 차이 강조). 그의 연합주의 심리학은 이후 행동주의 심리학의 발전에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러나 제임스 밀의 공리주의는 쾌락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쾌락을 양적으로만 측정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의 연합주의 심리학은 인간 마음의 복잡성과 자발적인 측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세기 영국의 지적 풍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공리주의 철학과 경험주의 심리학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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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무엘 테일러 코울리즈와 토마스 칼라일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19세기 영국 문학과 사상계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들이다. 코울리지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이자 비평가, 철학자로 유명하며, 칼라일은 역사가이자 비평가, 사회 사상가로서 빅토리아 시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고 영국의 지적 풍토에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으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다룰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영국의 생각의 방식은 이제 비로소 상식적으로 모든 사람이 사용하게 된다.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

코울리지는 윌리엄 워즈워스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 시 운동의 선구자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워즈워스와 공동으로 출간한 '서정 담화집(Lyrical Ballads)'과 그의 대표적인 장편 시 '늙은 뱃사람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그리고 미완성 작품인 '쿠블라 칸(Kubla Khan)' 등이 있다.

코울리지는 단순한 시인을 넘어 심오한 철학적 사색가이자 문학 비평가였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Imagination)을 단순한 공상이 아닌, 세계를 이해하고 재창조하는 가장 근본적인 인지 능력으로 보았다. 특히 '제1의 상상력(Primary Imagination)'은 외부 세계를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보편적인 능력이며, '제2의 상상력(Secondary Imagination)'은 예술가가 이성적 의지를 가지고 파편화된 경험들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창조적인 힘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그의 비평 이론의 핵심을 이룬다.

또한 코울리지는 독일 관념론, 특히 칸트와 셸링의 철학에 깊이 심취했다. 그는 1800년대 초 독일에 머물면서 이러한 사상들을 영국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경험주의 철학에 비판적이었으며,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내포하고, 진정한 지혜는 오성(Understanding)이 아닌 이성(Reason)의 직관적인 힘을 통해 온다고 믿었다.

그의 철학은 인간의 내면적 경험과 정신적 진리를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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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칼라일 (Thomas Carlyle, 1795-1881)

토마스 칼라일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 역사가, 사회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산업 혁명으로 인한 사회 변화와 물질주의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의 회복을 역설했다.

칼라일은 주로 독일 낭만주의와 관념론, 특히 괴테와 피히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번역하여 영국에 소개하는 등 독일 철학을 영국 지성계에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풍자적인 철학 소설 '의상철학(Sartor Resartus)', 거대한 역사서 '프랑스 혁명사(The French Revolution: A History)', 그리고 영웅적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영웅 숭배론(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 등이 있다.

칼라일의 핵심 사상 중 하나는 영웅 숭배론이다. 그는 역사가 단순히 물질적 조건이나 대중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영웅적인 인물들의 정신적 힘과 도덕적 결단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란 진실성(Sincerity)과 성실성(Earnestness)을 겸비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산업사회의 비인간적인 물질주의와 기계론적 사고방식을 "금전 관계(Cash Nexus)"라는 용어로 비판하며, 인간관계가 오직 경제적 이익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형식적인 민주주의보다는 진정으로 유능하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등장을 갈망했다.


코울리지와 칼라일의 관계 및 비교

코울리지와 칼라일은 직접적인 사제 관계는 아니었지만, 독일 관념론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낭만주의적 경향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칼라일은 젊은 시절 코울리지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코울리지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코울리지는 칼라일에게 독일 철학의 문을 열어준 중요한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칼라일은 코울리지의 사상, 특히 상상력과 이성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그러나 그들의 사상적 중점과 표현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주요 관심사: 코울리지는 주로 시와 비평, 그리고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탐구에 집중했다. 그의 관심은 인간의 내면세계, 상상력의 본질, 그리고 영적인 진리를 포착하는 방식에 있었다. 반면 칼라일은 역사, 사회 비평, 그리고 도덕적, 정치적 리더십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는 당대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해결할 영웅적 지도자의 등장을 촉구하는 데 몰두했다.

낭만주의의 해석: 코울리지는 낭만주의적 감수성과 상상력의 중요성을 시와 철학을 통해 표현했다. 그의 낭만주의는 개인의 내면적 경험과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칼라일 역시 낭만주의자였지만, 그의 낭만주의는 사회적, 도덕적 혁명과 강력한 리더십을 강조하는 보다 실천적이고 비판적인 성격을 띠었다.

사회 개혁에 대한 태도: 코울리지는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그의 철학은 주로 인간 정신의 본질에 대한 성찰에 머물렀다. 반면 칼라일은 사회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의 저술은 당시의 사회적 논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산업 사회의 문제점을 "금전 관계"로 비판하며, 정신적 가치의 회복과 강력한 도덕적 리더십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요컨대,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는 독일 관념론을 영국에 소개하고 낭만주의 문학 및 비평의 철학적 기반을 다진 시인이자 사상가였다. 토마스 칼라일은 이러한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아 산업 시대 영국의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영웅적 리더십을 강조하며 빅토리아 시대 사상에 깊은 흔적을 남긴 역사가이자 사회 비평가였다. 이들은 서로에게 지적 영감을 주고받으며 19세기 영국 지성사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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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칼라일에 의하면 한 시대의 발전은 정신적인 깊이를 가진 '영웅'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영웅들이 기존에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그 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생각과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것은 시대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알아본 것과 같이 영웅에 의해서 발견된 지식은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방식,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어 버린다. 인간이 가진 직관과 오성의 힘 그리고 이성은 일정한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며 방향을 정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어서 관념의 연합을 이룬다. 이렇게 서로 연결된 직관의 구조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에 투사되어서 새로운 물견으로 바뀌고 이전까지 없었던 조직으로 바뀐다. 영국과 미국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경험'이고 이러한 경험을 분석하는 단위는 언어이다. 이 역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영웅으로 시작해서 화이트헤드라는 영웅이 마무리한다.


지난번에는 이데올로지 학파를 알아보았다면 오늘은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상식학파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에밀 브레이너가 보는 역사관을 차근차근 따라가보고 있다. 서양의 정신이 현대성을 갖기 시작한 지점에서 적잖은 고민이 많다. 이런 방식으로 밖에 지식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바꾸고 싶어할 때, '제국주의'가 눈을 뜬다. 다른 세계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세계를 자신의 세계처럼 만들고 싶어한다. 인간이 가진 직관과 이성의 힘으로 경험을 설계하는 19세기 영국의 상황을 보면서 우리 나라가 18세기 새롭게 받아들인 '실사구시'의 실학이 생각났다. 좋은 선배들을 역사 속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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