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아카데미_에밀브루너의 서양철학사
지난시간 17세기 프랑스철학자들에 대해서 배웠다. 이 시기의 프랑스철학의 특징은 '신의 정신'이 인간의 몸 속에 내제하게 되었고,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곧 영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프랑스의 현대철학에서 '메를로 퐁티'나 '모리스 블랑쇼'를 비롯해서 최근의 '들뢰즈'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은 오직 철학아카데미에서만 볼 수 있기도 하다. 오늘은 오랜만에 류종열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처음들어보는 18세기의 철학자들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인간의 몸에 새겨진 정신의 전형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다. 처음에는 보브나르그가 나오고 이어서 디드로, 달랑베르가 등장한다. 이들은 백과전서파라고 할 수 있고, 상층부와 심층부의 구분에서 보면 심층부에 속한다.
에밀브레이어가 이 시기를 쓴 것은 '빛들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빛들의 시기라는 것을 프랑스어로 하면 뤼미에르이지만 영국의 영어로 하면 enlightment이다. 즉, 계몽주의시대라는 것이다. 빛은 한 방향으로 비취이지 않고 온 사방으로 모두 비취운다. 그 말은 빛은 가둘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으며,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빛은 '자연'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자연은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몽주의 사상을 국가별로 나누어본다면 대부분 과학자였으며, 자연을 연구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백과사전을 편찬하면서 서로 체계적인 '빛'의 체계를 만들기 위한 그룹이 백과전서파이다. 확실이 백과사전파는 기존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경험과 자연의 이론으로 '자치와 자율'의 자연을 관념에서 독립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을 받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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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브나르그 후작(마르키 드 보브나르그, Luc de Clapiers, Marquis de Vauvenargues, 1715–1747)은 프랑스 계몽주의 시기의 철학자이자 도덕 사상가이다. 그는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 군에 입대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참전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전역하였다. 이후 철학적 성찰과 문학적 활동에 몰두하며 볼테르와 서신을 주고받았고, 볼테르의 후원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그는 1746년에 '성찰과 최대구(Reflexions et Maximes)'를 출간하고, 이듬해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보브나르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과 도덕적 고양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이다. 그는 동시대 도덕주의자 라로슈푸코처럼 인간의 자기기만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본성 속에는 선과 고결함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성과 냉철한 분석보다는 감정, 의지, 용기, 고귀함 같은 도덕적 덕성을 강조하였고, 인간은 고통과 운명 앞에서도 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파스칼이 말한 ‘비극적 인간상’과 유사하지만, 보브나르그는 더 의지주의적이며 희망적 시선을 견지한다.
그의 주요 저작인 '성찰과 최대구'는 간결하고 강렬한 아포리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몽테뉴, 라로슈푸코와 함께 프랑스 도덕 아포리즘 전통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인간의 본성과 도덕적 이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대표적인 아포리즘으로는 “위대한 인물은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덕은 슬픔 속에서도 그 품위를 잃지 않는다”, “위대함은 성공이 아니라 인내에 있다” 등이 있다. 이러한 문장들은 인간의 도덕적 역량과 내면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보브나르그는 생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19세기 이후 철학자들과 문인들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특히 볼테르는 그를 진작에 높이 평가하였으며, 니체 또한 그의 도덕적 이상주의에 주목했다. 오늘날 그는 라로슈푸코와 더불어 프랑스 도덕주의 문학의 대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상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고결함에의 의지를 통해, 냉소적이기 쉬운 인간 탐구의 세계 속에서도 도덕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도록 이끈다.
보브나르그의 주요 테제
볼테르(1694-1778), 미라보(1715-1789), 마르몽텔(Marmontel, 1723-1799)과 교류하면서 지냈다.
인간 정신의 인식 입문(Introduction à la connaissance de l’esprit humain, 1746)을 쓰면서 인간의 정신에 대한 고민들을 '도덕론'으로 정리했다.
'몇몇 시인들에 관한 비판적 반성들(Réflexions critiques sur quelques poètes)'과 정열적으로 고대 도덕론자들, 플뤼타르크와 세네카를 읽었다.
보브나르그는 체계를 세우는 자. 일종의 보편적 연쇄 잡업을 시도한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서양철학사를 쓴 에밀 브레이어는 '체계'를 세우는 '정신에 관한 철학자'에 대해서 집중한다.
전형들끼리 서로서로 배제하는 정신의 전형들만을 단지 정상적으로 본다.
사람들은 전체의 약간을 아는 정직한 사람을 생각한다. 각자는 독사(doxa)속에 있다. 서로 간에 파라독사이다. 선문답은 이런 경우이다.
