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브레이어_서양철학사
에밀브레이어의 철학적 관점에서 서양철학사를 보고 있다. 지난학기에 이어서 이번학기에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살펴볼 예정이다. ‘계몽주의‘시대는 프랑스어로 ‘뤼미에르’라고 한다. 자연에 빛을 비추어서 그것의 이면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지식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철학과 영국의 철학은 다르다. 프랑스철학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에 더 집중한다. 인간이라는 기준이 있지 않고, 자연이 어떻게 발현되고 발생하는가가 중요하다. 앵글로색슨 전통에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 외에는 무생물’로 본다. 그러니깐 이 전통에서는 인간의 역사만 다룬다. 프랑스철학은 18세기 플라톤주의의 이데아가 자연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던 시점부터 범재신론과 같이 자연에 이미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깐 인간은 그러한 영혼의 도처에 깔려 있는 자연에 배치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이 쉽지는 않았다. 일명 19세기를 체계들의 시대라고 보는 에밀 브레이어는 프랑스에서 역사와 자연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면서 독일과는 다른 방식으로 학문을 정의하고 시대를 정의하게 된다. 1800년대부터 약 50여년간 자연과 역사의 비밀이 폭로되고, 이것을 드러내는 학설들이 발표되던 시절이다. 1850년대부터 약 50여년간은 이전의 학설들을 기반으로 자연철학과 사회주의 그리고 진화론이 발전하게 된다. 이때 꽁트의 사회학도 나오게 된다. 1890년대가 되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등장하게 되는데 정신적 실재성들을 향한 접근의 수단들을 찾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초는 이러한 과정에서 인문학도 과학들의 갈래만큼 다양하게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존재는 역사를 책임지는 것으로 정의되며 자아의 연구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작동의 재생산’을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철학에서는 인간과 자아, 자아와 자연을 한꺼번에 연결해서 어떻게 재생산이 되는지를 살펴본다는 것이다. 생성과 자아를 독립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들뢰즈까지 오면 인간의 세포에서 정신까지 모두가 연결된 형식으로 보면서도 그 안에서 베르그송과 같이 ‘물질’ 속에서 어떻게 정신이 나오는지도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 루이드보날과 같은 학자들이 있다. 시대흐름에서 자연과 연결되는 부분을 반대하는 전통주의자 말이다.
루이 드 보날
보날은 왕정복구 시대에 프랑스의 상원의원이었고 전통주의를 체계화하려고 노력했다. 혁명의 정신을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보날이 이야기한 인민주권이라는 개념은 무신론과 물질의 영원성, 경험론과 임의의 계약일 뿐이었다.
루이 드 보날은 한마디로 혁명이 아니라 전통과 사회 질서를 옹호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 사회학의 이론적 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주로 기억된다. 보날은 계몽주의의 개인주의적이고 원자론적인 경향과 프랑스 혁명에 강력히 반대하며, 전통주의와 가톨릭적 가치를 옹호했다.
보날의 핵심 사상
보날의 사상은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닌다. 사회 유기체론과 가족 중심주의가 그 첫 번째이다. 그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로 보았으며, 가족이 사회의 기본 단위이자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사회 질서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세속적인 결혼, 이혼, 그리고 균등 상속에 반대했다.
두 번째는 반계몽주의 및 반혁명주의이다. 보날은 계몽주의 사상과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변화, 특히 개인의 자유와 이성에 대한 강조가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비판했다. 그는 강력한 정부가 인간의 악한 경향을 억제하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민주주의나 권력 분립은 무정부 상태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로, 보날은 권위주의적 보수주의를 표방했다. 그는 군주제가 사회의 선을 위해 통치하며 일반 의지를 대표한다고 보았다. 보날은 왕정 복고와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지지하는 정통주의(Legitimism)의 주요 변론가 중 한 명이었다.
네 번째는 언어의 중요성 강조이다. 그의 사회 이론은 인간이 언어에 의존하며 문화를 습득한다는 관점에 기반을 두었다. 이러한 통찰은 이후 오귀스트 콩트와 에밀 뒤르켐과 같은 사회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보날은 농업 사회를 옹호했다. 산업 혁명이 전통적인 가족 생활 양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비판하며 농업 공동체와 생활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농업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결합"시키는 반면, 상업은 사람들을 모으지만 "단결"시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역사와 자아와 연결되는 방식, 인간과 자연이 연결되는 방식으로 ‘세계관‘을 정초하면 미슐레나 끼네와 같이 불신을 넘어서려는 불가사의한 실재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나오게 된다. 오베르망이나 줄리앙 소렐처럼 낭만주의 전통에서 계시주의나 야바위 짓이나 모든 거짓에 대해서 열망하는 문학을 허용하게 된다. 프랑스철학이나 문학이 경계를 넘나들면서 죽음이나 저주, 금지된 것들에 접근하는 것은 어쩌면 이때부터 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연과 다르지 않으며, 자아는 우연하게 발생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태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문학형식을 주창하는 샤또브리앙을 만나게 된다.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낭만주의의 선구자이자 새로운 문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샤토브리앙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1848)은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중요한 문학인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시대, 왕정 복고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며 그의 문학 세계를 형성했다.