이 시대에 공통하는 이상들에 반대하였다. 더욱이 진보에 반대하며, 그가 보기에 그것은 진보라기보다 “야만”이다라고 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 의해서 숙명적으로 인민이로 되어 있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특성 : 아름다움, 원초적 감정은 명랑이다.
우울과 불안은 권능 없는 무능한 감정들에 기인한다.
보브나르그는 스토아주의의 오류를 보았고, 정신의 근원과 규제자를 찾았다.
“나의 모든 철학은 나의 심장 속에 그것의 근원을 갖는다” 미라보에게 편지를 쓴다. 보브나르그는 흄과 마찬가지로, 자연 종교의 비판자였다. 이런 부분에서는 심층부보다는 상층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초월자를 향하여 가게 되는 그 자체로서 이법을 인정하면서도 목적론에 반대하였다.
“존재를 갖는 모든 것은 질서를 갖는다.”
존재라기보다 현존을 중시했고, “위안을 주는 부드러운 철학"을 조했다.
그러나 백과사전파가 가지고 있는 자연주의 철학과는 달랐다. 보수적으로 관념철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네카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c. 4 BCE – 65 CE)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극작가, 정치가이며, 특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명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로, 흔히 세네카라 불린다. 그는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자 정치 고문으로도 활동했으나, 말년에는 권력 투쟁과 음모 속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사상은 철학적 고결함과 정치적 현실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며, 고대 윤리학의 깊은 통찰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세네카는 지금의 스페인 남부 지방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로마 시민으로, 부유하고 교육 수준 높은 집안 출신이었다. 로마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하였고, 특히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젊은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철학적 수련을 통해 내면의 단련을 추구하였다. 이후 황제 클라우디우스 치하에서 정치에 입문했고, 클라우디우스의 부인 메시나의 음모로 유배되었으나, 클라우디우스 사후 복권되며 황제 네로의 교육자 및 정치 고문으로 중용되었다.
세네카의 철학은 스토아주의의 핵심 원리인 이성과 덕, 정념의 절제, 자연에 따른 삶을 중심에 둔다. 그는 고통, 죽음, 권력, 부, 명예와 같은 외적인 요소들을 운명의 일부로 받아들이되,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평정(ataraxia)을 유지하는 삶을 이상으로 삼았다. 특히 그는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쁜 것처럼 보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철학적으로 극복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말년에 자살을 강요당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한 일화는 그가 말한 철학을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네카는 다양한 철학적 저술을 남겼다. '윤리에 관하여(Epistulae Morales ad Lucilium)'는 그의 대표적인 철학 서한집으로, 스토아 철학의 실천적 내용을 개인적인 조언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De Brevitate Vitae'에서는 인간이 시간을 허비하는 삶을 비판하며, 철학적 성찰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이 외에도 '분노에 관하여(De Ira)', '행복한 삶에 관하여(De Vita Beata)', '인생의 고통에 대하여(De Consolatione)'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수많은 수필이 존재한다.
그는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라틴 문학사에서 중요한 비극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희곡들은 주로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여 인간의 정념, 복수, 죄의식, 운명 등을 주제로 삼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페드라(Phaedra)', '메데이아(Medea)', '티에스테스(Thyestes)'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세네카는 철학과 정치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긴장을 겪은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검약과 내면의 고결함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네로 황제의 부정한 권력과 부에 연루되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결국 그는 네로의 의심을 받아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명령받았고, 철학적 침착함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했다. 이처럼 그의 삶은 철학적 이상과 정치적 현실의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적 인간상이다.
오늘날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의 실천적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저작은 불안한 시대 속에서도 내면의 자율성과 윤리적 통제를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죽음, 분노, 고통, 삶의 의미에 대한 그의 통찰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직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철학적 유산이다.
백과사전파는 심층부의 철학자이다. 들뢰즈와 같은 혹은 베르그송과 같은 부분에 있다. 이들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라고 보았고, 자연이 스스로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실학이후의 청문화에 대한 수입에 대한 관점을 가진 영조시대 그리고 청나라 때는 고증학이 비슷한 흐름이다. 빛들의 세기 다시 말하면 '계몽주의' 시대를 보고 19세기 칼 마르크스는 소박한 유물론으로 보았다. 일들은 자연이 생동하면서 새로운 장을 여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 안에서 '자치와 자율'을 발견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이러한 개념을 더 넓혀서 인류의 역사, 자연의 모든 역사에서 역사적인 유물론이 변증법적으로 서로 왔다갔다가 하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인간정신이 중세시대를 지나서 계몽주의 시대에 '자치와 자율'을 획득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과사전은 그러한 정신의 독립에 대한 증거였다.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와 장 르 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핵심 인물로, '백과전서(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의 공동 편집자이자 실질적인 지적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단지 편집자가 아니라, 당대의 정치·종교 권위에 맞서 이성과 지식의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실천적 철학자들이었다. '백과전서'는 단순한 정보 모음집이 아니라, 지식의 해방을 통해 인간 정신을 해방시키려는 계몽주의의 결정체였다. 디드로는 문학과 철학, 예술, 윤리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며 '백과전서'에 수많은 항목을 집필했다. 그는 특히 감각주의와 유물론, 종교 비판, 노동과 기술의 가치 재발견을 강조하였고, 전통적 권위보다는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과학적 세계관을 전파하고자 했다. 그의 철학은 자유로운 이성의 힘과 실천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데 중심을 두었다.
변화되어야만 하는 것이 변화되었다.
ce qui devait être changé ayant été changé.
달랑베르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로, '백과전서'의 서문인 ‘학문체계에 관한 서설(Discours préliminaire)'을 집필하며, 인간 지식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그는 수학과 자연과학을 중심에 두고 지식의 조직도를 제시함으로써, 계몽주의 지식론의 뼈대를 구성했다. 그는 과학적 이성과 엄밀함을 중시했으며, 철학과 종교의 갈등에 있어 보다 신중하고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백과전서'의 핵심 가치는 모든 인간이 지식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지식은 권력자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 해방의 수단이라는 데 있다. 이 백과전서는 전통적 학문 중심의 지식이 아니라, 수공업·기술·농업 등의 실천적 지식을 대등하게 수록하며, 노동과 생산 활동의 가치를 철학적 지평 위로 끌어올렸다. 이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급진적인 시도로, 신분 사회의 위계를 흔들 수 있는 지적 혁명이었다.
달라베르는 유추적용(mutatis mutandis)이라는 개념을 통해 “변화되어야만 하는 것이 변화되었다. (ce qui devait être changé ayant été changé.)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자연에 대한 이론들을 만들어 가면서 자연이 인과율에 따라서 움직이고 서로 만들어져 가는 것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자연에서 발견한 것처럼, 필연적인 변모들을 일단 실행함으로써 보다 현실적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다. “자연 속에는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개별적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도 없다.”를 주장하면서 결국은 일종의 자연주의에 이른다. 디드로는 라마르크(Lamarck, 1744-1829)의 변형론 혹은 진화론의 예감을 가졌다. 루소는 의식과 의무에 대한 자연, 디드로에게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디드로는 세계에 대한 자연 탐구, 루소는 의식에서 자연(본성) 탐구
왕실과 교회는 '백과전서'를 반사회적·반종교적 저작이라며 금서로 지정하고 출판을 금지했지만, 디드로와 달랑베르를 비롯한 집필진은 다양한 우회 방법을 통해 출판을 지속했다. 이후 달랑베르는 점차 프로젝트에서 물러나지만, 디드로는 끝까지 편집을 주도하며 20여 년에 걸쳐 백과전서를 완성하였다. 결국 '백과전서'는 단순한 책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계몽주의의 실천, 즉 인간 이성과 비판정신이 정치와 사회를 바꾸는 도구로서 지식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이 역사적 지적 운동의 중심에서, 학문과 철학을 삶의 변화로 이끄는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한 것이다.
백과사전파
백과전서파(Les Encyclopédistes)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 집단으로, 이성의 힘과 지식의 확산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철학자, 과학자, 문필가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방대한 지식 체계를 집대성한 '백과전서(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의 집필과 편찬에 참여하면서, 학문적 작업을 넘어 계몽사상의 실천자 역할을 했다. 백과전서는 단순한 사전이 아니라, 지식의 해방과 권위에 대한 도전을 담은 사상적 무기였다.
백과전서의 편찬은 1745년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공동 편집자가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원래는 영국의 백과사전을 번역하려는 기획이었으나, 디드로가 중심이 되면서 이 사업은 근대적 이성과 자유, 세속주의 정신을 퍼뜨리는 혁신적 작업으로 전환되었다. 1751년부터 1772년까지 28권으로 출간된 이 백과전서에는 약 160명의 필진이 참여했으며, 과학, 예술, 수공업, 정치,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포괄하였다.