샤토브리앙이 '새로운 문학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낭만주의의 개척자이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감정, 상상력, 그리고 주관적인 경험을 문학의 중요한 요소로 끌어올렸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우울, 고뇌,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심 등은 이후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과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탁월했다.
'세기병(Mal du siècle)'의 표현자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젊은 세대가 겪는 방황, 고독, 삶의 의미 상실 등의 감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종종 고독하고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는 당시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자연 묘사의 대가이다. 그는 단순히 배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닌, 인간의 감정과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내면화된 자연을 묘사했다. 특히 미국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이국적이고 웅장한 자연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냈으며, 이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자서전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대표작인 ‘무덤 너머의 회상록 (Mémoires d'outre-tombe)’은 단순한 자서전을 넘어, 자신의 삶을 통해 프랑스 격동의 역사를 조명하고 철학적 사유를 담아낸 대작이다. 개인의 삶과 역사를 연결시키는 새로운 서술 방식을 제시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문체의 혁신을 가져왔다. 그는 고전주의의 엄격한 문체에서 벗어나, 유려하면서도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그의 문장은 회화적이고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며, 프랑스 산문의 품격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 이제 이데올로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보통 이데올로지는 우리가 아는 ‘이데올로기‘이 프랑스식 발음이다. 프랑스철학에서 이데올로지는 꽁디약에서 나온다고 보고 있다. 꽁디약 (Étienne Bonnot de Condillac, 1714~1780)은 18세기 프랑스의 중요한 철학자로, 주로 영국의 경험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감각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당시 프랑스 철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 프랑스 정신주의와 유심론에도 영향을 미쳤고 오늘 우리가 알아볼 멘드비랑까지 가게 된다.
꽁디약 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제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본유관념의 부정과 의식의 수동성이다.꽁디약은 인간의 모든 관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감각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유명한 "조각상 비유"는 이러한 감각주의를 잘 보여준다. 조각상에 순차적으로 시각, 후각, 미각, 청각 등의 감각을 부여하면서, 각 감각이 어떻게 개별적인 관념을 형성하고, 점차 복합적인 인식으로 발전하는지를 설명한다. 처음에는 감각하는 외부 대상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의식은 수동적으로 감각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시작한다고 꽁디약은 주장한다.
이어서 외적 대상의 인식과 의식의 능동성을 다룬다. 단순히 감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꽁디약은 의식이 점차 능동성을 획득하고 외적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는 감각들이 상호작용하고, 기억, 비교, 판단 등의 고차원적인 인식 기능으로 발전하면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또한 기호의 사용과 고차적 인식 기능의 발달이 이어서 이루어진다. 꽁디약은 언어와 같은 기호의 사용이 인간의 고차원적인 사유 능력을 발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기호를 통해 복잡한 관념들을 조직하고 분석하며, 이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꽁디약은 모든 관념이 기호들의 제도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부분은 베르그송이나 들뢰즈의 생철학과도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그러면 꽁디약의 철학사적 위치에 대해서 알아보자. 꽁디약은 존 로크의 경험론을 프랑스 전통에 맞게 계승하고 심화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심신이원론이나 정신과 이성중심의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주의 철학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단순히 감각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상은 의식의 능동적인 측면과 기호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후 프랑스 유심론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멘 드 비랑(Maine de Biran)과 같은 철학자에게 영향을 주어, 영국 경험론과 프랑스 정신주의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꽁디약의 사상은 ‘이데올로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꽁디약의 사상은 프랑스철학에 있어서 '이데올로지(Idéologie)' 학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데올로기(ideology)'라는 용어 자체는 프랑스의 데스튀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가 처음 사용했는데, 이는 '관념들(ideas)에 대한 과학' 또는 '관념들에 대한 연구'를 의미했다. 이데올로지 학파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프랑스에서 유명했던 철학 유파로, 꽁디약의 감각주의적 경험론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감각주의적 인식론의 계승이 일어난다. 꽁디약은 모든 관념이 감각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고, 그의 저서 ‘감각론‘에서 제시된 '조각상 비유'는 이러한 감각론적 인식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을 앞에서 알아보았다. 이데올로지 학파는 꽁디약의 이러한 감각주의를 받아들여, 인간의 모든 지식과 사상이 감각적 경험에서 출발하며,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 했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지난학기 프랑스철학이 18세기를 거치면서 영혼이 인간의 신체 안으로 흡수되고, 자연 안에 거주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연결을 살펴보았다. 오늘 보는 것처럼 꽁디약을 지나서 이데올로지 학파까지 오면 오히려 인간의 영혼은, 세계의 영혼은 물질에서부터 시작해서 감각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지점까지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작점이 왜 그렇게 잡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데올로지 학파는 관념의 기원과 형성 연구를 진행한다. 이데올로지 학파는 꽁디약의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하는지를 탐구하면서, 인간의 정신 활동을 감각과 그 변형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는 당시의 심리학, 교육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사회 개혁과의 연관성도 깊어지는데 이데올로지 학파는 단순히 철학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사상을 사회 개혁과 연결시키려 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을 통해 사회를 합리적으로 재편할 수 있다고 믿었다.