백과전서파의 핵심 인물에는 드니 디드로, 장 르 롱 다랑베르,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 등이 있으며, 이들은 단순한 학자들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불합리와 권위주의를 비판하고자 한 실천적 지성인이었다. 이들의 글에는 종교적 교리의 비판, 신분제와 군주의 전횡에 대한 저항, 노동과 기술의 가치 재발견 같은 급진적인 사상이 녹아 있다. 특히 수공업과 기술 지식을 백과전서에 포함시킨 것은 귀족적 학문 중심의 전통을 깨는 중요한 시도였다.
사상적으로 백과전서파는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며, 무지와 편견, 전통적 권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계몽의 도구로서 지식을 강조했다. 가톨릭 교회와 왕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검열과 출판 금지를 불러왔으나, 이들은 비밀 인쇄와 해외 출판을 통해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이 제시한 인간의 존엄, 표현의 자유, 권력 분립, 법 앞의 평등 등은 이후 프랑스 혁명의 핵심 이념으로 이어졌다.
백과전서파의 활동은 18세기 유럽의 지적 지형을 바꾸었고, 근대 시민사회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들은 단지 지식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식의 힘으로 사회를 재구성하고자 했던 혁명적 사상가들이자 실천가들이었다. 그들의 작업은 오늘날 열린 지식, 민주주의, 과학적 사고의 기초로 여겨지며, 현대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공공 교육 철학에 이르기까지 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제 디드로를 넘어서 백과사전파를 더 찾아보자. 라메트리(La Mettrie), 돌바흐(d’Holbach), 엘베시우스(Helvétius), 보페르튀(Maupertuis)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급진적 사상가들이자, 디드로를 중심으로 한 백과전서파와 깊은 연계를 맺은 철학적 물질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이성, 경험, 과학의 힘을 신뢰하며, 전통적 도덕, 종교, 형이상학에 도전하였다. 특히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인간 이해의 통합을 시도한 이들은 계몽주의의 급진적 핵심부를 형성하며, 후대 유물론과 무신론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연 속에서' 발견한 '이론'은 조직화와 인과율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18세기에 들어와서 어떻게 프랑스의 철학이 생기론으로 발전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다.
라메트리 (Julien Offray de La Mettrie, 1709–1751)
라메트리는 대표적인 기계론적 유물론자로, 인간을 생리학적으로 해석한 급진적 철학자이다. 의사 출신으로서 인간 정신과 의식을 물리적 신체의 작용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그의 대표작 '인간기계(L’Homme Machine, 1747)'는 인간의 정신 활동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물질에서 비롯된 생리적 운동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이는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을 인간에게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심신이원론으로 확실하게
그는 또한 쾌락주의 윤리를 강조하며, 자연적 본능과 육체의 즐거움을 긍정하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극도로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고 프로이센으로 망명하였다.
돌바흐 (Paul-Henri Thiry, Baron d’Holbach, 1723–1789)
돌바흐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적 무신론자이자 철저한 유물론자이다.
그의 저작 '자연의 체계(Système de la Nature, 1770)'는 인간과 자연을 모두 물질과 운동의 필연적 법칙으로 설명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돌바흐는 자연에서 도덕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폭로된 크리스트교'에서 종교에 반대하는 면모를 보인다.
그는 신은 인간의 무지와 공포에서 비롯된 허구라 보았고, 종교는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돌바흐는 파리에 자신의 살롱을 운영하며 디드로, 그리몰디, 라메트리, 엘베시우스 등을 초청해 비공식 계몽주의 네트워크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는 철학을 단지 사변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실천의 무기로 간주하였다.
엘베시우스 (Claude Adrien Helvétius, 1715–1771)
엘베시우스는 감각주의적 경험론과 평등주의적 윤리관을 주장한 철학자이다.
그의 대표작 '인간(De l’homme, 1772)'과 '정신(De l’Esprit, 1758)'은 인간의 모든 정신 작용이 감각에서 유래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엘베시우스는 정신과 물질이 동등하다고 생각한 데카르트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 속에서 질선느 사물들의 본질에 근거한 배치일 뿐이다.
자연을 도덕적 세계에 적용하는 방식은 루소가 '에밀'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 자기 활동성의 유일한 법칙은 쾌락을 즐기고 고통을 두려워 하낟고 본다. 도덕은 타인의 안녕을 원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모든 차이는 교육과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교육의 평등을 통해 사회적 평등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입장은 절대주의·성직자·귀족 중심의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에, 그의 저작은 당대에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는 특히 이익과 공리의 원리에 입각한 도덕 철학을 추구하여, 후대 공리주의(벤담, 밀)에도 영향을 주었다.
모페르튀 (Pierre Louis Moreau de Maupertuis, 1698–1759)
보페르튀는 수학자이자 자연철학자로, 과학과 철학을 접목시키려 했던 사상가이다.
그는 지구 측량, 생명 기원, 결정 원리 등에서 혁신적 이론을 제시했으며, 대표적으로 "최소 작용의 원리(principe de moindre action)"를 통해 자연의 질서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는 과학과 철학을 통합하려는 시도로 계몽주의의 과학적 이상을 구체화하였고,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 아카데미를 이끌기도 했다.
한편 그는 진화나 유전 이론의 선구적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으며, 자연에 내재된 조화와 법칙이 인간 이성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계몽적 신념을 과학의 언어로 실천한 인물이다.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Georges-Louis Leclerc, Comte de Buffon, 1707–1788)은 프랑스의 박물학자, 자연철학자, 수학자, 문필가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 지식인이자 근대 생물학과 지질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자연을 신학적 질서가 아니라 관찰과 경험, 수학과 물리의 원리에 따라 설명하려는 과학적 자연관을 펼쳤으며, 인간과 자연을 연속적인 존재로 파악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의 전통적인 창조론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진화론과 유물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몽적 지적 흐름의 핵심을 이룬다. 프랑스에서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철학자는 뷔퐁이었다. 이 당시 사람들이 책을 쓰거나 소설을 쓰면 언제나 뷔퐁을 인용하기도 했다.
뷔퐁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의 후원을 받아 집필한 '자연사(Histoire Naturelle)'시리즈(총 36권)이다. 이 저작은 1749년부터 출간되었으며, 동물, 식물, 광물, 지구의 형성과 역사, 인간의 기원 등 자연 전반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연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기술하며, 당대의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을 통합하고자 했다. 특히 동물의 생태, 행동, 해부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을 언급한 점은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선 자연관을 제시한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는 자연을 역사적이고 변화 가능한 존재로 보았다. '지구의 시대에 관한 이론'(1778)에서는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이 아니라 수십만 년 이상일 수 있다는 지질학적 시간 개념을 주장하였고, 이는 이후 다윈의 진화론이나 라이엘의 지질학 이론에 선구적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생물 종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환경 변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도 언급하였다. 이는 엄밀한 의미의 진화론은 아니지만, 종의 불변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 중요한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뷔퐁은 린네(1707-1778)의 작품과는 반대 명제로 되어 있다.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정리한 위계적 분류는 뷔퐁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뷔퐁은 계열(la série) 또는 사슬(la chaîne, 연쇄 고리)을 이야기하면서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분류는 그룹핑이 아니고 방향을 가진 존재들이 연결되면서 만들어지는 연결이다. 이 연결이 통접, 이접, 연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뷔퐁은 단지 과학자가 아니라 문학적 표현력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백과전서파와도 교류하며 자연지식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그는 과학적 내용을 철학적, 문학적 언어로 서술하여, 자연을 단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와 감탄의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다. 이는 자연과학의 설명과 계몽철학의 세계관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동시에 그는 무신론이나 급진적 유물론에는 비판적 거리를 두었으며, 자연의 질서 속에 창조주의 흔적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도적 태도는 그를 백과전서파의 급진 분파보다는 계몽주의의 보편주의적 이상에 더 가까운 인물로 만든다.
뷔퐁의 과학적 작업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과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후대 생물학, 지질학, 인류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는 ‘스타 과학자’로서 대중적 인기와 과학적 권위를 동시에 가졌으며, 과학이 전문적인 학문을 넘어서 사회와 문화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이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자연철학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 이해의 확장을 통해, 세계를 더 넓게 보고 이해하려는 계몽적 사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뷔퐁의 자연에 대한 이론은 이후 프랑스 생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철학아카데미를 다닌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프랑스철학을 전공하신 류종열 선생님과 1:1로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께 배운 상층부와 심층부 그리고 표층부의 철학은 철학사 전체를 한번에 정리할 수 있는 이론이다. 이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도 너무나 다행이다. 오늘은 18세기 프랑스의 백과전서파를 만났다. 이들은 프랑스철학의 현재를 만든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진 신과 자연을 분리하고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여 결국 인간이 가장 숭고한 존재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셋팅한 후에 '프랑스혁명'의 모티브가 된다. 프랑스혁명은 인간주의의 정점이면서 자연주의를 넘어야만 만날 수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살펴본 뷔퐁의 명성도 이제서야 확인했다. 프랑스철학은 무궁무진한 신비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이제 칸트가 나온다. 계속해서 철학을 공부해야 겠다.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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