멘 드 비랑 (Maine de Biran, 1766~1824)은 19세기 초 프랑스의 중요한 철학자로, 꽁디약의 감각주의적 경험론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발전시켜 프랑스 유심론(Spiritualisme français)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종종 '자아의 철학자(philosophe du moi)'로 불린다. 멘 드 비랑은 꽁디약의 감각주의가 의식의 수동성을 강조하는 데 비해, 인간 의식의 능동적인 측면, 즉 의지(volonté)를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외부 감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고 행동하는 주체임을 역설했다. 그의 철학은 "나는 의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르바 내성 철학 (主意主義的 內省哲學)이 시작된다. 비랑은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적 지각보다는 내면의 경험, 특히 '노력(effort)'의 감각을 통해 자아를 파악하려 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느끼는 내적인 노력의 감각이 바로 자아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근원적인 사실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내성적 탐구를 통해 그는 인간을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하는 독특한 유심론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면 꽁디약과의 관계은 어떻게 될까? 멘 드 비랑은 꽁디약의 감각론에서 출발했지만, 꽁디약이 간과했던 의식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부각시켰다. 감각론을 받아서 의지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비랑은 꽁디약이 감각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 것에 대해, 의지의 역할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보고, 꽁디약의 외적 경험론을 내적 경험의 철학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고 평가된다. 멘 드 비랑은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아, 영국 경험론, 칸트의 현상주의가 내포하는 주지주의적 경향에 대립하며, 의식 내적 경험의 구체철학을 제시했다.
이러한 사유는 이후 라베송(Ravaisson), 베르그송(Bergson) 등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유심론의 중요한 뿌리가 된다. 이들은 감각, 감정, 지식, 의지를 하나의 통합적인 단위로 보고, 생명철학이라는 고유한 영역을 개척했다. 멘 드 비랑은 철학적 반성을 심리학과 생리학적 탐구로 확장하려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인간 신체의 운동성과 생명적 기능을 통해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이후에는 비랑의 노력이 학문적으로 정리되면서 생리심리학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멘 드 비랑은 직업적인 철학자라기보다는 정치인이자 심리학자, 작가로 활동했으며, 그의 내면 생활 자체가 철학적 여정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학술원에 논문을 제출하고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는데, 특히 ‘습관에 관한 논고‘와 ‘사유의 분해에 관한 논고‘가 유명하다.
인간의 의식은 육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주지주의의 관점에서는 의식이 먼저 있고 육체가 따라온다. 그러나 오늘 살펴본 철학자들의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의지가 먼저가 아니라 오히려 감각이 먼저이고 감각이전에 의지가 먼지이다. 비랑이 이야기한 것처럼 ‘습관‘이라는 것이 먼저 몸에 체화된 감각들이 지성의 갈래를 만드는데, 이러한 감각을 만들기 위해서는 습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의지’가 중요해진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습관은 과거를 동일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관점을 이어 받아서 과거의 습관들은 ‘추억‘으로 쌓인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몸에 쌓인다.
그리고 그러한 축적된 추억들을 몸이 기억한다. 과정을 동일하게 꺼낼 수 있는 것을 베르그송은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멘드비랑은 습관의 조각들을 기억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좀 더 들어가보자. 비랑과 베르그송은 비슷한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 비랑은 본능과 지성의 과정에 대해서 심리학이라는 학문을 경유해서 이해한다. 특히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습관을 수동적인 습관과 구분한다. 오늘날로치면 조건반사와 무존건 반사에 대해서 ’의지‘를 가지고 구분한 정도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내면의식이 아니라 직관이 시간에 따라서 지속하는 기억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의식적으로 습관이 만들어지지 않고 우리 몸은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직관적으로 기억한다. 시간의 지속은 이렇게 ‘발생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철학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독일철학은 자아에 대한 관념으로 부터 만들어진다. 영국과 미국의 철학은 분석과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지며 이러한 철학의 흐름은 역사적인 경로를 가진다. 지난시간부터 계속 알아보고 있는 에밀브라이너는 프랑스철학의 차이점들을 ‘생동감‘ 혹은 ’생철학‘, ’직관’에서 알아보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기존의 관념론으로는 프랑스철학을 절대로 이할 수 없다. MBTI에서 T가 노력해서 F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비슷하다. 프랑스철학은 만남의 철학이다. 만나보면 우리의 의식보다 몸이, 마음이, 의지가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깐 해보면 다르고, 만나보면 다르고, 경험해보면 다른데 이것을 우리의 의식이 정리하기 전에 벌써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있다. 그게 베르그송의 창조와 진화에서 다룬 내용이고, 들뢰즈가 집중한 리좀의 핵심이다. 프랑스철학을 배우면 배울 수록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는지를 곁눈질로 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이것입니다’가 아니라 ‘인간을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가 되는 것이다. 철학은 어쩌면 이렇게 하나하나 뭉처진 것들을 잘게 쪼개서 이해하는 방식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앞으로 많은 내용들이 기다리고 있다. 현대 프랑스철학까지 살펴볼 때까지 월요일은 지루하고 어렵고 힘든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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